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arsenic, As, 순수한 금속 비소와 유기 비소는 독성이 적으나 무기 비소 특히 삼산화비소(As303)는 독성이 매우 크며, 미국독성학회에서 비소를 ‘King of Posion’으로 명명할 정도로 맹독성을 갖고 있다.)’는 거의 독약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비소를 이용한 살인은 독살(독을 이용한 살인)의 표본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비소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물질보다는 화합물의 형태로 활용하며 의약품 또는 합금 첨가제 등으로도 이용해 왔지만, 길고도 화려한 살인의 역사, 암살의 역사와 함께했다. 우리 역사에도 임금이 내렸던 사약의 주성분이 아비산(비상)으로 알려져 있다. 급성 및 만성 중독에 의해 간, 신장, 피부 등에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다.
비소는 비록 자연 상태에서는 순수한 원소보다는 화합물의 형태로 나타나긴 해도, 지구 표면에서 14번째로 흔한 원소이다. 13세기에 처음 검출되었으며 회색의 준금속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비소의 영어 단어 ‘arsenic’은 ‘노란 석황(石黃, orpiment)’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zarnikh’에서 왔다. ‘노란 석황’은 밝은 색상의 비소와 황(sulfur) 복합물이다. ‘zarnikh’는 이후 그리스어로 ‘arsenikon’이라 번역되었는데 ‘남자다움’ 혹은 ‘강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arsenikos’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arsenikon’에서 마침내 ‘arsenic’에 이르게 된다. 비소를 독약이란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대개 ‘흰색 비소(white arsenic)’ 혹은 삼산화비소(arsenic trioxide, As2O3), 아니면 또다른 형태의 치명적인 비소 화합물을 말한다. 순수한 원소 형태에서 비소는 인체에 쉽게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삼산화비소보다 덜 치명적이다.
비소 화합물의 독성은 적어도 클레오파트라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집트의 여왕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가능한 덜 고통스러우면서 또한 사망 후에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남기를 바랐는데, 여왕은 노예들에게 다양한 독약을 시험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그중 비소도 있었는데, 죽음에 이르는 길로는 명백히 좋지 않은 방법으로 판단되었고, 결국 그녀는 독사를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비소가 대중적인 살인 방법으로 쓰였다. 특히 스페인 기원의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보르자(Borgia) 가문에서 애용했다고 한다. 보르자 가문에서는 도살한 돼지 내장에 비소를 뿌린 다음 부패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말려 가루로 만들었는데 ‘라 칸타렐라(La Cantarella)’라 불렸던 이 연한 고형물을 살인의 목적으로 음식이나 음료에 첨가했다고 한다.
당시에 비소를 사용했던 이점은 두 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비소는 아무런 맛이 없어서 잠재적인 희생자가 자신이 중독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둘째, 비소 중독은 (비소 검출법이 없었으므로) 식중독이나 콜레라, 이질(dysentery)과 증상이 비슷해서 비소 중독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참고로, 식중독이나 콜레라, 이질 모두 당시에 여러 연령대에서 다양한 시기에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들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힘 있고 영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은 공인 맛 감식가를 고용했고(참고로,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알기 위해 은수저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소와 은이 반응하면 검은색이 되기 때문이다.),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을 면밀히 주시했다. 맛 감식가를 피해 살인을 저지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장갑과 승마용 장화에 독약을 묻혀서 피부 접촉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실험을 통해 독약을 바른 셔츠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비소를 투여하는 유효한 방법일 수 있음은 입증되었다. 문제의 옷은 비소가 든 용액에 말단 부위를 흠뻑 적신 후 건조하면, 천이 다소 빳빳한 느낌은 있지만 달리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는 두드러진 징조는 없다. 이제 옷이 맨살에 닿으면 죽음에 이를 만큼 충분한 양의 비소가 피부를 통해 공급된다. 특히 피부에 물집이 잡히게 만드는 물질을 비소 혼합물에 함께 첨가하면 비소가 피부를 뚫고 혈액 속으로 더 빨리 침투할 수 있다.
비소 독살은 오랫동안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철이나 납과 같은 금속이 대량으로 필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소는 지구 표면에서 14번째로 흔한 원소이기 때문에, 땅에서 광석의 형태로 추출되는 이 금속들에는 종종 비소가 묻어 있었다. 순수한 금속을 얻기 위해 광석을 불에 그을려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비소가 반응하게 만들었다. 산소와 만난 비소는 삼산화비소로 변해 굴뚝 내부에 흰색 고체 형태로 응축되었다. 굴뚝이 막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굴뚝 내벽에 쌓인 삼산화비소를 긁어내야 했다. 기업가들은 흰색 비소를 쓰레기로 내다 버리는 대신 독약으로 판매하면 이윤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쥐, 빈대, 바퀴벌레, 혹은 인간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다른 해충들을 제거하는 용도로 말이다. 이에 따라 비소의 가격이 급락했고 이내 누구나 달갑지 않은 친지 혹은 귀찮은 적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만큼 충분한 비소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울 것도 없이, 비소 독살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의 신문을 읽은 사람이라면 당시 비소 살인이 전염병 수준으로 만연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독살 사건은 극히 적었다고 한다(당시 언론에서 지나치게 흥분해 보도를 일삼았을 때에도 영국 전역에 걸쳐 오직 두세 건의 재판이 있었을 뿐이었다.).
만일 독살에 비소가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이들 초기 사례에서 독살을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희생자의 증상은 자연적인 원인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사체에서 비소를 검출하는 방법 또한 없었다. 이제 무언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인체 조직에서 비소를 검출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초기 방법들 중 신뢰할 만한 것은 없었다. 손쉽게 논의되거나 심지어 법정에 제시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지도 못했다. 존 보들(John Bodle) 사건이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1832년, 영국의 화학자 제임스 마시(James Marsh, 1794~1846)는 80세의 농부 조지 보들(George Bodle)의 사인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마시는 사체의 장기와 고인이 죽기 전 커피를 따라 마셨던 컵 안에서 비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마시가 재판을 위해 준비한 시료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 했고 배심원들은 그가 설명하는 실험의 기술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용의자 존 보들(조지 보들의 손자)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나중에 존 보들은 살인을 자백했지만, 그를 다시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다. 마시는 분노했고 가장 멍청한 배심원도 이해할 수 있는 비소 검사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는 배심원들이 직접 눈으로 비소를 확인하길 바랬던 것이었다. 마시의 비소 검사법은 1840년 독성학자 마티외 오르필라(Mathieu Orfila, 1787~1853)가 형사 사건 재판에서 처음 선보였다. 하지만, 이 재판 후에 마시의 비소 검사법은 너무 민감하다는 것이 결점(?)으로 드러내었다. 마시의 비소 검사법으로 0.02밀리그램의 비소를 탐지해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과학 수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비소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19세기에는 비소가 각 가정에서 여러 용도로 널리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8세기 기업가들은 제련소에서 점차 쌓여만 가는 비소 쓰레기를 쥐약 외에 사용할 방도를 찾아냈다. 일부 비소 화합물은 밝은 색상을 띠어 수천 년 동안 안료로 이용되었다. 강렬한 노란색의 석황(As2S3)과 새빨간 광물인 계관석(realgar, 鷄冠石, AsS)이 대표적이다. 1775년, 카를 빌헬름 셸레(Carl Wilhelm Scheele, 1742~1786)가 셸레그린(Scheele’s green, CuHAsO3)을 확인하면서 비소 기반 안료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비소 화합물은 식물성 염료에 크나큰 향상을 가져왔는데, 색이 쉽게 바래지 않고 값이 싸며 만들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붉은색과 초록색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벽지에서부터 의류, 장난감, 심지어 사탕이나 케이크 장식 같은 먹을거리 등 거의 모든 것에 비소가 염료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비소로 염색한 벽지의 경우 비소와 관련해서 특기할 만하다. 비소 가루에 직접 노출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로웠기 때문이다. 비소 벽지가 도배된 침실은 빈대가 없어져 깨끗했고 이것이 장점으로 여겨지며 초기에는 판매가 증가했다. 하지만 빈대를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건 이내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벽에다 벽지를 고정하기 위해서 밀가루 풀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영국의 습한 기후와 합쳐져 곰팡이들이 자랄 완벽한 환경을 제공했다. 또한 비소를 화학적으로 제거하거나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곰팡이들도 생겨났는데, 가스 형태의 비소 화합물과 관련해서는, 1893년, 바르톨로메오 고지오(Bartolomeo Gosio, 1863~1944)가 ‘페니실리움 브레비카울룸(Penicillium brevicaulum, 지금은 스코풀라리옵시스 브레비카울리스(Scopulariopsis brevicaulis)로 알려져 있다)’이라는 곰팡이가 녹말풀을 공격해 비소 가스를 배출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는 직접 가스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가스에서 나는 독특한 마늘 향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 가스가 고지오 가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 고지오 가스가 트리메틸아르신(trimethylarsine, As(CH3)3)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스는 매우 유독했기 때문에 벽지에 사용된 비소를 모조리 제거하라는 권고가 내려지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 프랑스인에게는 너무 늦은 권고였다.
182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유배 생활 중 마지막 달 내내 나폴레옹은 몸이 좋지 않았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의사 여럿이 다녀갔다고 한다. 황제는 심각한 위통을 겪고 있었는데, 의사들의 치료도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나폴레옹이 죽자 일곱 명의 의사가 부검에 참석했고, 사인을 위암으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독살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으며, 프랑스는 영국에 죄를 덮어씌웠고 영국은 프랑스를 탓했다. 당시에는 신뢰할 수 있는 검사법이 없었기 때문에 독살을 확인하거나 부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1960년대 들어 사망 직후에 수거해 유품으로 보관해 온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대상으로 검사가 이루어졌다. 비소를 함유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검사에서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의 비소가 검출되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의 비소가 축적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한 가설은 벽지를 의심했다. 1980년대에 나폴레옹의 침실 벽지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분석 결과 0.12 g/m2라는 상당한 양의 비소가 검출되었는데, 1893년에 이루어진 한 자세한 연구에 따르면, 0.015 g/m2에서 0.6 g/m2 사이의 비소를 포함하고 있는 벽지는 건강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심지어 0.006 g/m2이라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소 화합물이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던 경우도 있다. 19세기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는데, 구토, 설사, 발한과 같은 증상에 대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효과가 입증된 의약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복은 대개가 일시적이었고 임상 실험이나 추적 검사는 사실상 없었다. 환자들은 종종 의사의 도움 없이도 회복했다(어쩌면 되려 의사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회복했을 수도 있다.). 인체에 눈에 띄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알려져 있던 화합물들은 간혹 매우 유독했다(21세기 이전 의사들의 왕진 가방 속에 담겨 있던 화합물들은 거의가 오늘날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19세기에 흔히 사용된 약물들 중에 파울러 용액(Fowler’s solution)이 있다. 1809년 <영국 약전(British Pharmucopoeia)>에 처음 소개되었고, 초기에는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였지만 이후 다양한 질환에 처방되었던 강장제이다. 파울러 용액은 아무런 맛이 없었기에 말라리아 치료제로 주로 사용되던 쓴 맛의 퀴닌(quinine, 혹은 키니네)보다 선호되었고, 점차 피부 질환에서 천식까지 치료 대상 질환이 늘어났다. 그런데, 파울러 용액의 주요 성분은 물론 비소의 한 형태인 아비산칼륨(potassium arsenite, K2AsO3)이었다. 따라서 빅토리아 시대의 사체에서 비소가 검출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비소가 사용된 독극물 범죄 사건을 기소한 측에서는 비소가 사망 원인임을 밝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비소 입수 경로와 희생자에게 비소가 주입된 경로까지 밝혀야 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1851년 영국에서 비소 법안(The Arsenic Act)이 통과되었다. 비소의 판매를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비소를 구매하는 사람은 이름과 구매량, 사용 목적을 등록부에 기록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사탕과 같이 단맛 나는 먹을거리로 오해하는 위험을 줄이고자, 의료 혹은 농업에서 검은색이나 남색으로 염색하는 데 비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법안에도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예를 들어, 비소 화합물을 판매하려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규제도 없었으며, 다른 누군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등록부에 허위 정보를 기재해도 검증할 수단이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비소뿐 아니라 다른 독약들의 판매에 가해지는 규제들도 강화되어, 일부 전문가나 약국과 같은 일부 상점에서만 독약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독약을 사려는 사람도 약사 혹은 약사와 구매자 모두를 아는 사람에게 보증을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이 독극물 범죄가 일어나면 이론상으로는 독약 등록부를 통해 독살범을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비소를 구하기란 굉장히 쉬웠고, 독약 등록부에 기재된 수많은 ‘적법한’ 사용 목적과 달리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의무는 기소자 측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피고인이 ‘스티리안 변론(Styrian defence)’을 펼친다면 사건은 더욱 복잡해졌다. 스티리안 변론은 사체에 많은 양의 비소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법적 논거였다. 1851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의학잡지에 정기적으로 비소를 복용하는 스티리아(Styria) 지역 사람들에 관한 보고가 실렸다. 이들은 삼산화비소 덩어리를 으깨 먹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 빵에다 발라 먹었다. 1회 복용량은 작은 완두콩만 한 크기에서 시작해 점차 늘어나서, 법적인 처벌에서는 벗어나지만 통상 치사량으로 여겨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은 이 지역 사람들이 삼산화비소가 그들에게 바람(Wind)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소가 희박한 산악 지대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 보다 원활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 또한 비소는 남성들의 덩치를 키우고 피부를 밝게 하며 보다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여성들 또한 비소를 사용했는데, 좀 더 굴곡진 몸매와 ‘혈색이 좋고 매끄러운’ 피부색을 갖게 해 주었다. 게다가 비소는 잡티나 반점을 유발하는 박테리아를 제거했으며, 피부 아래 부종(근육 내에 체액을 가두는)과 모세혈관 확장을 일으켜 뺨을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여 주었다. 비소를 습관적으로 복용할 경우 여러 질환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일부는 오히려 비소를 먹지 못했을 때 몸이 아프다고 불평했다. 처음에는 스티리아 사람들이 비소에 내성을 갖게 된 것처럼 보였다.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비소를 천천히 투약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딱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이들은 진짜 내성을 발달시킨게 아니었다. 고운 가루 혹은 액체에 녹인 상태로 복용하는 것에 비해, 비교적 큰 덩어리로 꿀꺽 삼키면 많은 양도 섭취가 가능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혈액으로 흡수되기 전에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스티리아 사람들에 대한 보고와 그들의 매력적인 외모, 겉으로 보기에 매우 훌륭한 건강 상태가 알려지자 유럽과 미국에서 비소를 복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미용을 위해 피부에 직접 바르거나 건강을 목적으로 적은 양을 물에 타서 마시는 사람들도 생겨났던 것이었다.
비소는 축적성 독약이기 때문에 복용자의 몸속에서 점차 누적되어 매우 위험하거나 치명적인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사망의 원인이 설사 비소 중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후 검시 과정에서 당사자가 비소 복용자였는지 여부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가려진다. 체내에 쌓인 비소가 보통은 부패를 유발하는 박테리아들을 제거해 버려 사체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탓이다. 앞에서 예로 든 스티리아에서는 매장 후 12년이 지나면 무덤에서 송장을 꺼내는 관습이 있었다. 무덤으로 쓸 땅이 부족해서 고인의 뼈를 추려 지하 납골당으로 옮기고, 무덤은 다음 사람을 위해 비워 두었다. 한데 비소 복용자들의 시신이 종종 너무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12년이나 흘렀음에도 가족이나 친지들이 시신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다. 어쩌면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시작된 뱀파이어 전설이 비소를 품은 사체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비소는 이 탁월한 보존 능력 탓에 방부 처리에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비소로 독살된 사체의 경우 살해의 증거를 덮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비소는 더 이상 방부 처리에 사용할 수 없게 금지되었다. 그 자리는 포름알데히드가 대신했다. 그럼에도 사체가 비소로 오염되는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비소는 흔한 광물이었고, 땅에 묻힌 후 흙에서 유입될 수도 있기 떄문이다.
한편, 비소는 황 원자와 강하게 결합한다. 황은 우리 몸, 특히 머리카락에 많이 존재한다. 그 덕분에 비소에 노출된 시점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섭취 후 몇 시간 안에 비소는 모근에 자리를 잡는다. 머리카락이 자라도 비소는 고정된 위치에 머물러 있다. 머리카락은 대략 한 달에 1센티미터 정도의 규칙적인 속도로 자라기 때문에 머리카락 가닥의 순차 분석을 통해 비소에 노출된 연표를 짤 수 있다. 또한 비소가 든 용액에 사체의 머리카락이 닿으면 스펀지처럼 비소를 흡수해 저장할 수도 있다. 그 결과로 용액보다 머리카락의 비소 농도가 더 높아진다. 사후 검시를 하는 동안에는 머리카락이 사체에서 나온 체액과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체액과 닿는 경우 머리카락의 비소 농도가 인위적으로 높아져 오랜 기간 비소에 노출되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사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가 필요하다. 사체가 묻힌 주변 흙을 수집해 함께 분석해야만 한다.
참고로, 비소와 같은 중금속을 퍼뜨리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화산폭발이다. 1991년 6월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을 때, 많은 양의 화산재와 가스가 대기권으로 방출했는데, 100억톤의 마그마, 2천만 톤의 이산화황, 2백만 톤의 아연, 1백만 톤의 구리 등이 지표면으로 나왔고 이 중에 비소도 대량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화산폭발이 없었던 우리나라도 비소 오염지역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금광 지역에 비소 오염 농도가 높은데 금과 비소가 친하기 때문이며 금만 캐내고 비소만 남겨지기 때문이다(나주의 덕음광산 지역에선 비소 오염으로 벼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동남아 지역의 경우, ‘비소 대재앙’으로 표현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전 세계에서 비소 오염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방글라데시인데, 방글라데시 총인구 중에 3천만 명이 비소에 노출되었으며 그 중 250만 명이 중독 증상을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다.).
[비소의 독성 원리]
삼산화비소 및 그와 관련한 화합물의 독성은 체내 기초 생화학 처리 과정이 방해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소 화합물은 피부나 폐, 위장 등을 통해 손쉽게 흡수되는데, 많은 독살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음식, 음료, 약물에 비소를 첨가한다.
비소 화합물은 비산염(arsenate, AsO43-)과 아비산염(arsenite)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띠는데, 이 둘은 우리 몸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비산염은 구조나 화학적인 면에서 인산염(PO43-)과 비슷해서 우리 몸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 인산염은 뼈를 튼튼하게 한다든가 DNA 이중나선 구조를 형성하는 등 우리 몸속에서 필수적인 역할들을 수행하며, 또한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과정에도 참여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로 에너지를 전달하고 저장한다. 즉, 우리 몸에서는 들이마신 산소나 섭취한 음식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화학 물질을 만들어낸다. ATP에서 인산염을 전달받은 분자들은 보다 활발한 화학 반응을 나타내고 대개의 생체 기관들이 보이는 비교적 약한 조건에서도 반응을 일으킨다. 비산염 화합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ATP에서 인산염 자리를 이들 화합물이 꿰차기 때문이다. 비산염은 인산염보다는 화학적으로 반응성이 덜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산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비산염이 들어감으로써 화학 반응이 느려지고 아예 멈추게 될 수도 있다.
삼산화비소, 비소 가스, 그리고 셸레그린 같은 비소 안료들은 모두 비산염이 아니라 아비산염 화합물이다. 아비산염 화합물은 체내에서 비산염과는 다른 생화학 작용으로 목숨을 앗아 가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삼산화비소를 예로 들겠다. 삼산화비소는 오랫동안 살인에 가장 흔히 사용된 아비산염 화합물이다. 삼산화비소 중독의 첫 번째 증상은 복부 통증과 극심한 구토다. 대략 섭취 후 30분쯤, 위장 조직 세포를 자극한 결과로 나타난다. 운이 좋으면 이 시기에 독약 대부분을 몸 밖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운이 나쁘면 치사량에 이르는 100~150 밀리그램의 독약이 혈액으로 스며든다. 과거 비소 중독의 많은 희생자들이 몇 주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양의 독약을 구토나 설사를 통해 몸 밖으로 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의 많은 비소 독살범들이 간호사였는데, 그들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희생자들에게 추가적으로 독약을 투약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산화비소로 유발된 위장 조직 내 염증은 사후 검시 과정에서 병리학자들의 눈에 발견될 수 있다. 염증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극심한 구토와 끊이지 않는 설사는 탈수증을 일으키며 이때 체내로 수액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목숨을 최종적으로 앗아 가는 것은 삼산화비소로 인한 몸속 생화학 과정의 붕괴이다.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반응은 효소(생체 내 효소의 대부분은 단백질이다.)가 수행한다. 단백질 형태의 효소는 아미노산 가닥으로 이루어진 거대 분자인데, 이 아미노산들이 꼬이고 감기면서 정확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한다. 효소들은 일반적으로 기질(substrate, 基質)이라 불리는 화합물에 대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효소와 기질의 작용을 묘사하는 데 종종 ‘자물쇠와 열쇠 모델(key-and-lock model, 참고로 induced-fit model이 보다 일반적인 설명이다.)’ 비유가 사용될 수 있다. 효소가 자물쇠이고 기질이 열쇠며, 열쇠가 자물쇠에 맞아 들어가는 공간이 곧 활성 부위이며, 구조적으로 상보적인 두 요소가 서로 정확히 맞아야 하기 때문에 매우 적은 수의 열쇠가 하나 이상의 자물쇠를 열 수 있다는 비유이다. 효소는 화학 반응을 통해 기질 혹은 ‘열쇠’를 변형한다. 크기나 형태를 바꿔 더 이상 ‘자물쇠’에 들어맞지 않게끔 만들어서, 기질은 이제 효소에서 생성물로 떨어져 나오고 효소는 자유로이 다음 기질을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백질과 효소를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몇몇은 황 원자를 지니고 있다. 황 원자는 효소가 형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화학 결합(소위 이황화 결합(disulfide bond))을 형성한다. (아비산염 형태의) 비소는 황 원자와 강하게 결합하고 이로 인해 효소, 혹은 ‘자물쇠’의 형태가 일그러지게 되어서 결국에는 효소가 작용을 멈춘다. 일단 비소 화합물이 혈액으로 들어가면 우리 몸 곳곳으로 확산이 되어, 황을 포함한 어떤 효소나 (구조)단백질 등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리 몸 속에서 많은 수의 효소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비소 중독으로 인한 증상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최소 치사량의 열 배에 달하는 다량의 비소를 복용하면 급성 위장염과 구토, 극심한 복부 통증, 많은 양의 수분과 혈액을 동반한 설사가 유발된다. 피부는 차고 끈적끈적해지며, 혈압이 떨어지고 몇 시간 내에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서 죽음이 찾아온다. 경련이나 혼수상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신호이다. 비소 화합물이 끼어들어 방해하는 효소 중 일부는 세포 내 에너지 처리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세포는 기능을 하지 못해 재빨리 죽는다. 많은 수의 세포가 죽으면 결국 신체 기관도 작동을 멈춘다. 어떤 세포는 다른 세포들보다 많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심장이나 신경 세포는 적혈구보다 에너지를 많이 쓴다. 효소가 조절하는 세포 내 대사 과정들 또한 비소의 방해 공작에 쉽게 무너진다. 비소가 세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많다. 만일 중독된 사람이 하루나 이틀을 더 산다면 황달이 나타나고, 소변이 줄거나 멈출 것이다. 우리 몸에서 독성 물질을 제거하는 장기인 간이나 신장이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비소는 급성 중독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독성을 나타낸다. 오랜 기간 체내에 조금씩 들어온 비소가 서서히 축적되면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효과를 불러오는데, 이를 만성 중독이라 부른다. 복용량이 적으면 메스꺼움과 구토뿐만 아니라 두통, 어지러움, 경련, 일시적인 마비가 몇 주에 걸쳐 진행된다. 심장 부정맥이 유발될 수도 있다. 만성 중독의 경우에는 여러 신체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사망에 이른다. 중추 신경계의 신경 세포, 특히 축삭돌기(axon, 신경 세포(뉴런)의 세포체에서 길게 뻗어나온 가지)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 축삭돌기는 운동 뉴런 (신체 동작을 제어하는 신경 세포)의 긴 부분으로 척수에서 신체 말단 부위까지 뻗어 있으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축삭돌기에 문제가 생기면서 손발에 감각이 없어지거나 불에 타는 듯 뜨거운 느낌이 동반된다. 만성 중독으로 간이나 신장, 순환 계통 또한 손상을 입는다. 규칙적으로 비소를 복용하면 체내에서도 황이 많이 포함된 부위, 예를 들어 케라틴(keratin) 단백질이 있는 머리카락이나 손발톱, 피부에 비소가 축적된다. 오랫동안 비소를 복용한 사람들은 처음의 매끄럽고 환한 혈색을 잃고 (과색소침착, hyperpigmentation 이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피부가 검게 변하고 손바닥과 발바닥에 딱딱한 비늘 같은 반점이 올라온다. 손톱을 따라 가로지르는 특징적인 하얀 선, 미스라인(Mees line)도 나타난다. 체중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모든 증상을 겪고도 환자가 살아남는다면 비소는 다음 단계로 피부나 폐, 간에서 암을 일으킬 것이다.
비소에 노출됨으로써 암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대략 100년 전에 알려졌다. 의사였던 조나단 허친슨(Jonathan Hutchinson, 1828~1913)은 다양한 질환으로 비소가 든 약물을 처방받은 환자들에게서 피부암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비율로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로 비소는 DNA 손상을 복구하는 우리 인체의 능력을 방해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아마도 몇몇 기제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비소에 장기간 노출된 결과는 인도의 갠지스 삼각주 같은 곳들이 매우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을 도우려는 단체들이 그곳에서 비소가 포함된 암석층을 뚫고 우물을 건설했다. 표층수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해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water-borne, 水因性) 질병 확산이 빈번해지자, 이를 막기 위해 우물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우물은 콜레라 감염률을 낮춰 많은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1,000만 명의 사람들이 비소에 노출되는 새로운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 몸은 비소를 배출하는데, 그 속도는 느리다(참고로, 몸 밖으로 배출하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비소를 섭취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다.). 비소는 흙이나 물과 같은 우리 주변 환경에 늘 존재하고, 우리의 먹을거리를 통해서도 침투한다. 하지만 대개 우리 몸이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매우 적은 양이다. 인체에서 삼산화비소의 반감기(절반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는 대략 10시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산화비소는 그대로 오줌에 섞여 배출되거나 대사 작용을 통해 다른 비소 화합물로 변한다. 순차적으로 메틸기(-CH3)가 비소 분자에 더해지는데, 한때는 이것이 비소의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실상은 앞에서 살펴봤던 바와 같이 많은 메틸화비소 화합물이 삼산화비소만큼이나 유독하다. 메틸화된 화합물은 숨을 내쉴 때 마늘 향을 풍기는데, 빅토리아 시대 벽지에서 곰팡이가 만들어낸 트리메틸아르신의 향과 비슷하다. 메틸화비소 화합물의 반감기는 30시간 정도로, 복용한 비소의 절반이 몸 밖으로 나가기까지 하루에서 사흘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소 해독제]
급성 비소 중독의 치료법은 1813년 프랑스 과학학술원(the French Academy of Sciences)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화학자 미셀 베르트랑(Michel Bertrand, 1774~1857)은 비소 5그램(치사량의 약 40배)을 숯과 함께 삼켰다. 비소 중독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하나 없이 그는 무사했고, 이로써 정확한 기제는 모르지만 숯이 비소의 활성을 없앤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실제로 숯에 있는 작은 구멍들에 비소가 갇히면서 체내로 흡수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 다른 연구들도 숯이 많은 독약을 흡수하는 데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지금도 중독이 의심되는 경우 환자들에게 제일 처음 시도하는 처치가 숯을 쓰는 것이다. 증기나 이산화탄소, 산소, 염화아연(zinc chloride), 황산 등으로 고온(섭씨 260도~480도)에서 숯을 처리하면 ‘활성 숯’으로 바꿀 수 있다. 이를 통해 숯의 구멍을 늘려 더 많은 독약을 빨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독약을 복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만 효과를 발휘한다. 일단 비소가 체내로 흡수되면 숯으로는 제거가 불가능하고 다른 방법이 동원되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비소 기반 독약인 루이사이트 가스(Lewisite gas)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킬레이트 화합물(chelate compound)인 발(BAL, British AntiLewisite) 또는 디메르카프롤(dimercaprol)이 있다. 킬레이트는 비소와 같은 금속 이온 주위를 둘러싼 다음 단단하게 결합해 금속 킬레이트 화합물을 형성한다. 일단 BAL이 체내로 투입되면 비소를 먹어 치운 후 비소-킬레이트 형태로 몸 밖으로 배출된다. 그 후 개발된 다른 킬레이트 화합물들은 이보다 효과적으로 비소를 제거하는데, 중금속 독약들에 특히 효과가 있으며 부작용도 덜하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킬레이트 화합물들은 만성 비소 중독에는 전혀 효능이 없다. 이 경우 치료법은 그저 비소에 덜 노출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