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90년경 태어나 430년 무렵까지 살았다는 엠페도클레스는 시기적으로 볼 때 피타고라스 이후,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다. 엠페도클레스는 시실리 섬에서 태어났고, 정치를 했으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추방되었다가 귀향해서는 자연 철학 다방면에서 독특한 이론을 제안했다. 소크라테스의 도덕 철학이 태생하기 전에 활동한 덕분인지 그의 철학에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사색이 많았다. 특히 물질에 대한 그의 입장은 잘 알려진 4원소설인데, 불, 흙, 공기, 물이란 네 가지 원소의 조합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물, 불, 흙이야 흔하게 보이니까 원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공기를 4원소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은 사뭇 비범한 과학적 감각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물병을 목 부위부터 물속에 집어넣었을 때 물이 병을 가득 채우지 못하고 빈 공간이 일부 남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공기의 존재를 유도했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가 서로 결합하거나 분해되면서 물질이 형성되고 붕괴한다고 보았으며, 결합하는 힘은 사랑, 분해하는 힘은 미움 혹은 갈등이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입자와 입자 사이의 끄는 힘이 사랑이고, 서로 미는 힘은 갈등이다. 속설에 따르면 엠페도클레스는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믿었고, 자기 몸이 부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고향 시실리 섬의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 네 가지 물질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될 뿐이지 기본 원소와는 거리가 멀다. 설령 이 네 가지 물질을 기본 원소라고 인정한다 쳐도, 그사이에 어떤 상호 작용이 있어 다른 물질을 생성할 수 있는지 설명할 길이 막막하다. 4원소설에 준거한 물질 이론은 과학보다 신화에 가깝다.
엠페도클레스보다 30년쯤 후에 태어나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 자연 철학의 또 다른 줄기, 즉 원자설과 깊이 연관된 인물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부모에게서 넉넉한 재산을 물려받아 세상을 돌아다니며 지식을 구한 뒤 그리스에 정착해 평생을 지식 탐구에 바쳤다고 한다. 4원소설에 네 가지 기본 물질이 있다면, 원자설은 수많은, 아마도 무한히 많은 종류의 원자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각 원자에는 고리가 달려 있어 서로 엮일 수 있고, 우리 눈에 보일 만큼 큰 물질로 커질 수도 있다. 원자론의 창시자로는 데모크리토스와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레우키포스가 거명된다. 이들이 어떻게 원자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경험적 사실에 바탕을 둔 주장은 아니었다.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원자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능해진 일이었으니 그리스식 원자론은 지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리스인의 원자는 아주 작긴 하지만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과 무게가 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원자론적 시각으로 보면, 원자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그 원자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물질의 종류도 다양하다. 원자가 결합하고 분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기계적인 세계관으로 답했다. 즉 선행 사건이 그다음 사건을 어떤 법칙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의 의지가 개입해서 그 이유를 제공한다고 보지 않았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가지 가설, 즉 원자의 존재와 기계적인 상호작용 이론은 놀라울 만큼 정확한 예견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발생지, 신에게 받은 게시를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직업이 있었던 지역 출신들이 보기엔 반역적인 주장으로 보였을 것 같다. 그런 탓인지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동시대 그리스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와 뉴턴의 역학이 그의 기계론적 결정론의 편을 들고, 18세기 화학부터 20세기 물리학에 이르는 과정에서 원자의 존재가 차츰 검증되면서 비로소 부활한 이론이라고 보아야겠다. 뛰어난 과학적 업적이라도 때로는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진가를 인정받는 경우가 있는데, 데모크리토스의 경우는 무려 20세기가 넘는 시간을 기다려서야 제대로 인정받은 물질 이론이라고 하겠다.
데모크리토스보다 30년쯤 뒤에 태어났다고 알려진 플라톤은 이전의 철학적 선배들과는 달리 그의 사상을 치밀한 산문으로 남겼다. 그의 우주관과 물질관은 저서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에 서술되어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무척 싫어했다고 알려진 플라톤은 그의 책에서 티마이오스란 이름의 화자를 동원해 원자론 대신 4원소설을 그의 우주론에 차용하는데,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하학적 지식을 동원해 4원소설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다. 즉 플라톤은 불, 흙, 공기, 물의 4원소가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모양의 아주 작은 원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플라톤의 이론에서는 우아한 기하학적 구조를 띠게 된 셈이다.
플라톤의 다면체 혹은 플라톤의 고체라고 불리는 정다면체에는 딱 다섯 종류가 있다. 정사, 정육, 정팔, 정십이, 정이십면체가 전부다. 플라톤의 동시대 수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정다면체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정다각형을 붙여서 만든 3차원적 구조물이다. 정삼각형 네 개를 붙이면 정사면체가 만들어진다. 정사각형 여섯 개를 붙이면 정육면체가 만들어진다. 정삼각형 여덟 개를 붙이면 정팔면체, 스무 개를 붙여 만들면 정이십면체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 열두 개를 붙여야 만들 수 있다. 정육각형이나 그 밖의 정다각형을 붙여서 만들 수 있는 정다면체는 3차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는 공간이 3차원이다 보니 3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는 정다면체 5형제에게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도 하다.
플라톤은 정다면체와 원소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불은 뾰족한 정사면체의 속성 때문에 손을 대면 아프고, 물은 둥글둥글한 정이십면체의 속성 때문에 잘 흐른다는 식의 소박한 해석을 덧붙였다. 그런데 플라톤의 철학적 선배들이 기본 원소를 네 가지만 제안했던 탓에 그만 정십이면체는 대응시킬 만한 원소가 없게 되었다. 정십이면체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좀 더 애매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선택지는 용감하게 정십이면체에 해당하는 기본 원소 하나를 제안해 4원소설을 5원소설로 뒤집는 것이었겠지만, 위대한 플라톤도 선배들이 짜놓은 철학적 사유의 전통을 깨는 게 녹록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절실한 수학적인 이유 때문에 제5의 원소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사유는 완벽한 고체와 4원소 사이의 일대일 대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리한 수학적 관찰에 도달한다. 정사각형은 내각이 45도, 45도, 90도인 직각이등변 삼각형 두 개를 모으면 만들어진다. 따라서 정사각형보다 더 기본적인 도형은 직각이등변 삼각형이다. 정삼각형은 내각이 30도, 60도, 90도인 직각 삼각형 두 개로 갈라진다. 따라서 정삼각형보다 더 기본적인 도형은 30-60-90도짜리 직각 삼각형이다. 정사, 정육, 정팔, 정이십면체는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이란 두 기본 도형의 조합이고, 이것은 다시 두 종류의 기본 직각 삼각형의 조합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정십이면체였다. 정오각형 열두 개를 모아 만들어진 게 정십이면체인데, 정오각형은 직각 삼각형으로 분해할 수 없는 도형이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인지, 플라톤의 분신 티마이오스는 정십이면체를 특정 원소에 대응시키는 대신 이 모든 물질 세계를 감싸는 하늘의 모양에 해당한다는 단 한 줄의 언급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직각 삼각형으로 분해 가능한 네 원소끼리는 서로 변환하는 것도 쉽다. 레고 조각으로 공룡을 만들었다가 분해해서 자동차를 만들 듯, 직각 삼각형 조각들이 이합집산하다 보면 불이 물이 되고, 물이 공기가 될 수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정삼각형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불과 공기와 물은 상호 변환되기 쉽지만,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흙이 다른 세 원소로 변신하거나, 그 반대 과정이 일어나긴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그래서 흙은 늘 본래 모습대로 남아 있으려는 경향이 다른 세 원소에 비해 크다. 얼마나 그럴듯한 해석인가! 현대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티마이오스>를 읽는 독자라면 플라톤이 그려낸 우아한 수학적 진리와 자연 관찰 결과 사이의 교묘한 조화에 감탄한 나머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온다. 플라톤의 저술은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글쓰기의 표본이다.
플라톤의 사유를 현대적 언어로 치환하자면, 그는 물질 사이의 변환을 레고 블록의 재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는 당시 그에게 허용됐던 수학적 사유의 끝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두 종류의 기본 레고 블록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두 종류의 직각 삼각형, 혹은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이 그것이다. 이제 이 두 가지 기본 도형을 접합하다 보면 기본 다면체, 즉 네 가지 정다면체가 만들어진다. (정십이면체는 백조 사이의 흑조 마냥 이 틀에 끼워 넣을 수 없다.) 그럼 물질은 정다면체의 조합이 되고, 물질의 변환은 기본도형의 이합집산으로 해석된다. 얼마나 깔끔한 물질 이론인가! 플라톤의 자연관에는, 뉴턴 이후에야 비로소 일상이 된 자연과학의 방법론, 즉 수학적 언어를 이용한 자연 현상의 해석이란 방법론이 일찌감치, 어쩌면 인류 저술 중 최초로 동원되고 있다.
플라톤의 저술에선 물론 구체적으로 다룰 수 없었겠지만,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이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두 도형이 갖고 있는 ‘대칭성’ 때문이다. 정사각형은 90도씩 돌려도 정사각형, 뒤집어도 정사각형이다. 정삼각형은 뒤집어도 정삼각형, 120도를 돌려도 정삼각형이다. 다른 삼각형이나 사각형에는 이런 대칭성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그 가짓수가 적다. 수학에선 이걸 대칭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나중에는 군이론이란 이름의 정교한 수학적 이론을 만들어 대칭성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현대 물리학에서 기본 입자를 다루는 방법론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대칭성의 수학, 즉 군이론이다.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의 대칭적 아름다움을 물질 이론에 도입한 플라톤의 시도는 결국 이렇게 아름다운 수학 이론으로, 그리고 기본 입자를 분류하는 이론으로 발전해 온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마이오스>에는 ‘플라톤의 실수’라고 부를 만한 대목이 몇 군데 눈에 띈다. 기본 도형의 종류가 단 두 개라고 파악한 것까지는 대단히 우아한 관찰이었는데, 그다음 대목에서 플라톤은 각 도형에는 (작은 정삼각형, 큰 정삼각형, 초소형 정사각형 등) 제각각 다른 크기가 있다고 선언한다. 크기가 다른 삼각형을 조합하다 보면 정다면체의 크기도 제각각일 텐데, 그 크기에 따라 물맛도 제각각이고, 공기도 신선한 공기, 축축한 공기, 진한 공기, 희박한 공기가 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결국 물질의 다양성은 기본 도형의 크기가 제각각인 데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무한히 많은 종류의 원자가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가설을 도형 크기의 다양성으로 대치하려고 플라톤이 은연중 노력하지 않았나 싶다. 플라톤은 당대의 지성이었지만, 여전히 삼각형, 사각형 따위의 간단한 도형만을 갖고 삼라만상을 다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확신하기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선 양성자와 전자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입자를 이용해 원자를 만든다. (중성자를 포함시킨다면 물론 세 가지 입자가 되겠지만, 두 개나 세 개나 모두 매우 작은 숫자이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원자를 만들어 내는 1단계 조립이 끝나면, 그다음엔 원자를 붙여 분자를 만든다. 원자는 불과 100개 정도밖에 없지만 분자의 개수는 사실상 무한히 많다. 데모크리토스가 꿈꾸었던 무한히 많은 종류의 원자는, 알고 보면 무한히 많은 변주가 가능한 분자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단맛, 짠맛, 반짝임과 탁함, 단단함과 부드러움, 이런 다양한 속성은 원자 수준에서, 혹은 분자 수준에서, 혹은 원자와 분자가 서로 조합해서 덩어리 물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성질이다. 똑같은 탄소 원자를 조합해도 그 결합 방식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연필심이 되기도 한다. 원자는 지극히 단순해도, 원자를 조합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고, 따라서 발현되는 성질도 무궁무진하다. 발현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리스의 지성은 원자 자체가 물질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단서라고 (잘못) 이해했다. 발현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어린아이들이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 내는 무궁무진한 모형을 감상하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백 마디 철학적 말보다 직접 한 번 보면 발현성의 참 의미를 알 수 있다. 플라톤 시절 레고 장난감이 있었더라면 그의 철학적 사유 또한 달라지지 않았을까.
데모크리토스가 꿈꾸었던 무한히 많은 종류의 원자는, 알고 보면 무한히 많은 변주가 가능한 분자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이쯤 해서 식견 있는 독자들은 사변적인 방법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던 그리스식 자연철학의 한계성을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질의 다양성과 원자의 다양성을 동일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으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과학자들이 취했던 용어 선택의 잘못 또한 크다. 원자란 그리스 단어, a-tomos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19세기 말 톰슨이 전자를 발견하고, 20세기 초 러더포드가 핵의 존재를 검증했을 때쯤에서는 원자가 전자와 핵의 복합물이란 점이 분명해졌다. 원자는 깨지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때 쯤 원자란 단어를 파기하고 새로운 단어를 찾는 것이 옳았다. 오래된 친숙한 단어를 바꾸는 일은 어렵다.
<티마이오스>의 자연관에서 드러난 두 번째 실수는 기본 도형의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동력, 즉 그 원인에 대한 고찰이다. 플라톤은 기본 입자 (그에게는 기본 삼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상호 작용을 신의 (선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았는데, <티마이오스>에서 그 대목은 종교적이라기보단, 당시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뭉뚱그려 신이란 존재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식으로 읽힌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그 신의 작용이란 것이 중력 법칙, 전자기학 법칙, 강하고 약한 상호 작용 법칙으로 점차 치환되었다. 그러면서 신에 대한 언급은 자연철학적 기술에서 차츰 빠져나온다. 중력 법칙은 브라헤와 케플러에서 정점을 이룬 고대 천문학의 기술이 토대가 되어 만들어진 이론이고, 전자기학 법칙은 몇 세기에 걸쳐 쿨롱과 앙페르와 페러데이 등이 쌓아놓은 실험적, 수학적 결과를 토대로 맥스웰이 당대의 최첨단 미적분 수학 이론을 동원해 일궈낸 이론이다. 강하고 약한 상호 작용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초반에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원자, 입자 물리학의 실험적 도구가 아니었으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플라톤 이후 25세기에 걸친 세월은 인간의 지적 감수성이 발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기보다는, 이런 과학 장비와 수학적 언어를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세 번째 실수는 삼각형과 사각형 자체를 기본 원소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조합해 만든 다면체만을 원소로 보았다는 데 있다. 삼각형, 사각형과 플라톤식 다면체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한쪽은 2차원 도형이고, 다른 쪽은 3차원 도형이다. 플라톤은 무의식중에 물질은 3차원적이라고 가정을 해버렸다. 너무나 얇아서 두께가 아예 없는 2차원 물질, 너무나 가늘어서 두께와 폭이 아예 없는 1차원 물질은 플라톤의 상상력 밖에 있는 물질이었던 듯싶다. 이 통념을 깨고 물리학자와 화학자와 재료과학자들이 1,2차원 물질을 일상적으로 만들고 탐구하는 건 20세기 후반에서야 가능해졌으니 무리도 아니다.
필자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무렵, 등교 버스 안에서 그 해의 학력고사 전국 수석은 모 학교의 여학생이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지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접한 신문 기사에선, 이 선배가 개학하기 전 남은 겨울을 하이젠베르크의 저술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를 읽고 물리학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로부터 2년 뒤. 필자도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했고, 역시 겨울 방학 때 부분과 전체를 읽으면서 뭔가 구름 위를 걷는 기대감에 충만했던 기억이 아리아리하다. <부분과 전체>는 저자의 자전적 철학 수필이다. 저자 하이젠베르크가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그리스어 수업에서 숙제로 받은 책 <티마이오스>를 읽으면서 플라톤이 설파한 기하학적 물질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도입부에 등장한다. 그런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선후배 세대 사람들이 토대를 닦은 양자역학 덕분에 비로소 인류는 정확한 물질관을 갖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적 방정식이 발표된 것이 1925년이니까, 불과 백 년이 안 된 일이다. 희랍의 철인들이 제시한 자연과 물질에 관한 가설은 (엄밀한 의미에선) 모두 틀린 답으로 밝혀졌다.
이젠 물리학자를 꿈꾸는 대학생 새내기가 <티마이오스>를 읽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 철학에서 얻어낼 쓸 만한 정보는 더 이상 없다. 그러나, 21세기에 과학을 하는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진 빚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싯적엔 명성이 드높았는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유행도 못 따라가는 유명세가 바랜 학자들을 많이 본다. 비록 그들이 현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더 이상 못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세대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배들이 해 놓은 일의 연장이거나, 그들의 저지른 오류의 수정이거나, 그들이 미처 하지 못했던 발견이나 일반화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지적이 있었다. 같은 궤도에서 보자면 서양의 물리학이 지난 25세기에 걸쳐 탐구했던 대상, ‘우주’와 ‘입자’와 ‘물질’은 플라톤의 정십이면체 (우주), 나머지 네 개의 정다면체 (입자), 그리고 그 도형이 결합한 복합체 (물질) 아니었을까. 플라톤은 기본 삼각형과 사각형이 서로 충돌하고 자리바꿈하면서 물질이 변화한다고 했다. 이젠 그 기본 도형이 쿼크와 전자와 빛 알갱이들로 바뀌었지만, 소립자들 사이의 충돌과 상호 작용으로 물질 변화를 이해한다는 틀 자체는 플라톤이 상상했던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는 점만 떼어 놓고 본다면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의 답안은 기본적으로 옳았다. 그들이 놓쳤던 점, 당시의 지적 조건으로 보았을 땐 놓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은 입자 간 상호 작용의 성격, 그리고 발현성에 대한 이해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이 갖고 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이 현대 과학적 사고의 틀을 만들어 준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을 원자라고 표현했는데,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말과 불변하는 속성이 있다는 말은 거의 동치 관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이 어느 순간에 빨간 색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파란색으로 변하면 어색하지 않은가. 파란색 원자는 계속 파란색으로 남아야 하고 빨간색 원자는 천년만년이 지나도 빨간색이어야 원자답다.
물리학에서 불변성은 몇 가지 중요한 법칙으로 요약된다. 우선 총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리고 총 전하량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입자 불변의 법칙이란 건 없다. 쿼크는 현대 물리학에서 밝혀낸 기본 입자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일련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반쿼크로 변신할 수도 있다. 빛 알갱이는 하나의 전자와 하나의 반전자로 쪼개질 수 있다. 전자와 양성자가 충돌하면 빛이란 이름의 입자가 탄생한다. 입자 자체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입자와 입자의 충돌 원리를 지배하는 ‘법칙’만이 불변이다. 그런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철학보다는 오히려 요한 복음의 서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서 ‘말씀’을 ‘물리법칙’으로 대치하고, ‘하나님’을 ‘우주’로 대치한다면 더 정확하게 현대 물리학의 모습을 증언하지 않을까 싶다. 원자보다 더 근본적인 건 법칙이었고, 입자는 법칙에 따라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부수적인 존재다.
* 양성자와 중성자는 좀 더 기본 입자인 업쿼크와 다운쿼크로 만들어져있다. 원자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는 쿼크라는 존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를 양성자와 중성자라 부르기로 한다.
이제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그리는 원자란 게 무엇인가 한 번 정리해 보자. 우주에는 100여 종의 원자가 있다. 정확히는 109개의 원자가 있지만, 마지막 몇 개는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만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만들어도 금방 붕괴하기 때문에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로서의 구실은 하지 못한다. 원자라고 하면 수소, 헬륨, 탄소, 질소, 산소, 철,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원자를 구성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기본 입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불과 세 개뿐인데, 원자는 100여 가지나 존재한다. 주방엔 단 세 가지 재료밖에 없는데, 요리사는 100개가 넘는 요리를 만들어 낸다. 조리법은 참 간단하다. 1번 원자인 수소는 양성자 하나, 전자* 하나가 서로 뭉쳐 만들어진다. 10번 원자인 네온은 10개의 양성자를 10개의 전자가 둘러싼 형태다. 일반화를 해보면, N번 째 원자는 N개의 양성자를 N개의 전자가 둘러싼 형태이다.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갖고 있고, 전자는 음의 전하를 갖고 있다. 양의 전하와 음의 전하에게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 양성자를 회사를 설립한 창업자라고 생각해 보자. 다섯 명의 양성자가 의기투합해 새로운 벤처 회사를 차렸다. 각 창업자는 함께 일할 부하 직원을 한 명씩 데리고 온다. 인재는 다다익선이라 창업자마다 여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오려 하지만, 그걸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영입된 부하 직원들은 서로 경쟁한다. 음의 전하를 가진 전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힘으로 다른 전자를 견제하듯. 열 명의 창업자가 열 명의 부하 직원을 데리고 오면, 이젠 부하 직원들 사이의 밀어내기 경쟁이 너무 심해져서 더 이상 직원을 영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N명의 창업자가 N명의 직원을 고용했을 때 그 회사는 가장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그것이 바로 N번 째 원자의 상태다. 전문적인 용어를 쓰자면 양성자의 전하량과 전자의 전하량을 합한 알짜 전하량이 N+(-N)=N-N =0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외부에 전기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전기적 끄는 힘은 전하가 있는 물질만 행사할 수 있는데,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가 모이게 되면 총체적으론 더 이상 알짜 전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원자 주변에 새로 전자가 나타나도 그걸 영입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N개의 양성자와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복합체는 안정된 상태가 된다.
우주에는 정말 단 한 종류의 전자, 단 한 종류의 양성자밖에 없다.
우주는 순진하리만치 적은 가짓수의 재료만을 사용해 요리를 만드는 주방이다.
만약 레고 회사 제품을 하나 샀는데 개봉해 보니 부품 중에 불량품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걸 반품하고 그것과 ‘똑같은’ 제품을 새로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두 상품은 똑같을까. 아무리 똑같은 기계로 찍어낸 레고 블록이라고 해도 정말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다. 비록 미세한 차이라도 아주 약간의 무게 차이, 길이 차이, 색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차이가 소비자가 요구하는 기준보다 훨씬 작기만 하다면, 안심하고 같은 물건이라고 하며 소비자에게 팔 수 있다. 또한 같은 이름의 상품이라면 그걸 매장에서 샀건 인터넷 주문으로 샀건, 우린 똑같은 물건을 구매하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설령 사소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느끼지 못할 테니까.
이번엔 ‘우주’라는 회사가 조립한 ‘원자’라는 상품이 얼마나 신뢰성 있을까 생각해 보자. 내가 숨 쉬고 있는 산소 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산소 분자로 교체해 달라고 하는 게 의미 있을까. 아니다. 원자, 분자의 세계에선 반품이란 게 의미 없다. 모든 원자는 완벽하게 동일하고, 따라서 원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분자도 완벽하게 동일하다. 왜 모든 원자가 완벽하게 동일한가. 일단 그 원자를 구성하는 재료, 즉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가 우주 어디서 구해 왔던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양성자는 서로 동일하고, 모든 전자는 서로 똑같을까. 자연 법칙이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에서 발견된 전자의 질량과 안드로메다에서 발견된 전자의 질량이 서로 달랐다면, 은하계와 안드로메다의 물리 법칙은 서로 달라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매우 세속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에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게 어디 있어. 아주 조금씩은 차이가 나겠지”라는 쪽에 내기를 걸겠지만 어쩌겠는가. 우주에는 정말 단 한 종류의 전자, 단 한 종류의 양성자밖에 없다. 우주는 순진하리만치 적은 가짓수의 재료만을 사용해 요리를 만드는 주방이다.
이제 예리한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설령 재료가 완벽하게 똑같다 하더라도, 조리 방법에 따라 요리는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은 쌀포대에서 꺼낸 쌀이라도 씻고 익히는 방식이 다르면 밥맛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까 양성자 열 개, 전자 열 개를 모아 만든 네온 원자라도 만들 때마다 조금씩 다른 물건이 나오지 않겠는가?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던들, 그가 만든 열 개의 물건이 완벽하게 똑같을 리 없다. 하물며 원자란 건 누가 작업장에서 정성 들여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양성자와 전자와 중성자가 만나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자기 조립’ 물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서 가장 정밀한 복제품은 이렇게 누구의 손길도 거치지 않고 자기 조립 과정을 통해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거기엔 뭔가 대단한 비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알고 싶으면 우선 원자의 내부 구조를 조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비록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태양을 중심으로 원에 가까운 궤도 운동을 하는 지구와 그 밖의 행성이 있는 태양계를 생각하면 원자의 구조를 어느 정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를 열 개 가진 네온 원자에선 열 개의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서로 이리저리 도는 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우 작은 크기의 태양계쯤을 연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원자 하나의 크기는 대략 사람 키의 백억 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 많은 전자가 돌다 보면 서로 부딪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충돌해서 전자 하나가 원자 밖으로 튀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그럼 더 이상 똑같은 원자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또 다른 걱정이 있다. 같은 이름의 원자가 모두 완벽하게 동일하려면 원자핵 주변를 도는 전자의 궤도 또한 완벽하게 같아야 한다는 뜻일 텐데, 이건 마치 우리 태양계와 완벽하게 똑같은 제2, 제3의 태양계를 마음껏 복제할 수 있다는 주장과 유사하게 들린다. 자연은 어떻게 이런 완벽한 복제 기술을 갖게 되었을까.
그 답은 양자역학이 제공하는 자연의 디지털화에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씨디와 엘피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씨디는 음악의 정보를 0과1이란 숫자의 조합으로 변환한다. 0과 1사이엔 무수히 많은 다른 숫자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도 정보 저장에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0과 1이란 숫자의 배열로만 정보를 저장한다. 그러다 보니 씨디는 0.25, 0.872에 해당하는 정보는 저장하지 못하게 되고, 미묘한 음색의 차이까지는 살려내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편 엘피는 그런 미묘함이 허용된다는 이유 때문에 동일한 앨범 두 장을 사더라도 두 엘피판이 연주하는 음악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한쪽에서 0.872로 저장된 음이 다른 엘피판에선 0.873으로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성 들여 판을 제조한다고 해도 이런 미묘한 차이까지 모조리 제거해서 완벽한 복제판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런 까닭에, 만약 우리가 (혹은 창조주가) 저장하고 보존하려는 정보가 완벽히 재생, 재현 가능한 정보이어야만 한다면, 아날로그 방식 대신 0과 1이란 지극히 디지털적 저장 방식을 취할 수밖엔 없어 보인다.
양자역학이 그려낸 세계관에서 전자의 ‘궤도’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궤도라는 것을 도화지에 한 번 그리기는 쉽지만 똑같은 궤도를 두 번 다시 그리기는 어렵다. 궤도란 건 그래서 엘피판 비슷하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선 씨디만 판다. 양자역학은 원자핵 주변을 맴도는 전자들에게서 궤도란 개념을 빼앗는 대신 전자가 들어갈 방의 방번호란 걸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수소 원자핵을 맴도는 전자는 방번호 1000인 방에 들어간다. 헬륨 원자에 있는 두 개의 전자가 배정받은 방은 1000호실와 1001호실이다. 끝자리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두 방은 엄연히 다른 방이다. 리튬 원자에 등장하는 세 번째 전자는 2000호실에 투숙한다. 그다음 전자 손님이 갈 곳은 2001호다. 각 숫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만 비전문가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단지 중요한 건 모든 전자가 지정된 번호의 방에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전자도 방 두 개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무례를 범할 수 없고, 새로운 방을 멋대로 만들어 들어갈 수도 없다. 방 문턱에 걸터앉아 몸의 절반은 방 안에, 나머지 절반은 방 밖에 두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물질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한마디로 답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은 양자 물질이다.
이렇게 엄한 규칙이 있다 보니 원자를 복제하는 일이 참 쉬워진다. 방번호가 같은 곳에 전자 고객을 투숙하게만 하면 만사 끝이다. 물론 까다로운 독자라면, 같은 1001호라도 전자가 그 방의 거실에 있을 때랑, 침실에 있을 때랑 서로 다른 상태 아니냐,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헌법에 따르면 이 방에는 거실도, 침실도, 화장실도, 창문도 없다. 방은 단지 방일 뿐이고, 오직 그 방에 손님(전자)이 들어와 있느냐 없느냐는 이진법적인 구분만 허용된다. 자연이 그러하다. 우주에는 1조 개의 은하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어떤 은하계도 다른 은하계와 동일하지 않다. 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는 호텔과 같다. 호텔의 몇 번 몇 번 방에 손님이 들어왔는냐에 따라 그 호텔의 상태는 완벽하게 정의된다. 궤도라는 개념 대신 방번호(물리학에서는 방번호란 단어 대신 양자수란 말을 사용한다)로써 물질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진수다. 25세기에 걸친 물질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한마디로 답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은 양자 물질이다.’
과학자가 가장 슬퍼해야 할 때는 그가 했던 일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무의미할 때이다. 결론만 놓고 보면 거의 실패한 이론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티마이오스>는 최초의 물질 이론을 담은 책이라고 보기에 충분할 만큼 보석 같은 요소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플라톤적 사고의 진수를 하나 꼽으라면 필자는 그가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방법, 즉 엄밀한 수학적 결과를 자연 해석에 적용했다는 점을 들 것 같다. <티마이오스>에서 저지른 실수를 하나씩 교정해 나간 과정이 현대 물리학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화이트헤드 흉내 내기일까. 뒤늦게 돌이켜 보니 1987년의 벽두, 필자가 하이젠베르크의 ‘우연과 필연’을 읽고 난 뒤 <티마이오스>까지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필자의 아들이 대학 진입을 앞두고 백수 생활을 즐기는 2019년 벽두가 되어서야 비로소 <티마이오스> 독후감을 이렇게 제출한다. 컴퓨터 공학에 관심 있는 아들은 부분과 전체 대신 파이쏜과 자바를 즐겨 읽고 쓰는 것으로 겨울을 소일하는 중이다. 아들이 물리학자가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완벽한 복제란 양자 물질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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