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논란 잠재울 뇌신경철학 탄생 예고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 의지(free will)’라고 한다.
철학자들은 지난 수천 년간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1980년대 들어서는 이 논쟁에 뇌과학자들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철학자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자유 의지의 메커니즘이 너무 복잡해 그 내용을 밝히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자유의지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17개 대학 뇌과학자‧철학자 융합연구 착수
22일 ‘사이언스’ 지는 17개 대학의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 철학자 등이 참여하는 다국적 융합연구가 큰 기대 속에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 프로젝트 시행은 지난 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채프먼 대학 뇌 연구소(Brain Institute)에서 열린 국제 콘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Neuroscience of Free Will)에서 결정됐다.
40개 대학에서 온 90명의 학자들은 뇌과학‧철학 간 융합연구를 통해 자유 의지를 규명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 합의했다.
연구책임자로 채프먼 대학의 뇌과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인 우리 마오즈(Uri Maoz) 교수를 선정했다. 그는 “이번 연구를 통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 미래 자유 의지 연구에 변화를 도모하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융합연구를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는 700만 달러가 투입되고 있다. 연구는 두 가지 질문에 집중되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자유 의지를 갖게 하는지 그 근원을 밝혀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근원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실제로 사람이 자유 의지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그 여부를 확인해나가는 일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존재 여부는 종교, 윤리, 법, 과학 등 현대 사회를 이끄는 주요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적으로 보면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신과 대등한 관계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신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윤리 분야에서 보면 자유의지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윤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법적인 면에서 보면 자유 의지는 사람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을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감옥에서 사회로 복귀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정상적인 삶을 기대할 수 있는지 그 잣대가 될 수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유 의지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인간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철학적 질문에 대해 실험 전개할 계획
뇌과학자들이 자유 의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3년이다.
당시 심리학자인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은 뇌 연구를 통해 RP(readiness potential)라는 뇌파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동이 있기 전 먼저 나온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리벳의 주장은 데카르트 이후 이어져 내려온 인간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접근 방식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한쪽에서 리벳의 연구 결과를 자유 의지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한 반면, 기계론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해석해오던 특히 행동주의 과학자들에게는 리벳의 연구 결과가 허구임을 증명해야 할 큰 도전적 과제였다.
이번에 새로 시작된 공동연구는 그동안 벌어졌던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프로젝트로 평가받고 있다.
17개 대학에서 온 8명의 뇌과학자, 9명의 철학자들이 참여해 이전보다 더 정교한 내용의 질문을 제시하고, 뇌과학 등 첨단 과학을 통해 철학적으로 고지된 질문들에 대해 실험을 전개해나갈 계획이다.
연구팀은 4년간 존 템플턴 재단(John Templeton Foundation), 페처 연구소(Fetzer Institute) 등과 협력해 사람의 뇌가 어떻게 의사 결정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지 밝혀낼 계획이다.
관계자들은 연구가 성공을 거둘 경우 ‘자유의지에 대한 뇌신경철학(neurophilosophy of free will)’이란 새로운 학문이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팀장으로 선출된 우리 마오즈 교수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관련, “벤자민 리벳이 논문을 발표한 이후 1000편에 달하는 후속 논문이 새로 발표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유 의지가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검증을 하는데 실패했다”며 “이번 융합 연구를 통해 자유 의지의 대한 근거를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향후 수행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리벳의 연구 유형을 넘어서는 일”이라며, “리벳을 넘어서기 위해 자유 의지의 존재 여부를 묻는 단순한 질문보다 더 정교한 질문들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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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10년 1월 13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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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영향 받는 ‘서브리미널 효과’ 밝혀져
지난 2일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지에는 ‘인간의 결정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영향력’을 소개하는 흥미로운 심리학 논문이 실렸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심리학과의 루드 쿠스터스(Ruud Custers)와 헨크 아츠(Henk Aarts) 교수가 발표한 이 공동 논문은 ‘무의식 의지(The Unconscious Will)’라는 생소한 개념을 소개하며, 의식적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특정 자극에 의해 누구나 영향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광고나 메시지가 소비자를 조종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선전기법을 의식(lumen) 아래(sub)에서 작용한다는 의미로 ‘서브리미널 효과(subliminal effect)’라 부른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자유의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생각해보라(Think You’re Operating on Free Will? Think Again)’는 기사를 통해 서브리미널 효과를 증명한 쿠스터스와 아츠 교수의 연구를 조명했다.
환경 자극과 무의식으로 선택에 영향 줄 수 있어
인간만이 지닌 특징으로 ‘자유의지(free will)’를 꼽기도 한다. 인간은 논리와 이성을 이용하므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을 탓하는 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는 비난도 등장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환경의 중요성을 감지한 사람들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유혹을 이겨낼 만큼 인간의 의지가 강력하지는 못하다는 의미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생존을 위해 환경을 읽어내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뇌의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프란츠 부케티츠(Franz Wuketits) 교수는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라는 책에서 “모든 행동은 뇌의 신경처리 과정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특정한 자극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존 바그(John Barg)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는 1999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자동성(The Unbearable Automaticity of Being)’이라는 저서를 통해 무의식적 자극의 강력한 힘을 주장한 바 있다. 영상 중간중간에 특정 단어를 삽입하되 순식간에 지나가게 하면, 관객들은 그 단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그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극에 대해 인간 스스로는 거부할 수도, 인지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후 서브리미널 기법을 이용해 특정 음료가 더 잘 팔렸다든가 성적인 단어를 삽입해 호감도를 높인다든가 하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브리미널 기법을 광고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나라도 생겨났다. 우리나라도 방송광고심의규정 제15조에서 “방송광고는 시청자가 의식할 수 없는 음향이나 화면으로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방식을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 서브리미널 효과는 4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서브리미널 기법을 통해 정신력 강화 훈련을 받았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운동선수나 수험생 등 집중력이 필요한 사람들도 서브리미널 제품에 많은 돈을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 심리학계는 서브리미널 효과가 ‘실험 방식과 원리 규명에 있어 합리성이 의심된다’고 결론 내렸고, 지금은 광고인들의 속설과 전설로 남게 됐다. 그런데 사이언스지에서 서브리미널 효과를 소개한 연구를 과학적인 논문으로 인정한 것이다.
인지할 수 없는 자극에도 무의식은 반응한다
서브리미널 효과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내는 연구도 있다.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책상 위에 가죽으로 된 각이 진 서류가방이 놓여 있으면 사람들이 더 경쟁적으로 행동한다거나, 도서관 벽에 그림이 걸려 있으면 이용자들이 더 작은 목소리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청소용품 냄새를 맡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정돈하기 시작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연구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이렇든 최근 심리학계에서는 인간의 결정과 행동이 무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고, 무의식은 특정한 환경과 자극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들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쿠스터스와 아츠 교수의 논문도 그 중 하나다.
이 논문은 피실험자를 특정한 자극에 노출시켜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을 스크린 앞에 앉히고 ‘직소 퍼즐’이나 ‘십자말 풀이’ 등 퍼즐 맞추기와 관련된 단어들을 보여준다. 일부 학생에게는 ‘해변’, ‘친구’, ‘가정’ 등 긍정적인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단어들을 보여주되,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정작 자신들은 그 단어가 있었는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이후 실제로 퍼즐을 맞추라고 지시하자, 긍정적인 단어에 노출된 학생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작업에 몰두했다. 또한 퍼즐을 맞추는 일에 스스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듯 특정한 자극을 가하면 그와 관련된 다른 정보들이 촉발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점화 효과(priming effect)라 부른다.
음주와 관련된 단어에 짧은 순간 동안 노출된 사람들은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반면, ‘간호사’처럼 보살핌이나 보호에 종사하는 직업 명칭에 노출된 사람들은 긍정적인 행동이 늘어났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도 피실험자들은 그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특이한 점은 피실험자들이 그 단어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쿠스터스는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왜 찾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시작한다”고 소개하며, “사람들은 의식이 행동을 지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의식에 따른 자유의지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계속 도전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논문에 대해 바그 교수는 “서브리미널 효과를 둘러싼 수많은 의심과 회의적 시선을 극복할 수 있는 커다란 도약이자 과학계의 랜드마크”라고 평가했다.
바그 교수는 커피와 이력서 등 생활 속 소재를 이용해 심리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딱딱한 의자에 앉은 사람은 푹신한 소파에 앉은 사람보다 융통성을 발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사람들은 찬 음료수를 들었을 때보다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일 확률이 높았다. 면접관들은 입사지원자의 이력서가 가벼운 서류철보다는 무거운 서류철에 끼워져 있을 때 더 진지하게 내용을 살펴봤다.
그는 “이렇듯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자극에 심리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는 많았지만, 무의식적인 자극에도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과학 분야를 개척했다”고 의의를 밝혔다.
유독한 심리적 자극을 없애 건강한 환경 만들어야
쿠스터스 교수는 “이 기법이 일부 국가에서 금지된 서브리미널 광고에 쓰일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걱정하기보다는 눈에 빤히 보이는 광고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친구나 해변처럼 긍정적인 화면과 더불어 음료수를 보여주는 광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연상작용에 의해 어느 순간 무의식이 ‘콜라가 먹고 싶다’고 속삭인다는 것이다.
건강에 좋지 못한 식품들도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의 구매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는 “개인의 선택은 유독한 광고 환경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환경 자체에서 유독한 자극들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쿠스터스와 바그 교수는 자신들의 논문이 ‘이성이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다’는 인간의 특권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연구라는 데 동의하며,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진화생물학에서 보자면 무의식 의지(Unconscious Will)는 일상적인 기능을 자동적인 메커니즘으로 발전시켜 생존률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으므로 의식보다 앞서 진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그 교수는 “인생은 수많은 결정을 요구한다”며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결정 과정이 없었다면 인간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쿠스터스 교수는 “인간의 의식은 마음대로 조종하기 힘든 커다란 선박에 올라탄 여행자와 같다”며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선택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감각을 믿는다면 올바른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류 역사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존재나 통제불가능한 힘에 대한 묘사가 이어져 왔다. 고대에는 종교나 신화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현대에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 속 이드(id)가 넘겨받았다. 어쩌면 이 모두는 무의식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심리와 의식을 지적하기 위한 문화적 표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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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그 환상의 진화 – 프란츠 부케티츠
이 책은 진화심리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계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된 진화론이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면서 심리학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인간의 문제도 진화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정신과 사회성에 관한 것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데 주력해왔다. 그 안에는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 의식, 인간의 본성, 도덕체계 등이 포함된다.
서두에서 내가 이 책이 진화심리학의 결정판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자유의지’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진화심리학의 결정판이라고 한 것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수수께끼는 이미 풀렸다. 나는 이것이 대담한 주장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정신과 의식, 또는 다른 동물들의 의식을 우리가 이미 ‘완전히’ 이해했다거나 언젠가 완전히 이해하게 되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전에는 형이상학적 사변에만 일임했던 정신 현상을 이미 오래 전부터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해졌으며, 우리 뇌에 대한 인식이 성장함에 따라 그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도 점점 깊어지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1894년 저명한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A. Michelson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물리학의 중요한 근본 법칙과 사실들은 모두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너무나 굳건히 확립되어 있기에 새로운 발견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일이 생길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우리는 미래의 발견 대상을 소수 여섯번째 자리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1800년대 말에도 과학은 정점에 다다랐다는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새로운 발견들이 이어진 것을 보면 저자의 위와 같은 선언도 지나치게 과감한 선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어떤 진술이 사실에 관한 것(진실이거나 거짓이다)이라 함은 그 진술이 원리적으로, 실험이나 관찰에 의해 반증될 수 있다는 뜻이다.”즉 저자의 선언은 진화심리학의 수많은 연구 결과들의 종합이며 아직은 반증되지 않았으므로 저자의 선언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왜 이 책을 진화심리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지 저자의 언급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저자는 오랫동안 서양 철학을 지배했던 정신-육체 이원론이 허구임을 지적한다.
“‘관념론’의 특이한 변형으로서 이원론은 이론적으로 유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잘못된 이론이 그랬듯이 서양 사상사에 많은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 그러나 뇌 연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모든 것에 따르면(상호작용주의를 포함한) 뇌와 정신(몸과 마음) 이원론은 진지한 과학적 가설이 아니다.”참고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는 ‘뇌 연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모든 것’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나는 이 주제와 관련된 다른 많은 책에서도 이와 유사한 텍스트를 인용할 수 있었는데- 서양의 사고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견해 즉 인간의 악한 본성은 인간의 문화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견해와 마주한다(헉슬리[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린 진화론의 열광적인 옹호자이자, ‘멋진 신세계’의 저자 헉슬리의 할아버지]를 보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와 반대되는 입장, 즉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모든 면에서 선했지만 문명화가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입장은 장 자크 루소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틀린 것이다.”
“근본적인 윤리 내지 도덕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공상하는 능력은 바로 그런 인간 존재에 속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념은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생물학적 기관인 ‘뇌’ 덕택이다.”
“도덕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오히려 우리 본성의 특수한 발현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각 개인의 모든 임의적 행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일 필요는 없다. 이미 이전의 고도 문화들은 분업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따른 필요때문에 각각 독립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불가피하게 아주 명확한 윤리 규범을 발전시켰다는 렌쉬(1979)의 지적은 옳다.”즉 생물학적 기관인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의 문화가 현재 우리가 보고있는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진화론, 진화생물학, 문화진화론, 진화심리학 등의 경로를 통해서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들이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인 자유의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보자.
“뇌는 자신의 담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아무리 커다란 오류를 양산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종교적 믿음에 대한 성향이 발달한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사회 집단들의 안정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신화는 집단에 속한 각각의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고 또 극복될 수 없을 듯 보이는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기꾼이 자신을 악용하도록 해서는 안되며, 단지 사적인 일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물론 건강한 믿음과 위험한 순진함을 엄격하게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유의지 이념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통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매우 복잡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 의식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망상하는 것을 허락한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된 논중에 따르면 자유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에 불과하다. 진화가 우리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한 이유는 오로지 그것이 우리에게 이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우리의 의지가 실제로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고슴도치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는 적이 다가 올 때 가시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라고 믿을 것이다. 비록 그가 현실적으로는 어떠한 다른 대안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가시만이 위험한 여우나 개로 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만일 엄격한 진화생물학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라는 환상이 비생산적이라면 그것은 발달하지 않았거나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자유의지라는 환상이 비생산적인데도 그것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면 자연선택은 그것의 담지자를 제거했을 것이다(따라서 오늘날에는 누구도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라고 독단적으로 명령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이 악용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자유의지는 단순히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가설에 불과하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안심하고 계속 그렇게 믿어도 될 성싶다. 그러나 (더는) 그것을 믿지 않게 된 사람도 낙담하거나 자신을 강제적인 존재로 느낄 필요가 없다.”
즉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유의지’라는 것도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의 정신의 영역에 대한 많은 논란들, 예를 들면, 의식, 종교 또는 도덕체계에 관한 논란들도 결국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란들도 언젠가는 도태되든지 새로운 변이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는 뜻이다.이 책이 대담한 주장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학술서처럼 부피가 크지 않다. 그것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결과들을 참고문헌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심리학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들에 대해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나의 독서 목록에도 문화진화론, 진화심리학에 관한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는 저자의 결론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이 미심쩍은 사람들은 그런 책들을 읽어보는 수고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강력 추천 목록에 올려야 마땅하다.
아래는 2019년 8월 9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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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금 한 행동은 실제로 당신이 선택한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행동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아요?
구내식당에서 먹을 메뉴의 결정부터 직업이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까지 우리는 모두 우리 의지로 전적으로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내렸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여러 인지과학 실험으로 인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에 점점 더 의구심이 생기고 있다.
1980년대에 당시 샌프란시스코대학교에서 일하던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 주도하여 자유의지 개념에 관한 정말 당혹스러운 초기 실험들을 진행했다. 리벳은 동작을 수행하기로 한 결정과 동작 그 자체, 그에 따른 두뇌 활동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다.
리벳은 실험 대상자 여러 명에게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으라고 하고, 그들이 원할 때 손가락을 들라고 요청했다. 실험 대상자 손가락에 센서를 부착해서 손가락이 움직이는 정확한 순간을 기록했다. 그때 실험 대상자들 앞에 시계가 지나갔다. 그러면서 실험 대상자들은 본인이 동작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에 시곗바늘의 위치를 머릿속에 기억해두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벳은 사람들이 동작하기 약 300밀리초 전에 그 동작을 하기로 한 의사결정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관측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하나도 충격적이지 않다. 의사결정이 행동보다 선행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벤저민 리벳이 동시에 실험 대상자들 머리에 부착한 전도체를 이용해서 두뇌의 전기적 활성을 측정한 뇌전도를 작성하려 했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
리벳은 특히 움직일때 동작을 준비하려는 전기 신호라고 알려진 운동 준비 전위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리벳이 실험으로 얻은 결과는 더 당혹스럽다. 운동 준비 전위는 움직이기 거의 1초 전에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우선 여기까지도 겉으로 보기에는 충격적일 게 없는데, 두뇌 활동이 명령을 내릴 동작보다 선행하는 게 논리적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 동작 하겠다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운동 준비 전위가 500밀리초 이상 먼저 올라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즉 여러분의 뇌는 여러분이 움직여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활성화한다.
우리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은 부지기수다. 모든 반사는 물론이고,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단순히 숨 쉬는 행동 등 일상의 많은 동작이 여기에 포함된다. 스포츠나 음악 같은 활동을 할 때도 많은 부분에서 무의식적으로 결정이 이루어진다. 만약 여러분이 테니스 경기를 하거나 쇼팽의 연습곡을 연주한다면 자신이 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실행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는지?
오늘날 거의 모든 사법제도는 개인의 책임 의식이라는 개념에 기반한다. 사회는 여러분이 항상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고, 더군다나 이게 자유의지를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많은 상황에서 만약 여러분이 한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여러분이 처벌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광기를 앞세우는 게 변호할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한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판정을 받으려고 일종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론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네, 경찰관 선생님, 제가 빨간불을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제 뇌에서 작동하는 화학적 처리의 결과일 뿐이에요.” 이렇게 말했을 때 경찰관이 넘어가주는 행복한 결말이 생길 확률은 거의 없다. 우리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없어도 사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걸 안다.
또 다른 유감스러운 일들이 생길 수도 있는데, 만약 너무 많은 사람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모든 윤리 의식을 포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실험 하나가 이러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실험 대상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서 시험을 치르게 하는데, 실험 대상자들은 시험 도중에 커닝할 수 있었다. 두 그룹 가운데 한 그룹에게 실험 전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게 했더니…, 시험을 치를 때 이 글을 읽은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많이 커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