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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의 물방울’에는 교통사고를 당해 수년 째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던 남자가 사고 직전 사랑하는 사람과 마셨던 와인의 향을 느끼고 의식을 되찾는 장면이 나온다. 만화적 과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후각이 우리의 뇌를 강렬히 깨우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낯선 외지에서 마주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서 어릴 적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길을 가다 문득 느껴지는 샴푸 향에서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퇴근길 지하철역을 종종 걸음으로 걷다가 역 안 빵집의 고소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기도 한다.
필자는 군대 냄새에 대한 기억이 있다.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할 때 모래 냄새와 땀 냄새, 녹슨 쇠 냄새 등이 합쳐진 듯한 묘한 군 부대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는데, 제대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비슷한 냄새를 감지하면 갑자기 그날 그 자리에 다시 선 느낌이 든다. 이왕이면 꽃다발의 향기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오르는 낭만적 경험이 있으면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 듯 하다.
◇ 냄새까지 느끼는 가상 세계를 향해
인간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원초적 감각인 후각을 활용하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이뤄져 왔다. 매장에 구매를 부추기는 기분 좋은 향을 뿌려 놓는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후각은 시청각 미디어와는 달리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용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최근 후각, 촉각 등의 감각을 재현하고 활용하는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실제와 똑같은 수준의 가상 경험을 제공하려는 가상현실 (VR), 증강현실 (AR)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VR은 사용자가 디지털 기술로 구축된 가상의 세계를 느끼며 체험하게 한다. 전용 헤드셋 등 장비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AR은 현실 세계를 비추는 영상 위에 다양한 디지털 정보를 부가하는 형태다. 스마트폰으로 건물을 비추면 그 건물에 있는 식당의 정보를 알려주고, 외국에서 교통 표지판을 비추면 우리 말로 번역해 주는 식이다. VR이나 AR처럼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콘텐츠는 교육 및 훈련, 게임, 엔터테인먼트, 의료 및 산업 현장에 전에 없는 변화를 일으킬 전망이다.
VR과 AR은 모두 가능한 한 사용자가 몰입된 상태에서 생생한 체험을 통해 정보를 얻도록 돕는다. 이들 기술은 지금까지 시각과 청각 측면에서 콘텐츠 품질 향상에 주력해 왔다. 예컨대 픽셀이 깨져 보이는 가상현실이라면 당연히 현실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정한 몰입 경험을 느끼게 하려면 사용자의 오감을 모두 자극해야 하고, 이는 후각이나 촉각 체험에 대한 연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위해요소감지BNT연구단의 권오석 박사는 까다로운 인간 후각을 실제와 거의 근접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단은 냄새 물질과 선택적으로 결합하는 단백질인 후각 수용체를 대장균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한 뒤, 실리콘보다 전기 전도성이 우수한 그래핀 소재 트랜지스터에 끼워 넣은 나노바이오 센서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고감응성 인공 후각은 극미량의 생체 물질을 실시간으로, 고민감도로 분석할 수 있다.
이 연구성과는 일차적으로 인체에 해를 끼치는 유독물질을 냄새로 감지해 질병을 감지하거나 특정 물질을 가려내는 데 응용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전자코를 이용해 인간이 느끼는 후각을 코드화함으로써 VR과 AR 같은 가상현실 기기에 접목한다면 인간이 향기롭게 느끼는 후각 속성을 재현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몰입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래핀 소재 기반 고감응성 다중 냄새분자 나노 바이오 전자코 제조 모식도. 그래핀 소재를 사용한 표준적인 반도체 제작 공법에 후각 수용체를 접목한다.
◇ 원하는 냄새를 더 정확히 그대 코에
촉각은 일찍이 휴대폰에서 진동을 느끼는 햅틱 기술을 비롯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이폰은 실제 버튼이 없음에도 손을 대면 버튼을 누르는 느낌을 재현해 준다. 이제 후각 체험도 오감 인식 멀티미디어 퍼즐의 마지막 조각 중 하나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후각 바이오 정보를 인식하고 저장하는 한편, 이를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기술이 미래의 과제다. 이른바 ‘후각 디스플레이’다. 향을 조합해 스마트폰 등의 기기를 통해 발산하게 함으로써 사용자가 냄새를 느끼게 하는 식이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할 때 모바일 기기에 달린 초소형 발향 장치에서 기분 좋은 향이 난다면 어떨까? 스마트폰 사용자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아로마 테라피가 가능하다면? 삼성전자는 미국 샌디에고대학 연구진과 함께 1만 가지 향기가 나는 TV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고, 일본 게이오대학은 향기가 나는 미립자를 용지에 뿌리는 방식으로 향기 프린터를 만들기도 했다. 레몬 향을 보고서에 입힐 수 있다는 얘기다.
사용자와 가까이 위치한 모바일 기기를 넘어 일상 공간에 후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원하는 냄새를 자연스럽게 공간에 퍼지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냄새를 원하는 시점에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다. 팬이나 송풍기 등을 사용한 기류 기반 방식은 카트리지에 저장된 냄새를 팬으로 내보낸다. 소용돌이 형태의 냄새 공기를 생성해 사용자의 코에 가깝게 보내는 에어 캐논 방식은 보다 정확히 냄새를 전달할 수 있다. 바닷가, 버터빵, 에스프레소 커피 등 7가지 종류의 향기 캡슐에서 향 분자를 공기로 내보내는 후각 알림 시계가 출시되기도 했다.
VR 엔터테인먼트는 시각을 넘어 후각까지 구현해 오감을 모두 구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출차: shutterstock)
정부의 나노기술 로드맵에도 후각 등 인간의 오감까지 만족하는 신개념 가상현실 기술이 포함됐다. 정부는 미래 나노 기술 개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국가나노기술지도’를 5년마다 만들어 왔는데, 최근 발표된 3기 지도에서는 나노 기술에 기반한 후각, 촉각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 신개념 가상현실 소자의 개발이 과제 중 하나로 꼽혔다. 사용자가 냄새와 촉감을 더 생생하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맛있는 음식 사진을 찍어 공유하는 것이 일상적 풍경으로 자리 잡는 가운데, 앞으로는 나노 가상현실 소자에 힘입어 스마트폰에서 음식 사진을 보기만 할 뿐 아니라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스마트폰 맛집 기행이다.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영상 이미지를 인식해 그에 맞는 향을 내보내는 후각 이미지 인식 기반 발향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발향과 관련된 이미지를 수집한 뒤 이를 분류한다. 그 뒤 특정 영상이 입력되면 이미지를 인식해 발향 콘텐츠로 변환한 뒤 이미 장착해놓은 발향 카트리지에서 자동으로 향이 생성, 발향된다. 현재 기술로 커피, 오렌지, 장미 등의 향을 자동으로 내보낼 수 있다.
원하는 순간, 원하는 냄새를 정확히 느끼게 하는 완전한 후각 미디어 구현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시간에 맞춰 냄새를 전달하고, 다른 냄새를 전달하기 전에 먼저 제공됐던 향기는 사라지게 하는 등의 섬세한 과정은 아직 구현되지 못 했다. 냄새는 보통 시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과 함께 환기되는 특성을 갖고 있는데, 냄새의 전달을 시청각 콘텐츠와 동기화시키는 기술도 필요하다. 이 같은 활용을 가능케 할 후각 인터페이스 표준화도 아직 진행 중이다.
사람들은 꾸준히 디지털 세계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왔고, 그 세상은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각, 청각뿐 아니라 촉각, 나아가 후각까지 정교하게 체험할 수 있는 보다 생생한 가상 경험을 향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