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병원이 “죽음의 집”이던 시절, 이그나스 제멜바이스는 기초 위생이 생명을 구하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멜바이스는 병균이 알려지기 전 시대에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픈 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최선책은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19세기 이야기다. 이때는 병원이 감염의 온상이었고, 오직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근원적인 치료만 제공하는 곳이었다.
당시엔 집에서 치료받는 게 훨씬 안전했다. 병원의 사망률은 집보다 서너 배씩 높았다.
죽음의 집
소변과 토사물, 여러 체액으로 가득한 병원.
당시 병원은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근무자들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였단다.
그때는 의사들은 손이나 수술 도구를 잘 씻지 않았다. 수술실 역시 그 안에서 일하는 외과의사만큼이나 더러웠다.
병원이 “죽음의 집”이라고 불린 이유다.
1975년 미국 토마스 이킨스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 위생적인 수술 환경을 도입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세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과학을 활용하려 했다.
헝가리 출신의 의사, 이그나스 제멜바이스였다.
그는 1840년대 비엔나에 있는 산부인과 병동에서 손 씻기로 사망률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가치있는 일이었지만 동료들은 그를 악마로 취급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산모들의 구세주”로 남게 됐다.
세균에 무지한 시대
제멜바이스가 일하던 비엔나 종합병원은 다른 병원들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병실을 떠돌던 곳이었다.
세균이 위험하다는 건 19세기 후반에야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병원의 위생 상태가 감염 확산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당시 의사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은 ‘죽음의 집’이었다
뉴욕 대학의 의학 역사학자인 바론 H. 레너는 BBC에 “오늘날에는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세상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는 ‘독기’라는 부식성 물질 입자가 공기 중의 유독한 증기를 타고 질병이 퍼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불균형
출산 과정에서 질이 파열된 산모들이 특히 감염 위험이 컸다. 상처가 나면 환부는 의사들이 옮겨온 박테리아에겐 이상적인 서식처가 됐다.
처음에 제멜바이스는 비엔나 종합 병원 내 분만 클리닉 두 곳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시설은 똑같지만, 굉장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 곳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돌보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산파들이 돌보는 곳이었다.
1889년 토마스 이킨스의 ‘아그뉴 클리닉’. ‘그로스 클리닉’과 다르게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수술을 한다
의대생들이 관리하는 곳에서는 1847년 기준, 산모 1000명당 98.4명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산파들이 돌보는 곳의 사망률은 1000명당 36.2명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러한 차이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기적절한 사망?
이러한 거친 처지 때문에 산부인과 내 산모 사망 원인 대다수를 차지했던 산욕열(분만으로 인해 생식 기관에 생긴 상처에 세균이 침입 및 감염을 해 고열을 내는 질환)에 더 취약해지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었던 것.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이러한 정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해 제멜바이스의 동료 한 명이 해부 실험을 하다 손이 잘려 사망했다. 이 사건이 그에게 단서를 제공했다.
이것이 당시 볼 수 없었던 죽음의 원인 ‘화농연쇄상구균’이었다
그때만 해도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특히 해부용 칼이 피부에 내는 상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위험했다. 가장 노련한 해부학자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찰스 다윈의 삼촌도 아이의 시신을 부검하다 상처가 생겨서,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에서 동료의 사망을 본 뒤 제멜바이스는 그게 산욕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굴렸다. “해부실에 있던 의사들이 ‘사체에서 나오는 입자’를 분만실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있을까?”
1840년 자크 피에르 메이그리의 ‘누벨 데모’에서 보여주듯 의사들은 출산 과정에서 손을 사용했지만, 이것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해부실에 있다가 산모를 돌보기 위해 곧바로 분만실로 향한 많은 의대생들을 관찰했다.
당시에는 해부할 때 아무도 장갑이나 보호장비를 사용하지 않았다. 해부 수업을 마친 의대생들이 옷에 살점과 피 묻은 휴지를 묻힌 채 병동을 드나드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병원을 찢어 놓다
반면 산파는 출산 전 해부를 하지 않았다.
이것이 미스터리의 열쇠가 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세균 문제에 대한 이해가 있기도 전에, 병원 안의 불결함에 대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제임스 Y. 심슨은 정기적으로 병원을 헐고 새롭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제임스 Y. 심슨(1811-1870)은 인간에게 클로로포름의 마취성분을 도입한 최초의 의사다. 그는 교차 감염이 통제될 수 없다면, 병원을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가장 유명한 외과의사 중 한 명이자 ‘수술 기법의 과학(Science and Art of Surgery, 1853)’의 저자인 인 존 에릭 에릭센은 “병원이 한번 치유 불가능한 혈액 오염된다면(혈액에 의해 감염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소독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치 개미들이 차지해서 허물어진 벽이나 구더기 나오는 치즈 소독하기와 같다”라고 썼다.
제멜바이스는 이처럼 극단적인 조치까지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산욕열은 시체의 ‘감염 물질’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 후, 그는 병원에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을 가득 담은 대야를 설치했다.
제멜바이스는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에서 손씻기를 제안했다
해부실에서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기 전에 소독액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8년 의대생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1000건당 12.7건으로 급감했다.
보상없는 승리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이 해부용 시신 접촉에 따른 감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레너는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한 게 아님에도, 제멜바이스가 항상 의대생이 산모를 죽여왔다고 말한 것처럼 됐다”며 “그래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사실 소독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산부인과에만 일반화됐다.
때로는 자기주장을 개진하다가 부정적인 결과만 얻는 경우도 많다.
제멜바이스 역시 이 주제를 담아 출판한 책도 몇 차례 부정적인 비평을 받았다. 그러자 제멜바이스는 비판자들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논란이 일자 비엔나 병원은 제멜바이스의 고용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에 있는 작은 스젠트 로쿠스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무보수로 명예의사 일을 맡아야 했다.
그 병원은 물론 그가 나중에 교수로 있었던 페스트 대학의 산부인과 병원 모두 그와 인연이 닿기 전엔 산욕열이 창궐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정하지 않자, 제멜와이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그가 죽은 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61년, 그의 행동은 조금씩 균형을 잃었고, 결국 4년 뒤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제멜바이스에게 새로운 의료기관을 방문해보자고 설득했고, 그를 비엔나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후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리고는 구속복을 입히고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젬멜 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서 시작된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는 루이 파스퇴르, 조셉 리스터, 로버트 코치와 같은 의료계 개척자처럼 변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훗날 재조명됐다. 오늘날 손 씻기는 병원에서 감염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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