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22년 4월 7일 뉴스입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금수저에 인성까지 바르던 전자기학의 아버지
[GettyImages] |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제본소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도우며 자란 과학자가 있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를 꼽을 때 제일 많이 언급되는 실험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다. 그는 제본을 맡겨두고 찾아가지 않은 과학책들을 통해 수많은 지식과 과학적 사고를 배웠고, 당시 유명한 과학자였던 험프리 데이비(1778~1829)의 조수로 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도 얻었다.
기초부터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야 하는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경험한 적 없는 패러데이는 수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했지만, 특유의 직관력과 성실함으로 수많은 실험을 훌륭하게 성공해냈다. 이후 그가 남긴 놀라운 업적과 발견들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1~1879)이라는 천재 과학자에게 이어져 완벽한 이론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패러데이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너끈히 몇 시간을 채울 수 있지만, 오늘 주인공은 패러데이가 아니라 맥스웰이다.
처음 전기를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발견한 것은 패러데이였다. 하지만 맥스웰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기를 신기한 실험 장치로만 여겼을지 모른다. 복잡한 수식을 다루기 어려워했던 패러데이는 자신의 위대한 경험을 실험이라는 방식을 통해 남겼다. 그가 남긴 전자기장에 대한 기본 개념을 비롯해 두 물체가 서로 밀거나 끌어당기는 전기력, 전기가 흐르는 물체 주위로 흐르는 자기력, 전자기 회전 장치 등은 다른 과학자들의 업적과 함께 복잡하게 연결됐다. 우선 전기력은 전하를 띠는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인데, 이미 오래전인 그리스 시대부터 사람들은 그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식물의 수지가 굳어 만들어진 호박을 털가죽으로 문지르면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쉽게 달라붙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기(electricity)라는 단어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로 호박(elektron)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자기력 역시 전기력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힘이다. 고대 그리스 마그네시아 지역의 양치기는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우연히 자철석이라는 광석이 쇠지팡이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최초의 발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자석(magnet)이라는 명칭 역시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패러데이(왼쪽).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GETTYIMAGES] |
1820년 덴마크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1777~1851)는 강의 중 전류가 흐르면 도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예상한 결과는 도선 온도가 올라가 뜨거워지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도선 옆에 가만히 놓여 있던 나침반 바늘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전기력과 자기력 사이에 알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패러데이는 자기력을 통해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고, 여기에 맥스웰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더했다. 이로 인해 수학적으로 아름답게 정리된 현대 전자기학의 이론적 기반이 정립될 수 있었다. 패러데이를 포함해 여러 과학자가 그린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넣어 완전한 생명으로 승천시킨 것이다.
수많은 일화를 남긴 과학자들을 살펴보면 성격이 독특한 경우가 많다. 물론 과장되거나 희화화된 부분도 있겠지만, 남들과는 다른 행동과 말투는 동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사회성보다 외롭고 괴팍한 천재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맥스웰은 정반대였다. 1831년 영국 에든버러의 넉넉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교사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은 맥스웰은 호기심이 많고 남들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보유한 영재였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그는 8세 때 위암으로 어머니를 여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 순간이었지만 맥스웰은 도리어 어머니의 아픔이 끝났다는 것에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을 만큼 조숙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10세가 되자 맥스웰은 좀 더 고차원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에든버러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며 전 과목 고르게 우수한 성적을 받는 모범생이 됐다. 특히 14세에 처음 논문을 썼는데, 2개의 핀과 끈을 이용해 연필로 곡선을 그리면 하나의 집합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타원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갓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논문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에든버러왕립학회에서 발표된 이후 천재로 주목받았다. 16세 때 명문 에든버러대에 입학한 그는 이후 케임브리지대, 마리샬대, 킹스 칼리지 런던으로 계속 자리를 옮기며 연구를 이어갔다.
이때 맥스웰은 자신보다 마흔 살이나 많은 패러데이를 만났고, 전자기학에 대한 영감을 공유하며 수많은 업적을 이뤘다. 그가 설계 과정부터 자문한 캐번디시연구소 역시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을 정도로 맥스웰은 모든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존재다. 무척이나 완벽한 삶에 대한 신의 질투였을까. 아쉽게도 그는 어머니처럼 위암에 걸렸고, 48세에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났다.
N극과 S극의 자석은 아무리 작게 잘라도 하나의 극이 될 수 없다. [GettyImages] |
맥스웰이 매주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날 그에게 신앙적인 체험을 공개적으로 고백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위대한 물리학자가 이런 간증을 한다면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과학자에게 간증을 요청하는 건 배려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자칫 과학과 종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스웰은 간증을 요구한 교회 측에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신앙이란 각자의 마음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고 상대방 사정을 헤아리는 그의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또한 과학으로 대중과 소통하고자 할 때 어떠한 인품을 갖춰야 할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1736~1806)은 실험을 통해 두 전하 입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정전기적인 인력을 거리와 전기량의 관계로 나타냈다. 이게 바로 전기력에서 매우 중요한 ‘쿨롱의 법칙’이다. 맥스웰은 이를 일반화해 ‘가우스 법칙’이라는 첫 번째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전자가 공간으로 퍼져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선을 전기력선이라고 하며, 마치 잘 익은 김장 배춧속처럼 꽉꽉 들어찬 전기력선의 합을 전속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만약 어떤 면적에서 전속밀도를 안다면, 가우스 법칙을 통해 해당 면적에서 전속을 구할 수 있다. 쿨롱의 법칙이 각각의 개별 전하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을 표현했다면, 가우스 법칙은 하나의 전하로부터 발산되는 전기장의 세기를 보여준다.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장’이라는 개념을 담았다.
두 번째 방정식은 ‘가우스 자기 법칙’이다. 가우스 법칙을 자기력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며 홀극(monopole)이라는 하나의 극만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N극과 S극을 보유한 자석을 자르면 아무리 작게 잘라도 잘린 자석은 여전히 N극과 S극을 그대로 갖는다. 2개의 극을 따로 분리해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쇳가루가 뿌려져 있는 곳에 자석을 놓을 때 만들어지는 선을 자기력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의 극에서 나온 자기력선은 반드시 다른 극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역시 같은 말이다.
세 번째는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이다. 바로 이 세 번째 방정식 덕분에 우리는 전기를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다. 자속은 가상의 곡면에 작용하는 총 자기력을 나타내는데, 자속이 변하면 그 주변에 전기장이 발생한다는 법칙이다. 이를 이용하면 고리 모양 도선을 회전시켜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풍력발전소, 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 등 존재하는 발전소가 대부분 에너지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리며, 돌리는 힘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마지막 방정식은 ‘앙페르 회로 법칙’이다. 프랑스 물리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1775~1836)가 발견했지만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기존 앙페르 법칙은 전류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에 따라 전기장이 변할 때는 수정이 필요했기에 이를 맥스웰이 보완했다.
맥스웰의 전기장과 자기장에 대한 이론은 기존 전자기학을 통합했고, 이를 토대로 전자기기가 만들어졌다. [GettyImages] |
네 가지 방정식을 통해 완성된 맥스웰의 전기장과 자기장에 대한 이론은 기존 전자기학을 통합했다. 단순히 발견된 이론들을 정리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후속 연구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맥스웰 방정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정의된 ‘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었는데, 당시 물리학자들은 최근 발견된 힉스입자(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에서 입자의 질량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입자)나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암흑물질(우주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직접 관측하지 못한 물질)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할 가능성이 큰 미지의 개념에 상당히 엄격했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낼 수 있다 보니 다소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물리학계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상의 무언가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인슈타인 역시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시공간에 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맥스웰 방정식에서 상대성이론으로 넘어가는 수학적 유도가 비교적 간단했기 때문에 맥스웰이 더 오래 살았다면 아인슈타인보다 먼저 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만큼 그의 천재성과 짧았던 생애가 모두에게 아쉬웠으리라.
길지 않은 삶 동안 현대 물리학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공계 학생들의 동경 대상이 된 천재 과학자의 유산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어디든 존재한다. 전자기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휴대전화나 노트북, 심지어 자그마한 이어폰조차 만들 수 없다. 여전히 증기로 가는 자동차를 타고, 고무줄과 말뚝박기만 하며 놀았을 우리에게 작지만 거대한 전기적 세상을 열어준 맥스웰이 깊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적어도 그의 연구 덕분에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검색창에서라도 맥스웰의 이름이 커피 브랜드보다는 계속 상단에 노출됐으면 좋겠다.
세계의 대부분은 비가시적이다
하인리히 헤르츠
(1857~1894)
우리는 외적 대상의 내적 모상 혹은
상징을 만들어 보유한다. 모상을 만들 때 우리는
그 모상의 사유思惟필연적 귀결이 모사된 대상의
자연필연적 귀결의 모상이 되도록 만든다.
#전자기파실험 #헤르츠진동자 #상인의아들
#라디오발명 #비가시적인광선 #추상회화
#고전역학 #역학의원리들 #철학적인서술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헤르츠는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들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탁월한 업적은 전자기파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1860년대에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을 통합하는 이론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전자기력”이라는 단어는 그 통합을 표현한다. 그 후 1870년대에 맥스웰은 빛을 전자기파로 이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놀랍고도 획기적인 성취로 여겨졌지만, 실험적 입증이 필요했다. 이에 부응하여 하인리히 헤르츠는 진동하는 전기쌍극자를 이용하여 전자기파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그런 전기쌍극자는 “헤르츠 진동자hertzian oscillator”로 불린다.
함부르크에서 한자 동맹에 소속된 명망 높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헤르츠는 카를스루에에서 일할 때 전자기파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업적을 이뤘다. 역시 카를스루에에서, 1886년 11월 11일에는 송신기에서 수신기로 전자기파를 전송하는 작업에도 성공했다. 오늘날 당연시되는 이 전송은 라디오의 원리다. 헤르츠는 자신의 연구 결과들을 보고서의 형태로 정리하여 1888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전기력의 살들rays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독일 연방 우체국은 이 보고서 발표 125주년 기념일에 58센트짜리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그보다 먼저 1957년에 헤르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우표가 발행된 바 있는데, 그 우표의 가격은 10페니히였다(당시 어린이였던 필자는 용케 그 우표를 샀다. 그것이 필자의 유명 과학자 우표 수집의 시작이었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기파가 실제로 존재하며 생산될 수 있음을 헤르츠가 입증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 논평할 것이 있다. 첫째, 그 입증으로 헤르츠는 맥스웰 방정식들이 전적으로 옳음을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그 당시에 무명이었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 방정식들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하게 되었다. 맥스웰은 빛의 본성뿐 아니라 속도도 수학적으로 계산해냈는데, 그 속도는 광원이나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의존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헤르츠 덕분에 깨달았듯이 이는 물리학에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했고, 울름 출신의 아인슈타인은 그 문제를 탐구한 끝에 상대성이론에 이르렀다.
둘째, 헤르츠가 연구한 살들이 비가시적이라는 점이 특별히 중요했다. 당시에 발견된 다른 비가시적인 살들(뢴트겐선, 방사선, 우주복사선)과 더불어 헤르츠의 살들은 빛의 대부분이 비가시적이라는 추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헤르츠의 측정들이 명확히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대부분은 비가시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미술가들이 보기에 이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자는 세계를 발명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피카소를 그 대표자로 꼽을 만한 추상회화가 등장했다. 피카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리는 대신에 생각하거나 상상한 것을 그렸다.
헤르츠는 대학교 저학년생 시절에 물리학 공부를 준비할 마음을 먹고 당시에 최고라는 평판을 받던 어느 유명 물리학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위대한 작품들을 읽으라고 조언했다. 위대한 작품이란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와 조세프 라그랑주의 고전적인 저서들을 말한다는 설명도 했다.이 조언대로 헤르츠는 라그랑주의 역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사태 자체를 숙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힘, 시간, 공간, 운동 같은 단어들이 말해주는 역학의 원리들만 가지고도 충분히 힘겨운 공부가 가능하다”라고 썼다.
헤르츠의 (겨우 36세에 너무 이른 죽음을 맞기 직전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은 다름 아니라 역학의 원리들을 다루며, 역학의 기본 개념들을 꼼꼼하게 분석한다. 연구 중에 헤르츠는 17세기 문헌을 뒤적였고 무엇보다도 “라이프니츠의 저술”을 읽기를 꺼리지 않았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에 관한 최초 논문들”을 인상 깊게 읽은 그는 그 문헌들에 대해서 이렇게 논평했다.
아주 보잘것 없는 싹들에서 과학 전체가 피어났는데,
그 싹들을 보노라면,
그 조잡한 인쇄 상태와 매우 엉성한 기호 언어를 보노라면,
특별한 감회에 젖는다.
지금은 더듬거리는 아이의 말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대에는 최고의 지식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도 그러하다.
『역학의 원리들Prinzipien der Mechanik』을 쓰면서 헤르츠는 아이작 뉴턴이 역학에 필요하다고 꼽은 세 가지 원리를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각각의 자유로운 시스템은
자신의 정지 상태 혹은
등속직선운동 상태를 고수한다.
헤르츠가 시도한 어마어마한 작업은 “시간, 공간, 질량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진술할 때 “우리 정신의 요구들만 충족시키지 말고” 그 진술이 “모든 미래의 경험들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헤르만 폰 헬름홀츠를 비롯한 동시대인들이 “역학에 대한 유일한 철학적 서술은 아닐지 몰라도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서술”로 평가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예리하게 맞물리며 이어지는 그 작품의 논리에 독자들이 익숙해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루트비히 볼츠만은 헤르츠의 작품을 열심히 공
부했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의 서두에는 “나의 사랑하는 헤르츠!Mein liebes Hertz!”(“나의 사랑하는 심장!Mein liebes Herz!”이라는, 애인 사이의 통상적인 인사말을 변형한 문구임—옮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사랑하는 헤르츠”로 시작하는 편지를 쓴 여성은 없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