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자연은 시계처럼 정확하다?

 


과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자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학교에서는 배운 모든 것을 시험을 통해 확인하고 과학 과목 대부분의 문제는 정확한 암기와 계산이 필수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만이 아니죠.
과학 다큐멘터리에서 DNA 이중나선구조가 갈라졌다가 각자 다른 DNA의 나선과 정확히 만나 새로운 DNA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실제 자연이 이렇게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정확히 움직이는 게 전부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이렇게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건 그동안 우리가 자연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이런 자연이여야 다루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이렇게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 쌍의 운동밖에 못 다루는 물리학을 넘어서


19세기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고전역학에서 서로 힘이 작용하는 대상이 세 개 이상이 되면 방정식의 정확한 해(solution)를 얻을 수 없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습니다(삼체문제).
고전역학에서 뉴턴 방정식을 풀어 예측할 수 있는 대상의 수는 정말 적습니다.
얼마나 적냐면, 서로 힘이 작용하는 물체가 두 개 이하일 때만 그들의 운동이 오차 없이 결정됩니다. 셋만 돼도 손을 쓸 수가 없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많은 소행성들이 도는 소행성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화성과 목성 사이의 궤도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지언정 소행성대를 도는 소행성들의 궤도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구성요소들이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목성과 화성 사이에는 크고 작은 소행성이 널려 있는 소행성대가 있습니다(NASA/JPL-Caltech)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우죠. 두 사람이 있다, 두 공이 있다, 균질할 리 없는 행성도  ‘질량중심(center of mass)’이라며 하나로 퉁치고…
사실 이렇게만 해도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은 문제없이 정확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뉴턴역학이 고전역학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한 이유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과학이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개척해왔고, 세계관을 바꿔왔으며, 그런 만큼 다른 눈으로 자연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구성요소가 아주 많은 세상, 질서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세상을 설명하고픈 생각이 드는 거죠.
그렇게 해서 물리학은 19세기 시작된 열역학(통계역학)에서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의 싹을 틔우고, 최근에는 복잡계 과학으로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변화는 끝이 없네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엿보고 싶다


고전역학, 전자기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미시 동역학 이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미시’란 원자처럼 작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은 수, 간단한 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동역학’이란 물체의 운동에 대한 역학이고요.
지금까지 계속 설명했듯이 미시동역학은 잘 선택된 대상들만 정확히 기술할 수 있고, 그 밖의 것은 기술할 수 없습니다.
구성요소는 많지 않지만 선형성(직선을 생각하면 됩니다. 예측이 가능하죠)이 아니라 비선형성(막 아무렇게 그은 곡선 같은 걸 생각하면 됩니다. 예측할 수 없습니다)을 보이는 것,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수많은 입자집단도 설명할 수 없죠. 이들의 운동을 설명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죠?

구성원이 너무 많은 세상을 해석하는 물리학
그 도구로 우선 열역학이 있습니다. ‘열’을 다루는 물리학이죠.
우리는 예전부터 열을 이용해 많은 것을 이뤄왔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 선구자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 그리고 절대온도의 단위인 ‘켈빈’의 주인공인 윌리엄 톰슨, 열량의 단위 ‘줄’의 장본인인 제임스 줄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샤를과 보일, 또 아보가드로는 기체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이들의 연구가 집대성된 법칙이 이상기체 상태방정식(PV=nRT)입니다.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라부아지에와 그 부인입니다. 세금징수원이 본업이었다는 라부아지에는 안타깝게도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열에서 왜 갑자기 기체를 말하는 걸까요?
열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분자 입자들이 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활발하게 움직이면 팽창하거나 뜨거워지고, 굼뜨게 운동하면 쪼그라들거나 차가워지죠. 이런 기체의 상태가 열을 아주 잘 설명해줍니다.
열이라고 해서 오해하실까 부연하자면 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 기준으로 ‘뜨거운’ 것만 열이 아닙니다. 절대영도(섭씨 영하 273도) 이상이면 ‘열’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온도 이상이어야 원자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자가 움직일 수 있으면 ‘열’이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들의 운동을 기술하려면 평균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기체의 분자 입자 하나하나를 따라갈 수 없고 너무 많으니 꼭 필요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과학자들은 열역학이라는, 개개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집단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도구 하나를 만들어내죠. 그리고 20세기 들어 또다른 세계를 설명할 도구가 등장합니다.

 

서로 정신없이 상호작용을 거듭하는 기체들의 운동은 개별적으로 다루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열역학이 등장했고요.

질서가 드러나지 않는 세상


복잡계란 말 들어보셨죠? 이 영역은 질서와 혼돈(무질서 또는 카오스) 사이에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상호작용하는 구성요소가 매우 많은 집단, 선형적 현상이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한 비선형적 현상이 일어나는 집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집단에서는 질서를 찾기가 힘듭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질서가 있었지만, 아주 많은 요소들이 서로서로 상호작용의 상호작용의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질서는 점차 사라지고 예측이 불가능한 무질서한 혼돈으로 들어서죠.
그래서 복잡계를 혼돈의 가장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완전한 질서도 아니며 완전한 무질서인 혼돈으로 들어서기 직전까지의 영역이라는 의미에서요.

 

 

부분을 확대해도 전체 모양과 닮아 있는 모양을 프랙털이라고 합니다. 복잡계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브로콜리나 해안선 등 우리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저 복잡하게만 보였는데 내부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혼돈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는요.

이 영역이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아주 다양한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상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생명현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생명현상은 세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구성요소가 매우 많고, 상호작용도 예측이 불가능한 비선형적이라는 점 등 복잡계의 여러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회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호작용하는 구성요소가 매우 많고, 상호작용이 비선형적인 복잡계입니다.
표현이 복잡해서 그렇지 주위에서 흔하고 흔한 현상들이 복잡계에 해당합니다.  물이 끓는 과정, 수많은 가루들의 움직임, 경제발전이나 경제공황 발생, 지진이나 산불 발생, 인간관계 등 예전에는 이게 과학의 영역인가 싶은 것들까지 복잡계의 특성을 보입니다.
복잡계 과학은 이런 현상들의 엄청난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데이터들을 모을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큽니다.
슈퍼 컴퓨터 같은 거 말입니다. 덕분에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걸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물리학이 생명현상과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사회물리학이라는 물리학의 한 분야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많은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합니다. 이들이 막 불어대면 소음이고 무질서지만, 어우러지는 음악을 연주하면 복잡계가 됩니다.

1에 1을 더했더니 2보다 커졌다?


창발성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복잡계 과학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현상입니다.
고전역학 등 미시동역학적 관점으로 보면 1+1=2입니다. 전체를 나누면 부분이 되고, 그 부분을 더하면 정확히 다시 전체가 됩니다. 환원론이라고 하죠.
하지만 복잡계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1+1이 꼭 2라는 법이 없습니다. 더 클 수 있습니다. 부분 부분을 다 이해한다고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단백질의 모임이었던 유기체에서 생명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유기체는 단백질의 모임이지만 단백질을 그냥 모아놓는다고 생명이 되는 건 아니죠?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이게 바로 창발현상입니다.

 

네트워크 역시 복잡계입니다. 특히 멱법칙을 따르는 네트워크는 복잡계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큰 건 수가 적고 작은 건 수가 많다’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불빛이 환한 대도시는 그 수가 적고 그렇지 않은 도시는 점점 그 수가 많아집니다.

 

복잡계 과학은 세상을 미시적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환원적이 아니라 전일적으로 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예전에는 물리학의 영역이 아니었던 생명, 인간의 뇌, 경제 시스템, 인터넷 네트워크, 생태계, 기후체계, 자연재해 등 다양한 현상을 보편적인 원리와 법칙으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측도 할 수 있게 되겠죠?
복잡계 과학은 아직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학문이지만, 이렇게 우리 삶과 연관된 대상이나 현상을 다루므로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그동안 잘 짜인 대상만 다뤄오면서 질서정연한 세계를 진리라 생각하고 그런 세계만 지향하는 가치관도 극복해 세상을 좀더 다양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뉴턴, 과학혁명의 첫 번째 센터


드디어 뉴턴이 등장합니다. 과학사는 뉴턴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뉴턴은 과학사에 큰 획을 긋습니다. 연금술에 빠져 있긴 했지만, 진정한 전문 과학자였고 과학법칙을 본격적으로 수학으로 표현했으며 무엇보다 인류의 세계관을 크게 바꿨습니다. 뉴턴 덕분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 현대의 과학이 등장할 수 있었죠.
과학의 역사에서 뉴턴의 물리학이 등장하기 전 인간의 과학은 지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때 이미 1,000년 전에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과 우주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땅 위의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물체가 지구의 중심, 즉 우주의 중심으로 향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어디에서나 만족하는 보편적인 지식이었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논리학》

 

모든 물체가 떨어진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지구상에서 물체는 왜 아래로 떨어지죠? 지구의 중력 때문이죠?
지구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우주 공간에서는요? 어디로도 떨어지지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중력을 따라 움직일 뿐이죠.
보편적 이론이 되려면 이 두 현상을 동시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뉴턴이 해낸 건 이 두 현상을 동시에 제대로 설명하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 수식으로 정리한 겁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고전역학의 시작


시작은 이렇습니다.
뉴턴 이전 갈릴레이는 사고실험을 통해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정반대로 뒤집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등속운동을 계속한다.”
이게 바로 관성의 법칙입니다.
같은 걸 보면서도 정반대의 원리를 생각해내다니 그 상상력이 정말 놀랍지 않으세요?
이어 뉴턴은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수정합니다.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가속도는 0이다.”
이것이 바로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1법칙입니다.
갈릴레이의 ‘영향’을 ‘힘’으로, 갈릴레이의 ‘등속운동’을 ‘가속도가 0’이라는 개념으로 수량화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겁니다. 다시 말해 그냥 물체가 정지하려고 한다, 또는 속도를 유지하려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수식으로 계산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 거죠.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제2법칙이 도출됩니다.

F는 힘, m은 질량, a는 가속도입니다.
이 식의 핵심은 바로 힘과 가속도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식에 따르면 가해지는 힘이 클수록 변화하는 속도도 큽니다.
서로 비례관계에 있다고 하죠? 많이 먹을수록 무거워지고, 오래 공부할수록 성적은 오르고, 오래 일할수록 돈도 많이 벌고…
네네… 인생은 그렇게 녹록지 않죠…
가운데 있는 m은 비례상수라고 하는데요, 힘과 가속도를 ‘같다’는 의미의 ‘=’으로 연결하기 위해 고민 끝에 찾아낸 양입니다.
과연… 무거운 물체일수록 가속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힘을 더 줘야 한다거나, 똑같은 힘을 줘도 가속도를 변화시키기 더 힘들거나 하는 상황은 쉽게 상상이 가지요?
이 방정식은 세상과 우리의 미래를 환하게 밝힙니다.
이제 인간은 이 방정식을 이용해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그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측정한 후 이 방정식에 대입해 풀면 그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언제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죠.
인류는 이로써 자연을 자기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엄청난 도구를 손에 쥐게 됩니다.
또 이때부터 인류는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자연을 자기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집니다.

 

 

하늘의 운동과 땅의 운동을 통합시킨 뉴턴 


뉴턴이 이룩한 또 하나의 거대한 혁명은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입니다. 질량을 가진 두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법칙이죠.
여기서 질량을 가진 두 물체란 지구상에서의 물체만도, 지구 밖 우주에서의 물체만도 아닙니다. 전 우주에 걸쳐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를 말합니다.
이제 하늘에는 하늘의 운동법칙이, 땅에는 땅의 운동법칙이 따로 따로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무너집니다. 인간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체들의 운동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게다가 뉴턴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멋지게 수식으로 표현했지요.
덧붙이자면, 검증된 과학의 조건 중 하나가 완벽하게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전 우주의 보편언어인 수학 용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우주적 객관성과 보편성이 보증되기 때문이죠.
뉴턴의 위대한 점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뉴턴은 자연의 진리를 본격적으로 수학용어로 표현한 과학자입니다. 변화하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까지 발명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요(재미있게도 뉴턴과 거의 동시에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도 미적분을 발명합니다).

뉴턴이 수식으로 표현한 만유인력 법칙입니다. 질량이 각각 m과 M인 두 물체가 서로 거리 r만큼 떨어져 있을 때 서로에게 작용하는 힘을 나타낸 겁니다.
가운데 있는 G는 중력상수라고 합니다. 6.673×10^-11 Nm^2/kg^2이라는 말도 안 되게 작은 값입니다. 이것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게 중력은 정말 작은 힘이라는 겁니다.
그 질량이 거대한 태양이나 그것보다 더 큰 천체, 하다못해 달이나 지구 정도는 돼야 중력의 영향을 느낄 수 있죠. 그런데 직접 느끼는 게 불가능한 이런 힘을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내다니… 정말이지… 너무나 놀랍습니다.
중력은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뉴턴의 ‘발명’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천체들이 서로 돌고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들을 고민하고 종합해 창작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걸 보면 과학자들은 발견자라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과학자에게도 상상력과 통찰력이 정말 중요하겠죠?

 

아이작 뉴턴

 

고민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뉴턴의 물리학(뉴턴역학, 고전역학이라고도 합니다)은 유럽인들이 1,000년에 걸쳐 자신들을 지배했던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과학의 왕좌를 차지했고,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쥐었음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건 없죠. 뉴턴의 물리학은 자체로 문제를 갖고 있었고, 이것은 다음 ‘혁명’을 위한 씨앗이 되어줍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요,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무엇이, 어떻게 만유인력이 작용하도록 하는 걸까요?
뉴턴도 그의 책에서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듯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되면서 만유인력에 대한 그림이 전혀 달라집니다.
둘째 세계는 마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모든 운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죠? 이 사고방식은 세상만사의 예측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없는 걸까요? 우리는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요? 이 역시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이나 카오스가 등장한 현대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죠.
셋째 뉴턴역학은 복잡성을 갖는 대상에는 정확하게 적용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만유인력을 비롯해 모든 상호작용은 한 쌍(2개)의 물체의 관계만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지, 세 물체가 동시에 힘을 주고받는 상황을 기술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세 개 이상이라서 전체를 기술할 수 없는 상황을 ‘복잡하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2개만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보다는 그 이상의 경우가 훨씬 많지 않겠어요? 뉴턴의 운동법칙 바깥에 있는 이 관계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 실마리라도 잡으려면 300년 후 열역학과 복잡계 과학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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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 아닌가…?


19세기 말 물리학은 더 이상 이룰 게 없어 보였습니다. 몇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곧 풀려서 자연에 관한 궁금증은 모두 사라질 거라 기대했죠.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곧 풀릴 거라 기대했던 문제들이 그때까지의 주류 물리학인 뉴턴역학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폭탄이 된 겁니다.
그런데 남겨진 골치 아픈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모두 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정말이지… 대단히 수수께끼 같은 빛이지 말입니다.

 

 

 

완성은 모순을 품고서…

 


첫째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에서 모호한 점이 있었습니다.
전자기파의 속력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보통 속력이라 함은 무언가 정지해 있는 기준에 대한 상대적인 값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시속 20킬로미터로 뛴다고 하면 정지한 땅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속력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우주에 절대적으로 정지해 있다고 할만한 것이 있을까요? 빛의 속력이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우주의 무엇에 대한 속력을 말하는 걸까요? 더욱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서, 매질도 없이 전자기파는 어떻게 전파해 나가는 걸까요?
이 문제들은 현대물리학의 기둥 중 하나인 상대성이론의 도화선이 됩니다.
둘째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이미 잘 정리돼 있는 파동이론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하고 기존의 파동이론을 적용시켜봤습니다(물리적으로 물질은 둘 중 하나죠. 파동 아니면 입자입니다. 파동은 물결, 소리… 생각하면 되겠네요. 입자는 흔하죠? 한 개 두 개 셀 수 있는… 그런 거요~ 파동도 희귀한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실험을 해보면 이론값과 실험값이 잘 맞지를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확고했던 빛의 파동성에 균열을 암시하며 20세기 벽두에 양자역학의 탄생을 이끕니다.
이렇듯 완성된 듯 보여 물리학자들이 의기양양해 있던 시절, 고전물리학은 가장 큰 문제와 맞닥트립니다.
미션의 끝판왕은 뉴턴 ‘판’에서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기존 판을 깨지 않으면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지요.
상대성이론의 선구자, 갈릴레이
사실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 이전에 선구자가 있습니다.
보통은 앞뒤 잘라먹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해낸 것처럼 생각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겠죠? 아인슈타인에게도 뉴턴처럼 위대한 선배님들이 계셨고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살을 붙이고 정리해 화룡점정을 찍기까지의 사고과정 자체가 인간의 직관을 벗어나다보니, 어찌 이런 생각을….! 역시 천재다! 감탄사가 나오는 거죠.
1632년 갈릴레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원리를 《두 개의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에서 밝혀놓았습니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라고도 하는데요, 전문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관성계는 물리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서 관성계란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이는 관찰자를 가리킵니다. 핵심은 일정한 속력에 있습니다. 등속운동 말입니다. 등속운동에는 정지해 있는 것도 포함되지요? 속력이 0으로 일정하니까요.
상대성원리의 의미는 이런 겁니다. 서로 상대적으로 등속운동을 하고 있는 두 관찰자가 있다면 이들에게는 물리적으로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둘은 서로서로에게 자신은 정지해 있는데 상대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누가 진짜로 움직이는지 기준 같은 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땅 위에 서서 공을 던지면 직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직선을 그리며 내 손바닥 위로 떨어지죠? 그럼 (거의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요? 나는 버스와 함께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공은 왠지 달리는 저를 못 쫓아올 것 같나요? 그래서 내 뒤로 떨어질 것 같나요?
아니죠?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공을 던지며 놀고 있는 사람에게도 공은 직선을 그리며 떨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원리’라는 이름까지 붙은 데는 사실 사연이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니, 천동설 주장자들 쪽에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데 왜 공을 위로 던진 후에 뒤쪽으로 떨어지지 않느냐고요.
이 의문에 대한 갈릴레이의 대답이 바로 관성계였습니다. 지동설의 기본 전제였던 거죠.
거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에서는 정지해 있는 곳에서의 운동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에 뒤로 떨어지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시속 10킬로미터로 움직이는 배에 영수가 타고 있습니다. 그때 호수 위로 한 마리의 물새가 시속 40킬로미터로 날며 영수의 배 옆으로 스쳐지나갔고, 영수와 영희가 동시에 그 새의 속력을 측정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냥 서 있는 영희가 측정한 새의 속력은 시속 40킬로미터지만 영수가 측정한 결과는 자신의 속력 10킬로미터를 뺀 만큼인 시속 30킬로미터입니다. 영수와 영희가 똑같은 새의 속력을 측정한 결과가 다르죠?
영수와 영희의 상대속도인 시속 10킬로미터만큼의 차이가 생겼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상대성원리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앞서도 말했지만 빛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 문제들은 뉴턴 물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심각한 문제였죠.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등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사상서를 읽으며 의심 많은 과학자가 되었죠. 의심이 없으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고 홍대용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아인슈타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1887년 실패했는데 노벨상을 받은 아주 유명한 실험,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진행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이 파동을 전달할 매질이 있을 테니… 빛의 매질을 찾자! 도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이름부터 붙여봅니다. 에테르라고요.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이 에테르를 찾으려 한 실험이었죠. 하지만 아무리 실험을 진행해도 에테르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에테르를 찾으려고 진행했던 실험이 오히려 에테르가 없음을 반증하여 20년 후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습니다.

 

 

에테르가 있다면 그림과 같은 실험장치가 만드는 빛의 간섭현상(파동의 중요한 성질입니다)과 이 장치를 90도로 회전시킨 후 빛이 만들어내는 간섭현상은 다를 겁니다. 방향이 달라지니 속도가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돌려도 간섭무늬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속도가 달라질 에테르란 물질 자체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에테르를 포기하기 전, 아인슈타인은 이미 에테르가 없음을 확신합니다.
빛은 매질을 통해 이동하는 파동이 아니라 매질 없이 공간 자체를 타고 이동하는 파동이 아닐까 생각한 거죠. 그리고 아주 대담한 가정을 합니다.
빛의 속력은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같다.
아인슈타인은 앞서 소개한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도약시킵니다.
보통은 빛의 속력 자체도 못 느끼는데… 세상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항상 같은 속력이 있다니요.
상상이 잘 안 갑니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모든 관성계는 물리적으로 동일하다.
갈릴레이의 가정과 같습니다. 
◆ 빛의 속력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새로운 가정입니다.

아까 배에 탄 영수와 밖에 서 있는 영희가 날아가는 물새의 속력을 재는 사고실험을 해봤죠?
영수와 영희의 상대속도의 차이만큼 둘이 측정한 새의 속력은 차이가 났습니다.
만약 날아가는 새가 빛이라고 한다면,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누가 어떤 상황에서 측정해도 새의 속력은 모두 같은 겁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요.
아인슈타인은 1905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논문으로 발표합니다. 드디어 
특수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나온 것이죠. 그런데 잠깐, 왜 ‘특수’일까요?
특수상대성이론은 일정한 속력, 즉 
등속도(가속도가 0인 경우)로 상대운동하는 두 관찰자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서로 ‘가속도’로 상대운동하는 경우로 일반화시킨 것이고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시간과 공간
아무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와 가정부터가 다르다보니 결과도 달라집니다. 빛의 속도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같다는 가정 아래 세상을 관찰하면 그전까지 불변이었던 시간과 공간이 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현상이라도 정지한 관찰자와 운동하는 관찰자에게 동시에 벌어지지 않는 동시성 붕괴나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관찰자의 시간이 더 천천히 간다는 시간지연 현상,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짧아지는 길이수축 등 이전까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바뀌지 않는 건 오로지 빛의 속력뿐이네요. 인류는 세상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라지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해석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이제 우리는 그저 주어진 줄 알았던 배경 같은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역할이 바뀌기도 하는 마치 배우 같은 시간과 공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된 거죠.

 

 

달리는 기차 정가운데서 빛을 양쪽으로 보내는 실험을 합니다. 기차 안에서는 왼쪽 그림처럼 동시에 양쪽에 닿겠죠. 하지만 바깥에 정지해 있는 사람이 볼 때는 기차가 진행하기 때문에 동시에 닿지 않습니다. 똑같은 현상임에도 운동하는 관찰자와 정지한 관찰자에게는 동시에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를 동시성의 붕괴라고 합니다.

 

직관으로는 닿을 수 없는 세계
상대성이론…. 정말 어렵죠? 왜일까요? 수학적으로 이해하고 풀이하는 게 어려워서요? 물론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상대성이론이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너무나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력이 누구에게나 같다는 건 그렇다 치고, 똑같은 것을 관찰하는 데도 움직이는 사람과 정지한 사람에게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거나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이 더 천천히 간다거나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짧아진다는 길이수축 등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나요? 시간과 공간이 동등하고 서로 변환 가능하다는 사실은 또 어떻고요? 상상이 가나요?
게다가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운동할 때만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빛의 속력인 초속 30만 킬로미터는 지금의 기술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르기입니다. 지금 제일 빠른 교통수단인 우주선도 이에 비하면 정지상태입니다.
이 세계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으니 직관의 영역이 아니죠.
하지만 인간은 그동안 선구자들이 쌓아온 과학 지식과 수학이라는 도구와 철학과 문학 등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으며 통찰력을 끌어낸, 의심 많은 뛰어난 과학자들 덕분에 실제로는 경험할 수도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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