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적 우생학’에서 ‘자본주의적 우생학’으로
(우생학(네이버 사전): 유전 법칙을 응용해서 인간 종족의 개선을 연구하는 학문. 유전학의 한 분야로, 1883년 영국의 유전학자 골턴이 제창하였다. 인류의 유전적 소질을 향상시키고 감퇴시키는 사회적 요인을 연구하여 유전적 소질의 개선을 꾀한다.)
오늘날 인간 유전학에 대해, 특히 ‘완벽한 아기(perfect baby)’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나치즘(Nazism)의 끔찍한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그 시절의 우생학이라는 유령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매우 멀기도 한 것 같다. 예비 부모가 자녀의 눈 색깔, 키, 지능, 외모 및 질병 내성을 선택하게 되는 새로운 공상 과학 소설은 이런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선택이 새로운 소비 문화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다. 당신이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지불할 수 있고, 누군가가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활성화된 경제 자유주의는 소비자를 왕 또는 여왕으로 대한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기술 가능성과 함께 ‘완벽한 아기’에 대한 시장의 형성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미래의 주요 중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왕’이라는 논리에 굴복함으로써 법적 및 윤리적 틀이 약해진 상황에서, 도덕적 질문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적절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책이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한편, 많은 도덕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심지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아기’에 대한 꿈은 완벽한 파트너, 집, 직업, 또는 정원에 대해 소비자들이 가지는 욕망과 함께 많은 예비 소비자들의 머리 속에 환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환상은 세계보건기구(WHO)가 현재 전 세계적인 대유행 수준의 우울증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유기체를 구축하는 데 유전학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와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우생학과 유전학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역사와 함께 서로 간에 긴밀하게 연결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생물학적 차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으로 탄생한 유전학은 19세기 프란시스 골턴의 우생학으로 연결되어 생명정치적(biopolitical) 프로젝트 실현이라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20세기 초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면서 유전자의 개념과 그 전달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된 유전학 분야의 탄생이 이제 ‘물질과학’의 자격으로 우생학에 도입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전학의 새로운 권위와 함께, 의생명과학은 점점 더 (다윈의 진화론이 얘기하는) 선천적으로 잘 태어난 자손과 부적합한 자손을 과학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국가라는 관점에서 적합성을 위해 전자의 탄생은 장려되어야 했고(‘긍정적 우생학,’ positive eugenics) 후자는 장려되지 않았다(‘부정적 우생학,’ negative eugenics). 적합성(fitness)과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및 인공 선택(artificial selection)이라는 중심 개념을 가진 다윈의 진화론이 20세기 초에는 국가가 특히 ‘인종(races)’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하게 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다윈의 진화론은 우생학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했다. 인종으로서의 국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부적합한 사람의 수를 최소화해야 했다. 당시에 ‘과학적 우생학’이라고 불렸던 이러한 입장은, 다윈의 비둘기 사육자가 인공 선택이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비둘기를 개선할 수 있었던 것처럼, 확실히 이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멘델의 유전학은 초기 우생학자들에게 단순한 모델을 제공했다. 범죄성, 나약한 마음과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서 그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번식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인구에서 제거될 수 있다는 단일 유전 특성을 가지는 인자들로 간주되었다. 1927년 미국에서 강제 불임 수술(compulsory sterilization)이 합법화된 이후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가 가난한 백인 여성 캐리 벅의 사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We have seen more than once that the public welfare may call upon the best citizens for their lives. It would be strange if it could not call upon those who already sap the strength of the States for these lesser sacrifices, often not felt to be such by those concerned, to prevent our being swamped with incomplete.” 그리고 “Three generations of imbeciles is enough.”
이 시기 미국의 유전학 교과서 중에서, 1916년에 처음 출판된 윌리엄 캐슬의 ‘유전학과 우생학(Genetics and Eugenics)’은 일란성 쌍둥이에 대한 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다음 15년 동안 4번 개정되었고 아이비 리그와 주요 주립 대학의 표준 교과서가 되었으며, 따라서 여러 세대의 의대생들에게 우생학의 정당화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생학에 대한 과학적 정당화의 또 다른 핵심 출처는 콜드 스프링 하버(Cold Spring Harbor) 연구소의 우생학 기록 사무소(Eugenic Record Office)이다. 그곳에서 연구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기질(temperament)에서 다지증(여러 손가락)에 이르기까지 인간 특정 형질의 유전 가능성(heritability of traits)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수만 개의 가계도(genealogies)를 수집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30개가 넘는 주에서 멍청하거나 성적으로 이상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부터 알코올 중독자, 귀머거리 또는 시각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우생학적 불임법(eugenic sterilization laws)이 통과되었고, 1935년까지 45,000건 이상의 우생학적 불임수술이 수행되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캘리포니아에서 이루어졌다. 불임수술 대상자들을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규제되지 않은 권한이 부여되었기에, 담당 의사들은 그들이 돌보는 사람들을 불임화시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나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우생학이라는 학문에 의지하여 담당 의사들이 시민 의무에 대한 의식과 최고의 의생명과학적 관점의 실행이라는 합리화를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노예 제도, 우생학 및 인종 이론 등이 결합되어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특히 여성이 부적합한 존재로 분류되고 불임 수술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혼모가 된 젊은 흑인 여성은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을 폭로하고 강제 종료시키기 위해, 민권 운동과 여성 운동 등이 부상하게 된다.
비록 몇몇 유전학자들이 대표적인 우생학자들로 대표되기는 했지만, 학문의 시작부터 두 학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20세기 초 멘델의 연구를 재발견한 세 사람 중 한 명인 빌헬름 요한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유전의 양상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고 주장했다. 유전형에 존재하는 열성 인자가 항상 표현형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니며, 개체군에서 부정적으로 판단되는 특정 유전자 또는 그 특성을 제거하려면, 비록 이들이 식별될 수 있고 그 특성이 단일 돌연변이의 결과라 할지라도, 수 세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윌리엄 베이트슨은 유전의 복잡성에 대한 요한센의 인식을 공유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그는 그것이 영국인이 아닌 다른 덜 도덕적인 민족의 손에 사용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베이트슨의 민족주의적 도덕적 우월성은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을 공식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앤드류 아이비와 레오 알렉산더의 사례와 비교될 수 있는데, 평등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미국의 의생명과학 연구자들을 자동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윤리적이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미국의 실험적 유전학자이자 실용주의 철학자인 허버트 제닝스는 이런 입장에 반대했는데, 1920년대의 급성장하는 우생학 운동과 원주민주의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에 충격을 받은 그는 반대 운동을 우선시하기 위해 연구를 포기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대공황과 실업의 고통은 당시의 많은 과학자들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었다(예를 들어, 당시에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포함해서 많은 케임브리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Marxism)자가 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수학(또는 통계) 유전학자들이 멘델의 유전과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합하여 현대종합이론(modern synthesis theory)을 탄생시킴으로써 단순한 멘델주의를 대체했을 때, 유전학자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분열은 심화되었다. 히틀러가 우생학에 대해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까지 생각했던 극도로 보수적인 로날드 피셔와 칼 포아송 등은, 당시 다니엘 켈브스가 영미 우생학의 역사에서 ‘긍정적 우생학’과 ‘부정적 우생학’ 모두 포함하는 주류 우생학(mainstream eugenics)를 주장했는데, 그 주류 우생학을 지지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J.B.S. 홀데인과 수학자 란셀롯 호그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줄리안 헉슬리는 표현형 특징이 종종 다유전적(polygenic)이거나 심지어 비유전적(non-genetic)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비록 인간(사회)을 향상시키는 우생학적 프로젝트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인간(사회)의 향상은 사람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통해, 그리고 가족 규모의 자발적인 축소 등을 통해 달성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전학자들 사이의 이와 같은 논의는 대부분의 경우 비과학자들인 지식계급과 정치계급에 의해 무시되었다.
중요하게도, 사회민주주의에서 자유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지식인의 사회적 기억상실증은, 개신교가 지배했던 산업 국가들이 경험했던 우생학에 대한 이 엄청났던 열정을 떠올리지 못하게 한다. 20세기 초에, 카톨릭을 제외하고, 우생학은 인종차별주의자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개혁가, 마르크스주의자 등 대부분의 유럽계 미국인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의사와 생물학자들은 나치가 우생학적 관점의 과학적 실천을 추진하는 것을 보았으며, 나치가 1933년에 집권하여 우생학을 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의사들은 생물학자들이 제공한 우생학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불임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정신분열증 환자의 친척을 불임화하는 것을 옹호하는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칼만과 같은 독일계 유대인 의사들은 나치 정부를 피해 뉴욕 등으로 도피한 후에도 우생학적 열정을 계속했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중에는 미국의 마가렛 생어와 영국의 마리 스톱스 등이 열정적인 우생학자였는데, 생어는 인종차별에 동조했고 스톱스는 계급 지향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극작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조지 버나드 쇼 역시 확고한 우생학 지지자였으며,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이론가인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도 마찬가지였다. 뮈르달에게 우생학은 복지 국가의 민족주의적인 프로젝트에 필수적이었는데, 국가의 개입과 강제적인 불임 수술이 없다면, 새로운 복지 서비스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의 나약하고 타락한 사람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그가 꿈꾸는 사회 시스템의 안정이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인과 나치의 경우, 강제 불임 수술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는데, 우생학의 이상주의적 이론가인 골턴은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조치와 익명에 숨은 집단 폭력의 모호한 사용’이 포함될 것이라고 예견했을까? 우생학에 대한 서구 지식인의 지지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약화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경제학자 존 케인스와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영국 우생학 학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한편, 서방 마르크스주의적 우생학에 대한 지지와 소련의 우생학에 대한 적대감 사이의 대조로 인해서 소련은 예외였다. 스탈린은 다른 소련 시민들 중에서 수십만 명의 쿨락(제정 러시아 시대의 부농, 고리대금업자)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는 우생학을 나치즘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미국 유전학자 헤르만 뮬러가 1930년대에 모스크바의 농업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 연구팀에 초대되었을 때만이 소련에서 우생학과 유전학이 연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인 뮬러에게는, 스웨덴의 뮈르달의 경우처럼, 우생학 정책이 좋은 집단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는 그의 저서 [Out of the Night]에서 여성은 전혀 없는, 그리고 (레닌보다) 위대한 남성만의 복제를 통한 유전적/우생학적 사회를, 그래서 질적으로 우수한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가득한 소련을 상상했다. 불행하게도, 소련은 뮬러와 바비로프를 포함한 그의 소련 유전학자 동료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그리고 바비로프는 부르주아 출신이었는데, 이와 같은 유전학자들의 출신 계급 등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1940년까지 바빌로프는 투옥되었고 유전학은 우생학의 대명사로 간주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의 유전학 분야에서 농학자 리센코가 우위를 점함에 따라 생존 위협을 느낀 소련의 유전학자들은 핵폭탄 낙진의 돌연변이 영향과 관련된 연구를 강조하며 유전학자가 아니라 방사선 생물학자라고 스스로를 칭하게 된다. 소련에서 유전학은 리센코가 몰락할 때까지 학문으로서 회복되지 않았다.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온 헌신적인 우생학자 뮬러는 돌연변이와 방사선의 영향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긍정적 우생학’에 대한 그의 비전은,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에 부유한 사업가인 로버트 그레이엄의 ‘배아 선택을 위한 헤르만 뮬러 저장소(The Hermann Muller repository for germinal choice)’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레이엄의 정자 은행에 대한 초기 계획은 노벨상 수상자와 같은 는 이상적인 정자 제공자의 배우자를 위한 것이었는데, 참고로, 뮬러의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분노했다고 하며, 남성 중심적이며 우생학적인 그레이엄의 정자 은행은 지속되지 못하고 약 230명의 자녀가 태어난 후 정자 은행은 폐쇄되고 기록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생학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을까?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우생학이라는 단어가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정책 내지는 관행으로서의 우생학은 나치와 함께 시작되지도 죽지도 않았다. 특히 나치의 패망 이후 약 30여년 동안 존재했던 유럽 복지 국가의 우생학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생각한다면(20세기에 유럽 복지 국가의 우생학 정책은 생물학적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의 번식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번식을 장려하여 ‘정상’ 가족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우생학’을 생각한다면, ‘전체주의적 우생학’이 공적 이익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적 우생학’은 개인 선택을 과대 평가하고 공공 복지를 과소 평가한다는 서로 다른 측면이 있긴 하지만, 우생학에 대한 환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생학의 입지는 얼마나 변했을까?
1945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우생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과학 분야에서 서서히 줄어들고, 대신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우생학 기록 사무소는 1940년에 폐쇄되었는데, 이곳에서 이루어진 우생학 연구는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없었고, 이곳에 보관된 기록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콜드 스피링 하버는 이후, 1953년에 이중 나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제임스 왓슨이 1968년에 소장으로 취임하는 등 분자 생물학 연구소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된다. 또다른 예로, 영국에서는 1945년 의학 유전학자 라이오넬 펜로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의 갈턴 우생학 연구소(Galton Eugenics Laboratory)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갈턴 우생학 연구소는 유전학과(Department of Genetics)로 개명되었다.
펜로즈에 있어서 어린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정신적 결함’의 병인에 대한 자신의 연구는 위와 같이이름을 변경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정신적 결함’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조건의 다양성과 표현형의 명확성을 식별하는 문제에 주목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우생학적 관점에서 환경과 유전자가 담당하는 각각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었는데, 그 인과 관계를 확립하는 데 따르는 엄청난 어려움은, 우생학 쪽으로 기울어 있던 그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 인과 관계가 유전적 요인만으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다운증후군(Down syndrome)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신적 결함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결함에 대해서, ‘덜 진화된 형태의 몽고인’으로의 유전적 ‘회귀’가 아니라 유전적인 요인과 함께 발달상의 문제임을 보여줌으로써 다운 증후군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몽고인’이라는 낙인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학을 제공했다.
참고로, ‘몽고인’이라는 용어는 200년 전 독일 의사 요한 블루멘바흐가 피부색에 따라 인간을 다섯 가지 인종으로 나눈 인종 분류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코카서스의 그루지야 민족의 하얀 피부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면서 ‘가장 높은 유형의 인간’이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블루멘바흐의 다른 네 가지 계층적 인종 범주는 인종 차별적이고 유전적으로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백인’이라는 용어는 유럽 출신의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미국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미국의 국립인간유전연구소(National Human Genetic Research Institute)의 인종, 민족 및 유전학 작업 그룹에서 발행한 지침은 분류 시 주의와 정확성의 필요성을 올바르게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의학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분류인 ‘백인’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펜로즈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우생학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열정은 서서히 시들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미국 국립의학연구소(National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의 소장인 피터 메다워는 1958년에 BBC 강연에서 영국의 복지 정책이 자연선택을 방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영국인의 역량이 악화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오래된 우생학적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지 못 했다. 그는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학습 장애인을 감금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우생학 정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관행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1960년대에 리차드 티트머스와 그의 경제학자 동료인 브라이언 아벨-스미스는 모리셔스 정부에, 명백히 우생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동 수당 정책을 제안했다. 그들은, 모리셔스의 빈곤층 대가족이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정해진 자녀 수를 초과하지 않는 가족에게만 아동 수당을 지급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로 인해 모리셔스의 가난한 대가족은 더 심각한 빈곤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젊은이의 이마에는 겸상적혈구 유전자(sickle cell gene) 또는 기타 유사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문신으로 새겨야” 한다고 얘기한, 반전 및 대체 건강 운동의 영웅이었던 노벨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도 빼놓을 수 없다. 폴링과 메다워만이 우생학에 열광한 생물학자들은 아니었다. 1970년 현대 생물학의 사회적 영향에 관한 한 회의에서 체외수정(in vitro fertilization, IVF)의 전망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사회주의 면역학자인 존 험프리는 장애가 있는 신생아에 대한 영아 살해(infanticide)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없애는 것’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리고 MIT의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20세기 후반의 대부분 동안 생물학자들은 새로운 복지 국가의 사회적 조항이 너무 많은 ‘부적합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국가 자원의 질을 손상시키고 경제적 사회적 부담을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밀레니엄 전환기에 일부 생물학자들, 특히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는 현대 의학 기술이 ‘부적합’한 자의 생존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윈 진화론의 중심이 되는 자연 선택의 효과를 막고 있다, 즉 진화가 중단되었다는 걱정을 한 바 있다.
한편, 뉘른베르크 강령을 생명의학 윤리의 실질적인 도덕적 분수령으로 보는 관점은 단순히 순진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윤리적 보고서의 작성이나 관련된 고상한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동의 후의 치료의 실현은 느렸지만, 유럽의 의학 전문가들에게 뉘른베르크 강령이 참으로 윤리적인 분수령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전문 분야보다도 임상 유전학자들은 독일의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전쟁동안 관여했던 생의학 분류, 강제 불임, 그리고 ‘부적합한’ 사람들에 대한 처리 등에 대한 끔찍한 폭로에 직면해야 했다. 우생학과 관련된 비판에 직면한 임상 유전학은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시작은 이름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환자의 동의 후의 치료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행을 개발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고, 상담, 환자와 시간 보내기, 환자가 위험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임상 실습의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유전 클리닉(genetic clinic)에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비지시적 상담(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내담자중심 상담, 인간중심 상담, 현상학적 접근 기반 상담, 자아이론 접근 기반 상담, non-directive counselling)의 특성은 임산부 클리닉(antenatal clinic)의 상황과 너무나 자주 대조된다. 전자의 경우 유전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원하는 여성과 그 파트너는 세심하게 진단과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임산부는 생활 습관에 대한 의학적 지침 준수를 요구받고, 분자 유전학의 발전으로 모두 아기의 유익을 위해 선별 검사가 확산됨에 따라 혈액 및 소변 샘플 채취와 양수검사(amniocentesis) 및 태아 스캔을 받기는 하지만, 적절한 상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다운 증후군,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및 신경관 결손(neural tube defect)과 같은 세 가지를 진단하기 위한 선별 검사가,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어린이의 수가 줄어들고 부모의 부담을 완화할 것이며 공공 지출의 상당한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주장에 기반하여, 많은 나라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유전적 위험을 감지하는 점점 더 많은 검사가 임산부 관리에서 일상화됨에 따라, 적절한 상담이 제공되지 않는 한, 임산부는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있는 것처럼 무력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발언권이 없는 것처럼 느낄 위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산부들에게 안도감을 준다고 주장하는 임산부 검사도 임산부들에게 확실한 안도감을 제공하지 않으며, 검사라는 바로 그 행위가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태아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적절한 사회적 지원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은 임산부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보다 임산부에게 더 해로울 수 있다. 즉, 여성들에게 임신은 더 이상 단순한 임신이 아니며, 여성과 태아가 유전자 검사를 통과할 때까지 잠정적 상태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임산부들은 우생학적 고뇌로 가득한 지뢰밭에서 길을 찾는 도덕적 개척자라고 말할 수 있다.
DNA 등에 기반한 진단법이 발달하게 되면, 그에 대한 임상적 맥락도 변한다. 이것은 유럽에서 25명 중 1명의 비율로 태어나는 가장 흔한 돌연변이 중 하나인 낭포성 섬유증의 경우 명확하다. 1950년대에 낭포성 섬유증로 태어난 대부분의 아기들은 생후 1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그 짧은 기간동안에도 상당한 호흡 곤란이 수반되었다. 유전자 사냥(gene-hunting) 전성기의 희망은 낭포성 섬유증 유전자를 식별할 수 있으면 유전자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유전자는 1989년에 확인되었지만 한동안 유전자 치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그 희망을 노래하는 과대 광고가 줄어들게 된다(참고로, 낭포성 섬유증 환자 중에서 낭포성 섬유증 막 관통 조절(cyst ic fibrosis transmembrane conductance regulator, CFTR) 유전자에 1개 이상의 F508del 변이가 있는 12세 이상의 환자에 대한 유전자 치료제 트리카프타가 2019년에 미국 FDA의 승인을 받는 등 다시금 유전자 치료제에 대한 희망이 커진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런데 유전병에 대한 유전자 치료제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DNA 검사 등을 통해 유전병 보유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여성이 임신을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오늘날의 임산부들은 (선택권이라는 이름 하에) 우생학적 고뇌로 가득한 지뢰밭에서 길을 찾는 도덕적 개척자가 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늘날 임상 유전학은 중대한 모순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의료 서비스는 도덕적 및 경제적 관점에서 그 사회경제적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이는 특히 임산부 클리닉에서 임산부에 대한 임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우생학적 관점에 대한 비용-이익 계산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임상 유전학의 한 측면은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다른 측면은 국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경우 가치 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의사, 환자 및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가족이 공유할 것이라고 가정을 함으로써 그 입장의 모순이 해결되길 희망한다. 낙태를 거부할 소수의 여성의 유보를 허용함으로써, 임상 유전학은 개인의 자율성,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동의,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는 국가의 우생학적 바람이 사회적, 문화적 합의로 함께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상황을 유토피아적 우생학의 한 형태로 옹호하는 주장도 있다. 비록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이와 같은 호소가 매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품질 상담 서비스의 적절한 제공에 달려 있다. 유토피아적 우생학은 일부에게는 가능할 수 있지만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전자 검사를 제공함으로써 임상 유전학의 우생학적 모순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 책임을 부모가 될 사람에게, 무엇보다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이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내의 유전학은 자본주의적 우생학을 구성하는 데 효과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장애인들은 유전자 검사의 확산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본질적으로 우생학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학습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립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고 선별검사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사회라면, 이러한 도전은 그와 같은 사회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다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의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자동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여성의 출산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부모의 바람과 나란히 놓이게 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아동의 권리이며, 이것은 새로운 도덕적 영역이다. 의학적으로 정의된 낡은 ‘정상성’이, 의심의 여지 없이 단순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한 윤리적 논리 내지는 지침이 민주적으로 개발되고 주장되어야 한다.
왓슨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우생학적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음, 멍청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발언은 일반적으로 매우 공격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학습 장애가 있는 정치 활동가들에 관한 한, 왓슨의 발언과 임산부 클리닉에 다니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제공되는 양수검사와 융모막 검사 사이에 무엇이 그렇게 매우 다를까? 둘 다 가족과 사회 전반에 걸쳐 학습 장애인의 존재가 문제가 된다는 지배적인 문화적 가정의 표현일 뿐이다. 강제적인 ‘전체주의적 우생학’은 후퇴했지만, 신자유주의 문화, 경제, 사회 내에는 여전히 우생학적인 관점에 따른 압력이 팽배한 것이다.
체외수정의 경우에는 어떤가? 인간 배아 검사(human embryo screening)는 체외수정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처음에 이것은 배아를 현미경을 통해 눈으로 보고 건강한 정상 난자에 대한 생물학자의 암묵적인 이해를 충족시키는 배아를 결정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데, 착상 전 유전자 진단(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 PGD)은 배아에 대한 생체조직 검사를 통한 유전자 스크리닝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은 우생학에 대한 우려로 인해 유럽, 특히 독일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은 예비 부모가 중증 장애 자녀를 가질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된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장애를 구성하는 유전자에 대한 결정이다.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은 잠재적으로 많은 단일 유전자 장애에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중 많은 유전적 장애가 완치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관리될 수 있는데, 스타틴(statin)과 생활 방식 관리 등을 통해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familial hypercholesterolaemia)과 같은 유전성 지질혈증의 질병률(morbidity)과 사망률이 상당히 감소되었다는 예를 들 수 있다. 상대적으로 관리하기 쉬운 유전성 질환도 고려한다면, 그리고 앞으로의 생명의학의 희망적인 발전을 고려한다면, 착상 전 유전자 진단 결과를 통보받은 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그리고 착상 전 유전자 진단과 함께 ‘디자이너 베이비(designer baby)’와 ‘구세주 아기(savior siblings)’와 같은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디자이너 베이비의 경우, 그 선택은 심각하게 장애를 일으키는 유전적 조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이나 머리카락과 눈 색깔(아름다움이나 지능도 포함하여 언급되고 있지만, 아직은 아름다움이나 지능을 결정하는 유전자 또는 유전자 집합이 검증된 바 없다.) 등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특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세주 아기는 심각한 유전적 장애를 앓고 있는 나이든 형제자매에게 거부반응이 없는 조직을제공하기 위해 착상 전 유전자 진단 후 배아 선택에 따라 태어난 어린이를 뜻한다. 유네스코 등에서의 생명윤리적 논쟁을 통해, 그러한 가능한 기술 발전을 예상했으며, 유전적으로 선택된 아동을 단순한 도구로 만들고 또한 윤리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으로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명윤리학의 반발은 언론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구체적인 비극 앞에서 눈처럼 녹는 경우가 많다.
2000년 헤드라인을 장식한 미국의 내쉬 가족의 이야기가 그 예 중 하나이다. 내쉬 부부와 그들의 두 자녀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유전자 검사/우생학적 우려에 대한 축소판 역할을 했다. 치명적인 유전 질환인 판코니 빈혈(Fanconi’s anaemia)을 앓고 있는 6세 소녀 몰리 내쉬에게 가장 좋은 삶의 기회는 형제자매로부터 제대혈(umbilical cord blood)을 수혈받는 것이었다.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을 통해 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유전적 상태에서 자유롭고 몰리에게 생명을 구하는 자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내쉬의 두 번째 아기인 아담은 선택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강제 기증자로 아이를 세상에 데려올 수 있다는 공포감은 이것이 기존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과 경쟁하게 되었는데, 내쉬 부부는 그들이 한 명 이상의 자녀를 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는 어쨌든 사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여러 언론 매체들과 인터뷰했고, 그로 인해 도덕적으로 논란이 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정상화하고 개인화했다. 부유한 내쉬는 장기 매매로 대표되는 인간의 상품화와 ‘자본주의적 우생학’에 문을 연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생명 공학적으로 진보한 우리 시대에 가능하게 된 부모의 사랑의 표현인 것인가?
내쉬 사례는 영국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졌다. 하쉬미 부부는 아들이 주요 혈액 장애인 베타-지중해성 빈혈증(beta-thalassaemia)을 앓고 있었고, 내쉬 사건에서와 같이 제대혈을 사용할 수 있는 거부 반응이 없는 배아를 선택하기 위해 착상 전 유전자 진단 사용 허가를 영국 정부로부터 승인받을 목적으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했다. 하쉬미 부부의 캠패인에 서명한 사람들은, 내쉬의 경우처럼, 하쉬미 부부가 두 자녀를 동등하게 사랑하고, 큰 자녀는 구원받을 것이며, 어린 자녀는 부자연스러운 선택임에도 만족할 것이며, 실제로 이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윤리적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크리스퍼 기술 등의 발전으로 중국의 허젠쿠이에 의해 탄생한 유전자 편집 아기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인구 통제 정책은 우생학에 대한 완곡어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맬서스 이후로 소위’Standing Room Only’는 인구 증가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주요 표현 중 하나인데, 인구 통제 정책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부유한 서구는 가난하고 인구가 많은 국가의 인구를 줄임으로써 지구를 구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생학자 중 가장 근본주의자에 따르면 그 해결책은 맬서스의 그것과 같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의 과학 기술 자문위원회 위원장였던 환경 과학자 존 홀드렌도 포함되는데, 이들은 “인구 통제 조치가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시작되지 않으면 인간이 가능한 모든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다가올 불행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따라, 가난하고 인구가 많은 국가들은 곧 환경주의자들의 맬서스적 의제를 인종 차별적 우생학의 한 형태로 인식하게 되었다.
인도와 혁명 이후의 중국은 방대한 인구를 먹여 살리는 문제와 가족 수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을 오랫동안 의식해 왔다. 인도에서는 피임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가족 규모가 점차 감소하여 인구 증가를 늦추었지만 인디라 간디 대통령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끔찍한 정치적 오판으로 1975년 그녀는 아들 산제이에게 800만 농민에 대한 강제 불임 정책을 시행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 결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정책은 1980년 산제이가 암살된 후에야 종료되었다. 그러나 여성 태아를 낙태하도록 여성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가부장적인 인도 가족의 우생학 관행으로 인해, 정상적인 성비에서는 여아 100명당 남아 약 105명이지만, 2010년까지 인도에서는 남아 1,000명당 0세에서 6세 사이의 여아가 914명으로, 인도는 세계에서 성비가 가장 불균형한 나라 중 하나이다(참고로, 유엔인구기금은 세계인구보고서를 통해 2023년 중반 인도 인구는 14억2천860명으로, 중국의 14억2천570만명보다 약 300만명 더 많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인도와는 달리. 중국은 1978년부터 인구 증가 관리를 위해 ‘전체주의적 우생학’ 정책을 체계적으로 채택했는데,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한 기근, 그리고 한 자녀 가족 정책 등의 이유로 가족 규모가 줄었고 또 인구 증가를 늦추었지만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성별 불균형을 초래했다.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여성에게 아들을 낳도록 꾸준한 압력이 있었고, 불법 DNA 검사는 태아 성별 진단과 여성 태아 낙태를 제공했고, 여아 영아 살해, 국내 및 국제 입양을 위해 여아 포기가 증가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은 성평등에 대한 표면적인 공약에도 불구하고 약 2천만 명의 중국 여성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했다고 한다.
의학적으로 치료와 성형을 포함하는 개선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까? 유전적 개선과 다른 형태 사이의 원칙적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성형 수술 산업이 확장되면서 신체 개선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치료적 또는 유전적 개선에 대해 어떻게 현명하게 논의할 수 있을까? 코성형, 유방확대, 지방흡입술, 얼굴 주름 성형술, 보톡스 등은 많은 여성들에게 일상화되었으며 남성에게도 점점 더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몸매를 찾는 사람들은 의사의 메스가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적절한 턱선이나 바람직한 가슴 크기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등장하고, 세계화는 미용 관광객에게 저렴한 가격을 제공한다.
사전적으로, 치료는 일부 손상된 신체 기능의 회복을 의미하고, 개선은 이미 정상적인, 잘 기능하는 신체에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이다. 생명의학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오늘날의 ‘매우 과학적인 (자본주의) 문화’에서 누가 정상적인 신체로 간주되는지 정의하는 것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키가 작은 것이 질병이 아님에도 성장 호르몬은 키가 작은 아이들에게 처방되고 있다. 유사하게 다운 증후군이 있는 어린이의 일부 부모는 외관에 대한 사회적 거부로부터 자신들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성형외과 의사에게 눈꺼풀 수술 등을 의뢰한다.
물론 위와 같은 신체 개선은 개선된 사람이 잘 태어났거나 심지어 잘 태어난 것보다 더 나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생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유전체학(genomics)은 1930년대에 뮬러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한 생식 세포 치료와 인공 선택에 의한 개선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제기하게 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을 때인 1969년에 분자 생물학자 로버트 신샤이머는 “새로운 우생학은 유전의 생화학적 이해와 진화에 대한 이해의 극적인 증가를 기반으로 발생했습니다. 이전 우생학은 적합한 사람을 번식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선택과 부적합한 사람을 도태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새로운 우생학은 원칙적으로 모든 부적합한 사람을 가장 높은 유전적 수준으로 전환하는 것을 허용할 것입니다. 이전 우생학에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유전자 풀의 수치적 향상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새로운 우생학에서는 그것이 원칙적으로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유전자와 새로운 특성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개념은 생명의 전체 진화에서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명체는 자신의 기원을 이해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대 신화에서조차도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의해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초월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기회와 함께, 엄청난 선택과 책임이라는 기회의 어두운 동반자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거의 30년 후인 1997년에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리 실버는 신샤이머의 우생학적 유토피아를 거부한다. 부적합한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오래된 우생학적 우려 내지는 불안에 대한 실버의 비전은 디스토피아적이다. 그는 “생명공학을 통해 태아를 유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되었고, 이에 따라 생명공학은 신샤이머의 환상 세계가 아니라, 규제가 약하고 과도하게 자본주의화된 미국 경제 등에 위치할 것이며, 적절한 공공 정책이 없다면 분자 유전학이 현재의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버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 자녀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을 위해 우생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며, 최고의 사립 보육원 및 학교, 코칭, 성취 획득, 엘리트 대학; 자손을 위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유전자 요법으로 보완되거나 대체될 것이다. 유전자 요법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자 선택인 것이다. 실버는 “새로운 기술은 이와 같은 사회적 과정을 강화하고 가속화할 것이며 그 결과 개체군은 결국 별도의 종으로 분리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인간 복제는 핵심 기술이었다. 참고로, 실버의 책이 출판된 해인 1997년에 할리우드 영화 가타카(Gattaca)가 개봉되었다.
실버는 부자들이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과 함께, 잘 기능하는 그들의 신체와 함께 제공되는 생물학적 능력이 갖는 그들의 이점을 인식했고, 윤리적 및 정치적으로 계급 불평등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실버의 관심은 영국의 생명윤리학자 존 해리스와는 공유되지 않는다. 해리스는 아이의 시험 성적이나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물이나 유전자 요법을 사용하는 것과 오늘날의 부유한 아이들에게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 지도를 시키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윤리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둘 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 시도이며 따라서 둘 다 개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 있는 유전적 개선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다’라는 마태복음의 원칙에 ‘긍정적 우생학’의 새로운 변종을 추가했던 것이다. 해리스의 입장은 소유욕이 강한 개인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막대한 부와 영향력의 특권에 그는 부모가 선택할 수 있고 생명공학이 제공할 수 있는 잠재적 개선을 추가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와 규제 조치가 있더라도 유전적 개선을 위한 그와 같은 시도는 불가피하며, 약하게 규제된 환경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다.
철학자 앨런 뷰캐넌은 이러한 급진적 개선의 전망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분배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개선의 혜택이 단지 부유한 사람들만의 특권이 되지 않고 보다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면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자 협의회의 손에 낙수 경제 모델에 따라 부유한 개인과 사회를 넘어 향상된 기술의 확산을 보장하는 ‘혁신의 글로벌 정의를 위한 글로벌 연구소(Global Institute for Justice in Innovation)’를 제안했다. 그러나, 긍정주의적 관점이 필요하긴 하지만, 오늘날의 미국이든 내일의 중국이든 글로벌 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플라톤의 이상적인 거버넌스 형태가 가능할까?
그런데, 그러한 과학기술 긍정주의적 상상이 가장 만연하게 꽃을 피운 곳은 생명과학 밖에서였다. 트랜스휴머니스트(또는 미래과학의존자, transhumanist) 기관과 연구 프로그램들이 엄청나게 성장하게 되는데, 옥스퍼드에서 ‘급격한 개선’을 옹호하는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이끄는 미래 인류 연구소(Future of Humanity Institute)는 21세기를 위한 ‘긍정적 우생학’을 꿈꾸는 익명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박애주의자’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두고 온라인 결제 시스템 페이팔의 전 CEO의 자금을 지원받은 SENS(Strategies for Engineered Negligible Senescence)도 있는데, 불멸을 원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머리를 완전히 얼려두었다가 나중에 되살리기 위한 기술(소위 냉동 보존술)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지만, SENS의 비전은 냉동이 아니라 유전공학 기술에 기반한 장수(심지어 불멸)이다.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미국의 기업가이자 IT 혁신가인 레이 쿠르츠웨일일 것이다. 그는 정보학 및 생명의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의 진화가 거침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고 다음 반세기 내에 그가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래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결합된 힘이 정점에 모이고 변형된 포스트 휴먼 바이오사이버네틱 종이 등장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쿠르츠웨일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자질이 완벽을 향해 진보하는 경향이 있다’는 다윈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윈의 목적론적 언급이 일시적인 이론적 실수였지만, 쿠르츠웨일은 (실수 여부와는 상관없이) 진화론적 완전성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진행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트랜스휴머니스트적인 관점에는,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에 기반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생각과 소비자는 왕 또는 여왕이라는 생각이 깊숙이 박혀 있다. 그리고 이들의 상상은 골턴이 제안했던 것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