오늘날 종이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이가 대부분의 역사 동안 매우 귀하고 비쌌다는 사실을 곧잘 잊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이토록 익숙해져 있는 이 물질의 과학적 원리 등에 관해 간단히 살펴본다.

 

 

[필기용 노트의 종이]

 

공책의 종이는 평평하고 부드러우며 연속된 물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종이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처럼 작고 얇은 섬유로 돼 있으며, 사실은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이의 복잡한 구조를 느끼지 못한다. 현미경으로나 관찰할 수 있는 아주 미시적인 규모에서 가공돼, 우리의 촉각이 느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의 화면은 일반적으로 60 Hz의 빈도로 깜빡거리지만 우리의 시각이 인지할 수 있는 정도보다 빠르게 깜빡거리기 때문에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도 같다.). 즉, 우리가 종이를 부드럽다고 느끼는 것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서 둥글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이는 나무에서 삶을 시작한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작은 섬유인 셀룰로오스(cellulose, 셀룰로오스는 수백에서 수천 개의 D-포도당 단위체들이 β(1→4) 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연결된 선형 사슬이 중첩된 격자형의 다당류로, 화학식이 (C6H10O5)n 인 유기 화합물이다. 셀룰로오스는 녹색식물, 다양한 형태의 조류 및 난균류의 1차 세포벽의 중요한 구조적인 구성 요소이다. 어떤 종류의 세균은 셀룰로오스를 분비하여 미생물막을 형성한다. 셀룰로오스는 지구 상에서 가장 풍부한 유기 화합물이다. 식물은 해마다 1014 kg의 셀룰로오스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지구상의 유기화합물들 중 가장 많은 양이다. 면섬유의 셀룰로오스 함량은 90%이고, 목재의 셀룰로오스 함량은 40~50%이며, 건조된 삼(hemp)의 셀룰로오스 함량은 약 57%이다. 셀룰로오스는 주로 판지 및 종이 제조에 사용된다. 소량이라도 셀로판, 레이온과 같은 다양한 파생 상품으로 전환된다. 에너지 작물의 셀룰로오스를 셀룰로오식 에탄올(cellulosic ethanol)과 같은 바이오 연료로 전환하는 것은 재생 가능한 연료 공급원으로 개발 중에 있다. 산업용 셀룰로오스는 주로 목재 펄프 및 면섬유로부터 얻는다.)에서 온다. 이 셀룰로오스는 리그닌(lignin, 침엽수나 활엽수 등의 목질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성분 중에서 지용성 페놀 고분자)이라는 유기물 등에 의해 단단히 붙어있다. 그래서, 리그닌 등의 존재로 인해 셀룰로오스는 대단히 단단하고 복원력이 좋은, 수백 년을 지탱할 수 있는 합성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리그닌 등과 셀룰로오스 섬유를 분리해서 셀룰로오스 섬유만을 추출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마치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떼어내려 애쓰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나무에서 리그닌 등을 제거하는 과정은 이렇다. 나무를 작은 조각으로 자르고 높은 온도와 압력을 가하며 화학약품과 함께 끓인다. 이 과정을 통해 리그닌 등과의 결합이 끊어지고 셀룰로오스 섬유가 풀려난다. 이 과정이 다 끝나면, 나무 펄프(pulp)라고 하는 엉킨 섬유가 남게 된다. 이것은 액체가 된 나무라고 할 수 있는데,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이 섬유가 소스에 잠긴 불어터진 스파게티 면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펄프를 평평한 표면에 놓은 뒤 말리면 종이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본 종이는 거칠고 갈색 빛을 띤다. 이것을 희고 매끄러우며 빛나는 종이로 만들려면, 화학적으로 표백(bleaching)을 하고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CaCO3)와 같은 곱고 흰 가루를 섞어줘야 한다. 이후에 종이 표면에 사용된 잉크가 셀룰로오스 조직에 너무 깊이 스며들어 주위로 배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코팅을 한다. 이상적으로는, 잉크가 공책 종이 표면에 아주 약간만 스며들고 거의 즉시 말라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잉크의 색깔을 가지는 분자들이 셀룰로오스 조직에 안착하고, 종이에 영구적인 자국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 두 가지 이유로 누렇게 변색된다. 값싼 저급 펄프로 만든 종이의 경우, 리그닌 등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아서 안에 상당한 양의 리그닌이 포함돼 있는데, 종이에 남아있던 리그닌은 빛이 있는 환경에서 산소와 만나 ‘발색단(chromophore)’이 형성되는데, 이와 같은 발색단의 농도가 증가하면 그 결과로 종이의 색이 누렇게 변한다. 리그닌 등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는 종이 제조 공정으로 생산된 이런 종이는 값싼 일회용 종이 제품에 쓰인다. 신문지가 빛을 받으면 금세 누렇게 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황화알루미늄(aluminum sulfide, Al2S3)은 일반적으로 물을 정화하기 위해 쓰는 화학성분인데, 19세기의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면 물질을 산성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종이의 표면을 황화알루미늄으로 코팅하면 종이의 재질감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종이가 산성 상태가 되면, 종이의 셀룰로오스 섬유가 수소 이온과 반응해 역시 종이를 누렇게 만들고, 강도도 떨어뜨리게 되는데, 19세기와 20세기에 만들어진 많은 책들은 이러한 소위 ‘산성 종이’에 인쇄됐고, 밝은 노란색을 띠는 특유의 겉모습 때문에 요즘도 도서관 등에서 요즘 책들과 쉽게 구분될 수 있다. 참고로, 산성 종이가 아니더라도, 모든 종이에서 느리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종이의 노화가 일어나는 것은 다양한 휘발성(쉽게 증발한다는 뜻) 유기 분자가 생성됐기 때문이다. 이 유기 분자들은 오래된 종이와 책에서 나는 냄새의 원인이기도 한데, 도서관의 많은 장서를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최근 책 냄새와 관련한 화학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흑백사진 인화용지]

 

흑백사진은 브롬화은(silver bromide, AgBr)과 염화은(silver chloride, AgCl) 분자를 함유한 미세한 겔(gel)로 코팅된 흰 종잇조각을 이용한다. 피사체로부터 반사된 빛은 카메라 렌즈 속으로 들어가 인화용지에 떨어지고, 그 빛은 브롬화은과 염화은 분자를 환원시킴으로써 작은 은 금속결정으로 바꾸게 되고, 이것은 종이 위에 회색의 작은 반점처럼 보이게 된다. 이때 종이를 카메라에서 제거한다면 피사체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없던 흰 영역(즉, 환원되지 않은 브롬화은과 염화은이 남아 있는 영역)이 넘쳐나는 빛에 휩싸일 것이고, 이 빛은 브롬화은과 염화은 분자와 즉각 반응해 인화용지 전체를 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진 인화작업은 암실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빛과 반응하지 않은 브롬화은과 염화은은 인화용지에서 제거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종이 표면에는 겔 층에 포함돼 있는(즉, 환원 반응으로 생성된) 은 결정만 남는다. 그것을 말리면 피사체의 흑백사진을 얻을 수 있다.

 

 

[지폐]

 

지폐(최근에는 플라스틱 지폐가 등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플라스틱 지폐는 1988년 호주에서 만들어졌는데, 이 지폐는 화학 고분자(폴리머polymer)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폴리머 지폐로 불리기도 한다. 호주준비은행(RBA)과 호주연병과학원(CRIRO)의 공동 개발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외형상 종이 지폐와 구분되지 않는 플라스틱 지폐는 빛에 비춰보면 광택이 나고 만질 때 좀 더 빳빳한 정도의 세심한 차이가 난다고 한다. 1988년 호주가 최초로 도입한 이후 캐나다, 싱가포르, 홍콩 등 20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는 세상에 만들어진 종이 중 가장 복잡한 종이이며, 그래야만 한다. 이는 사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우리가 전체 경제 시스템에서 갖춰야 할 신뢰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지폐는 그 안에 여러 가지 교묘한 장치를 감추고 있다. 우선 다른 종이와 달리 나무 셀룰로오스로 만들지 않고 면섬유(cotton)로 만든다. 면 셀룰로오스는 지폐의 강도를 더 강하게 하고, 비를 맞거나 세탁기 안에 들어가도 잘 분해되지 않게 한다. 면섬유는 종이가 내는 특유의 소리도 바꿨는데, 덕분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지폐의 가장 잘 알려진 특성 중 하나가 됐다.

 

면섬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위조를 방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무로 만든 종이로는 위조지폐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면 종이의 특수한 재질을 검사한다. 사람들도 재질에 민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폐에 일말의 의심이 간다면, 면으로 만들어진 지폐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손쉬운 화학실험도 있다. 가게에서는 요오드 펜을 이용해 이런 검사를 한다. 셀룰로오스로 만든 종이에 요오드 펜을 쓰면, 요오드가 셀룰로오스 안의 전분과 반응해 색소를 형성하고 그 결과 검은색이 나타난다. 하지만 면 종이에 쓰면, 요오드와 반응할 전분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 이런 두 가지 기본적인 실험을 통해 가게에서도 컬러복사기를 이용한 위조지폐의 이용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지폐는 또 다른 교묘한 장치를 숨기고 있는데, 바로 워터마크(watermark)이다. 종이에 내장된 무늬나 그림을 말하는데, 빛이 종이를 투과할 때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폐를 빛 쪽으로 들고 있어야 볼 수 있다. ‘물 자국’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 무늬 또는 그림은 물이나 잉크 등의 자국과 관련이 없다. 공학적으로 면의 밀도를 약간 다르게 하면, 지폐의 서로 다른 부분이 밝거나 어두워지면서 무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수증]

 

영수증을 자세히 만져보면 일반 종이보다 매끈매끈하다. 이는 영수증의 종이 재질이 일반 종이와 다르기 때문인데, 영수증에 사용되는 잉크도 다른 종류가 쓰인다.

 

영수증이 나오는 기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기계에 종이가 있지만 잉크가 나오는 부분은 없다는 것인데, 영수증은 글을 쓰기 위해 열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즉, 영수증의 종이는 감열지(열에 반응하는 특수한 종이)이기 때문에, 열이 가해진 부분만 검은색으로 변색이 된다. 감열지에는 무색 염료(류코(leuco) 염료)와 발색 촉매제(비스페놀 A, 참고로 비스페놀 A는 내분비 교란물질이라서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촉매는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화학반응 속도를 더 빠르거나 느리게 조절하는 방식으로 화학반응을 돕는 물질을 의미한다.)가 캡슐 속에서 산성인 고체 상태로 붙여져 있고, 열을 가해지면 발색 촉매제가 산, 그리고 무색 염료와 반응함으로써, 투명한 염료가 검은 색소로 변하며 글자가 된다. 기계에 잉크가 떨어질 리 없는 교묘한 종이 기술인 것이다. 그리고 영수증에 인쇄된 글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 지는데, 이는 인쇄된 열전사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해되어 다시 투명한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편, 영수증은 물파스처럼 염기성인 물질이 닿으면 글씨가 지워진다. 왜냐하면 염료와 발색 촉매제가 섞이면 산성이 되는데, 물파스는 염기성이기 때문에 산성과 염기성이 만나면 중성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즉 까만색이 다시 무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전자종이(e-paper)]

 

대만 기업 e-ink 사 등이 만든 디스플레이의 종류로, 흔히 평판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LCD나 OLED와는 달리 별도의 구동 없이 정지 화상을 유지하는 특성을 갖는 디스플레이를 지칭하는데, 전자종이는 진짜 잉크 입자를 이용해 글자를 표시하는 평평한 스크린으로, 마치 진짜 책처럼, 빛이 그 위에 반사했을 때 그 빛을 통해 읽도록 설계됐다. 진짜 종이와의 차이점이라면 전자종이는 필요한 글자를 즉시 표시하기 위해 디지털로 조절된다는 점이다.

 

이 기술은 정전기적 야누스 입자라고 불리는 형태의 잉크 덕분에 가능하게 되었다. 잉크 입자 각각은 한쪽 면은 어두운 색, 다른 쪽은 흰색으로 염색돼 있다. 두 면은 서로 반대되는 전기 전하를 띠고 있고, 따라서 전자종이의 모든 화소(픽셀)는 적절한 전기 전하를 가하면 어둡거나 흰색을 나타낼 수 있다. 이 입자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변화의 신 이름을 따서 이름이 야누스 입자라고 불리게 됐다(참고로, 야누스는 얼굴이 둘이고, 때로 문이나 대문과 관련이 있다.). 야누스 입자는 진짜 물리적 입자인 까닭에, 글자가 바뀔 때 물리적으로 회전을 해야 하므로 LCD나 아이패드, 스마트폰의 스크린처럼 화면이 빨리 바뀌지는 않는다. 따라서, 영화나 다른 보기 좋은 콘텐츠를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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