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트루드 B. 엘리언
Gertrude B. Elion
화학자, 약리학자
거트루드 엘리언의 어느 팬 레터:
“1984년, 다섯 살짜리 우리 딸은 급성 림프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여러 약물 중에서 6-메르캅토푸린6-mercaptopurine이 포함된 화학요법 치료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때 우리 가족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병에 차도가 생겨 5년 동안 재발이 없었으며, 지난 2년 3개월 24일 동안 약물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아이는 5월에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이해 부모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줄 것입니다. 스포츠계 거물과 연예계 인사들에 대한 과장된 찬사로 가득 찬 언론 매체를 접하니,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이 사회에 그렇게 많이 기여했는데 제대로 인정도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진정한 영웅입니다!”
이 편지는 우리가 1986년 노스캐롤라이나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의 글락소웰컴에 있는 거트루드 엘리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글 중 하나였다.
약혼자의 죽음을 지켜본 엘리언은 치료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어린 학생일 때 이미 암 치료법을 찾아내는 화학자가 되고 싶어 했었다. 그런 포부를 갖게 된 데에는 마음 아픈 계기가 있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 이후, 아픈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은 그녀의 약혼자가 죽었을 때 더욱 강렬해졌다. 약혼자는 페니실린으로 치료될 수 있는 병에 걸렸으나 그때만 해도 치료가 불가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능해지기는 했다. 엘리언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 목표를 눈부시게 이룩해냈다. 그것은 그녀가 1988년 생리의학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으며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물 치료에 새로운 원리를 수립한 제임스 블랙James W. Black과 조지 히칭스George H. Hitchings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녀의 성공 가도는 수월하지 않았다. 엘리언은 뉴욕시 소재 여자대학인 헌터 대학교를 다녔다. 그곳은 경제 여건과는 상관없이 성적이 우수한 젊은 여성들의 입학을 허가했다. 그녀는 수석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5개의 대학원에 지원했지만 어느 곳도 그녀에게 장학금을 주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며 여자라서 탐탁잖게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그녀는 뉴욕 대학교에 등록했고, 연구는 밤과 주말에 했다. 194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그녀의 경력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면접 볼 때, 심사위원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음, 당신은 석사학위만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가 당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라고…. 나는 그런 말을 왜 들어야 하는지 아주 의아했어요. 그들은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혹은 내가 그 일에 적합한지 그런 것도 몰랐습니다. 내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그들에게 묻지도 않았고요. 나는 그런 질문을 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다니까요. 승진,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나는 중요한 것을 하려고 했죠. 정말로 암을 치료하고 싶었습니다.”
“1944년, 첫 인터뷰 때 히칭스가 핵산 유도체들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푸린purine이나 피리미딘pyrimidine이 뭔지 정말 몰랐어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에 매우 흥미가 당기더라고요. 그는 핵산의 생화학에 관심이 있었죠. … 히칭스는 특정 화합물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화학 석사학위가 있었고, 좋은 성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독일어를 읽을 수 있었기 에 독일어로 된 문헌들을 죽 훑어보았죠. 상당수의 책이 에밀 피셔Emil Fischer의 연구들이더군요. 집에서 이디시어Yiddish(독일어 히브리어 등의 혼성 언어 – 옮긴이)를 배웠고, 대학 시절 독일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화학자들은 독일어를 알아야 했어요.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전쟁 중이라 갑자기 여자들이 화학 분야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죠. 나는 히칭스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언은 연구에서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맡으며 일했다.
히칭스의 아이디어는 박테리아, 기생충 및 종양세포 DNA의 특정 기본 요소들을 대체하여 이것들의 생존을 막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본 요소들과 비슷한 분자를 찾고 있었다. 이것은 약물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접근법과 다를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이 그 당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던 DNA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혁신적인 접근법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푸린 유도체를 준비하는 작업을 엘리언에게 맡겼다. 푸린은 단순한 유기 분자인데, DNA의 네 개 염기 중 두 개는 푸린 유도체(다른 두 개는 피리미딘 유도체)다. 푸린 그 자체는 5환 고리와 융합된 6환 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환자들에게 투여하여 박테리아, 기생충 또는 종양 세포를 속일 수 있도록 이 분자의 다양한 유도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엘리언은 일을 할 때 히칭스처럼 열정적이었다. 유기합성 작업을 셀 수 없을 만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분야를 습득해서 새로운 물질의 생물학적 활성을 테스트했다.
힘든 일이 결실을 낳았다. 30여 년 동안 공동 작업을 하면서, 두 사람은 많은 약을 개발했는데, 모두 푸린 유도체였다. 잘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 티오구아닌 Thioguanine: 소아 백혈병 치료제
● 푸리네톨 Purinethol(메르캅토푸린 mercaptopurine):
백혈병, 비非호지킨 림프종 및 기타 질병 치료제
● 질로프림 Zyloprim(알로푸리놀 Allopurinol):
통풍 치료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약
● 이무란 Imuran(아자티오프린 Azathioprine):
장기이식 때 이식 기관의 거부를 막는 면역 억제제
● 조비락스 Zovirax(아시클로비르 Acyclovir):
항바이러스제(예: 헤르페스 이러스 herpes virus 감염 치료에 사용)
완전히 새로운 약이 시판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여기서는 전체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목록만 제시했다. 그러나 엘리언, 그리고 그녀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으로 받은 동료들은 특정 약품의 발견이 아니라 약품 연구를 위해 수립한 원리를 인정받아서 상을 받았다. 노벨상에 언급된 그 원리는 ‘합리적인 약품 설계’라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원래 히칭스의 초기 DNA 연구에서 나왔다.
이런 성공에도, 엘리언은 자기가 박사학위가 없다는 점을 늘 아쉬워했다. 그녀는 박사학위가 없는 몇몇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현역 시절 한때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브루클린 폴리테크연구소에 등록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근직만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은 그녀가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일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공한 이후, 그녀는 몇 군데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브루클린 폴리테크연구소였다.
엘리언은 생애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1996년에 남편과 나는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에 위치한 그녀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무실 벽에는 사진이 많이 걸려 있었다. 모두 그녀의 동료 및 업무와 관련된 사진이었다. 그중 영국 풍자만화가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가 그린 〈통풍The Gout〉 사본이 액자로 표구되어 있었다.
통풍은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불쾌한 질환인데, 대개 엄지발가락에서 발생한다. 혈액 안에 요산이 너무 많아 요산 결정체가 형성되고 이것이 관절에 축적되어 발생하며 염증을 유발한다. 요산은 푸린 대사 과정의 부산물인데, 푸린의 화학적 특성을 규명하는 것은 엘리언의 핵심 연구였다. 그녀와 동료들이 통풍 치료제를 발견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이 약 덕분에 회사는 수익이 많이 생겼는데, 예기치 않은 성공이었다. 그들의 노력이 수익 창출을 바라고 지시를 받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질병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구한 진정한 영웅
엘리언은 81세를 일기로 1999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성 질환, 즉 심장 감염으로 사망한 약혼자를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하려던 계획이 아주 많았다. 엘리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가치 있는 연구는 정말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답니다. 내가 어딘가에서 강의를 했는데 누군가 내게 와서 ‘당신 덕분에 신장 이식을 했고 25년이 지났습니다’라고 했을 때 내가 어떻게 느꼈을지 상상해보세요. 나는 ‘감사’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이들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그런 편지들이야말로 아픈 사람들을 건강하게 한 것에 대한 진정한 보상이 아닐까요.”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