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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논어의 글에 영감을 받아 그리고 글을 썼다. 최근 국내 연구팀이 추운 환경에 식물이 저항하는 비밀을 밝혀냈다. 세한도는 국보 180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논어 자한의 글에 영감을 받아 추사가 그리고 글을 쓴 세한도(歲寒圖).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무의 생존력을 군자의 지조에 빗대었다. 거친 듯한 그림보다, 비어 있는 주변의 여백이 주는 존재감이 압도적인 그림이다.
나무 등 식물이 추위에 견디는 풍경은 익숙하지만, 그 원리는 단순하지 않다. 최근 추위에 노출된 식물이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생존하는 비결이 국내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 냉해 등 재해에 잘 견디는 작물 개발에 도움이 되리란 기대다.
박정훈 건국대 의생명공학과 박사팀은 식물이 추위에 노출될 때 발현되는 호스15(HOS15)라는 단백질이 추위를 견디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21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세포 속 핵의 DNA가 꽁꽁 뭉쳐 있는 구조에 주목했다. DNA는 워낙 길고 가는 구조라 마치 실패처럼 생긴 단백질(히스톤)에 돌돌 말린 채 세포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런 밀집 구조를 염색질(크로마틴)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정 환경이 되면 ‘단백질 실패’에서 DNA가 일부 풀리면서 각종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활성이 시작된다.
DNA 한 가닥이 염색체(오른쪽)이 되기까지. 중간에 실패 모양의 히스톤 단백질에 DNA가 감기고 이후 이 실패가 채곡채곡 쌓이는 모습이 보인다. 이 구조를 염색질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위키미디어
연구팀은 호스15 단백질이 이렇게 단백질 실패의 구조를 바꾸는 핵심 열쇠라고 보고 연구했다. 실제로 호스 15는 평소에는 ‘히스톤탈아세틸화효소’라는 단백질과 결합한 채 ‘구속’돼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염색질은 실패에 꽁꽁 뭉쳐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DNA도 꽁꽁 뭉쳐 있어 유전자의 스위치도 꺼져 있었다.
그런데 추워지자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호스15와 결합하면서 히스톤탈아세틸화효소를 분해했다. 이어 여러 단백질의 연쇄작용을 거쳐 염색질이 실패에서 느슨하게 풀려났고,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질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추위에 견디는 유전자들의 집합인 코르(COR) 역시 스위치가 켜지면서 활성화됐고, 식물은 냉해에 견딜 수 있는 상태가 됐다.
평상시(22도씨)에는 생존률에 차이가 없으나, 추워지면 호스15(HOS15) 단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돌연변이체의 생존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사진 제공 한국연구재단
연구팀은 미국 퍼듀대의 식물 실험시설에서 모델 식물인 애기장대로 이 사실을 실험으로 검증했다. 호스15 단백질이 없는 돌연변이 애기장대를 만든 뒤 추운 환경에서 7일간 키운 결과, 영하 4도만 돼도 생존률이 30%대로 확 떨어졌고, 영하 6도에서는 거의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면 호스15를 지닌 식물은 영하 4도에서도 절반 이상 살아남았고, 일부는 영하 6도에서도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연구 총 책임자인 윤대진 건국대 의생명공학과 교수는 “식물이 환경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염색질 구조가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며 “추운 지역에서 다양한 작물을 키울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