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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정책, 과학기술 현 주소-성과 못내는 R&D
패스트팔로어 전략으로 반도체 등 성장토대 구축했지만
기초연구 투자 뒤처져 AI·빅데이터 등 신산업 中에 밀려
“R&D 기획·평가·관리방식 혁신해 4차혁명 뒷받침해야”
고(故) 송곡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은 지난 1966년 설립 초기 53명의 연구원을 미국 바텔연구소로 연수를 보낸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활동하던 인재였다. 이 중 세계 최고인 벨연구소 출신이 ‘왜 벨보다 떨어지는 바텔이냐’고 묻는다. 당시 미국 정부도 KIST의 자매결연처로 벨을 추천했다. 그는 “전문지식을 보강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장사하고 연구계획서를 써 기업에서 연구를 따오느냐를 배워야 한다”고 답한다. 기초연구부터 막대한 투자를 해 상품화하는 벨에 비해 기업 수탁연구 중심인 바텔로 연수를 보낸 배경이다. 송곡은 회고록에서 “KIST는 처음에 정부 감사를 받지 않고 자체 회계처리해 연구원의 행정 업무를 줄여줬다”며 “연구실별로 독자 운영해 저녁에도 연구실에 불이 꺼지지 않았고 돈방석에 앉은 연구실도 많았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과학기술 정부 출연 연구기관(25개)은 1950년대 원자력연구소 1개에서 1960년대 3개, 1970년대 10개로 늘어날 때까지 기초연구보다는 미국·일본 등의 연구를 참조한 응용·개발연구에 집중했다. 그 결과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서 선진기술을 국산화하고 국가전략기술을 확보해 1990년대 이후 반도체·휴대폰·전자·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 등에서 큰 성과를 달성했다.
선진기술 국산화에 본격 나서고 기초연구도 서서히 시작한 게 정부 출연연이 16개로 늘어난 1980년대부터다. 정부 출연연과 대학·기업 등에 지원하는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1964년 20억원에서 1997년 3조원 규모로 늘었고 내년에는 20조4,000억원으로 예정돼 있다. 민간의 자체 R&D 투자비까지 합치면 R&D 총액은 69조4,055억원(2016년)으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60~70%나 큰 프랑스·영국보다도 많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총액의 비중이 4.3% 가까이 돼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국가 R&D가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수준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 한국의 연구원 1인당 SCI 논문 수와 인용도, R&D 투자 대비 기술수출액 비중은 지난해 각각 33위와 29위였다. 연구기관의 질적 수준과 산학 연구협력 정도도 지난해 각각 32위와 27위에 그쳤다. 이는 투자 30여년 만에 이제서야 기초연구 성과가 싹을 틔우는 단계로 투자 대비 수출이 많지 않고 응용·개발연구도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7월 제1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우리 R&D가 투자 규모에 비해 성과가 미흡하다. 고비용·저효율 구조”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이 반도체를 제외하고 우리의 주력산업을 급속히 잠식한 것은 물론 인공지능·빅데이터·자율주행차·드론·로봇·바이오 등 신산업도 추월해 우리가 더 이상 패스트 팔로어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 창의적 연구를 통해 기초연구나 응용·개발연구 모두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하기 위한 환골탈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민형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기초연구가 ‘무늬만’ 기초연구가 아니라 선도적인 연구를 잘 다져 나가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혁신가치 창출의 기반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제조업 시대의 틀에 박힌 R&D에서 벗어나 취약한 서비스 R&D에도 역점을 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7조9,000억원을 쓴 정부 출연연의 경우 국가 중장기 연구과제보다 예산을 따기 위한 단기과제·현안에 매몰돼 국가 R&D를 선도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국내 대학들도 총 4조4,000억원의 연구비를 받았지만 영국 QS의 ‘2018 세계 대학 평가 학과별 순위’ 수학·생명과학 부문에서 세계 50위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허위 학술단체인 ‘와셋’ 사건이 최근 터졌을 때 국내 유명 대학교수나 출연연 연구원들이 적지 않게 참여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심지어 모 교수는 나랏돈으로 와셋에 22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4조5,000억원을 받는 중소·벤처기업 등 기업들이 ‘먼저 타내는 게 임자’라는 식으로 연구비를 눈먼 돈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한양대 석좌교수)은 “일부러 기업 과제 위주로 하는데 그동안 압축성장 과정에서 많이 훼손된 연구 자율성을 회복해야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다”며 “연구자 역시 와셋 사건에서 보듯이 연구윤리를 세우기 위한 특단의 자정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명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은 “연구자들이 자율성과 창의성을 갖고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R&D 기획·평가·관리 방식의 대혁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