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적지 않은 민간기업 연구소들이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배출하는 대열에 합류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곳은 바로 벨 연구소(Bell Labs.)이다. 벨 연구소 출신으로서 노벨과학상을 받은 과학기술자가 벌써 10명을 훨씬 넘었을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사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발명과 연구가 벨 연구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즉 20세기 최고의 발명으로 꼽히는 트랜지스터와 CCD(Charge Coupled Device, 전하결합소자) 등 오늘날의 IT 혁명 시대를 이끄는 핵심 발명품에서부터, 우주배경복사의 발견과 같은 순수 물리학, 천문학적 업적에 이르기까지, 기초과학 및 응용 분야의 너른 영역에 걸쳐서 벨 연구소 출신의 연구원들은 수많은 공헌을 해왔다. 이처럼 벨 연구소가 배출한 노벨과학상에 대해 살펴보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지닐 듯싶다.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숱한 전자제품과 기술에 빠짐없이 사용되는 트랜지스터(Transistor)는 쇼클리(William Shockley), 바딘(John Bardeen), 브래튼(Walter Brattain)의 세 명의 물리학자가 1947년에 공동으로 발명하였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물론 전기전자공학, IT 기술의 발전 등에 있어서 막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기술적, 공학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세 명의 물리학자는 모두 고체물리학, 반도체 물리학의 대가로서, 기초과학인 물리학적 지식과 실험 능력 등을 바탕으로 발명을 완성한 것이다. 또한 뉴턴 시대의 물리학인 고전역학적 관점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했던, 퍼텐셜 장벽을 뛰어넘는 양자역학적인 터널링 효과가 트랜지스터에 의해서 실증적으로 잘 입증이 되는 등, 물리학의 관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요한 발명을 공동으로 완성한 독특한 사례를 남긴 세 사람은 1956년도 노벨물리학상을 역시 공동으로 수상한 바 있다.
2009년도 노벨물리학상은 CCD를 개발한 두 명의 물리학자인 윌러드 보일(Willard Sterling Boyle)과 조지 스미스(George Elwood Smith), 그리고 광섬유를 개발한 전기공학자 찰스 가오(Charles Kun Kao)에게 돌아갔다. 보일과 스미스는 벨 연구소 재직 당시인 1969년에 공동으로 CCD를 발명했는데, 이 역시 트랜지스터처럼 기초과학 및 응용기술의 양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CCD는 빛이 물질에 닿았을 때 전자를 방출하는 현상을 활용하여 빛을 전기신호로 전환하여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 냄으로써, 디지털카메라, 비디오, 내시경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이는 바로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업적인 광전효과(光電效果)를 이용하여 광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어줄 수 있는 것이다.
벨 연구소가 낳은 발명품인 트랜지스터와 CCD가 인류에게 중요한 문명의 이기를 선사했다면, 우리 일상생활과는 비교적 관련이 멀어 보이는 이론물리학, 우주론 등의 발전에서도 벨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공헌을 하였다.
즉 1978년도 노벨물리학상은 천체물리학자, 전파천문학자였던 펜지어스(Arno Allan Penzias)와 윌슨(Robert Woodrow Wilson) 등이 공동으로 수상하였는데, 두 사람의 업적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빅뱅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3K의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것이었다.
두 과학자는 미국 뉴저지주 홀름델에 소재한 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1964년에, 전파망원경 안테나를 통하여 4080MHz 대역에서 들려오는 초단파 잡음이 우주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잡음은 바로 태초의 우주 대폭발인 빅뱅(Big Bang)의 잔향으로서 절대온도 3K에 해당하는 7.35cm 파장의 흑체복사임이 입증되어, 우주론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인 피블스(James Peebles)의 업적 역시 빅뱅 모델에 근거한 우주 진화를 설명한 것으로서, 펜지어스와 윌슨이 밝힌 우주배경복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기전자공학이나 물리학, 천문학 분야 이외에도, 다른 기초과학과 관련이 큰 분야에서도 벨 연구소 출신의 노벨상 수상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인 2018년도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인 애슈킨(Arthur Ashkin)의 주요 업적은 레이저광을 이용하여 아주 작은 입자를 포획하거나 조작하는 이른바 ‘광학 집게(Optical Tweezer)’를 발견한 것이다.
애슈킨은 1970년 벨연구소 재직 시에 레이저 포획(Laser Trap)을 통한 광학 집게의 원리를 발견하고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이 방법을 발전시키고 생물학 분야 등에도 활용하여 1980년대 후반에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를 잡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는 광학 집게가 여러 종류의 나노입자나 마이크로입자들을 포획하고 조작하는 데에 널리 쓰일 수 있게 되었고, 특히 DNA나 단백질, 효소 분야의 연구 등 분자생물학의 발전에도 공헌하게 되었다.
2014년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에릭 베치그(Eric Betzig)는 나노 차원을 관찰할 수 있는 초고해상도의 단일분자 현미경을 개발하였다.
이 연구로 극미(極微)의 세계를 보기 쉽지 않았던 기존 광학현미경의 한계를 넘어서 살아 있는 세포를 분자 수준에서 관찰할 수 있으므로, 분자생물학이 크게 발전하고 여러 질병 관련 연구에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정확히 벨 연구소 재직 시절에 이러한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위 취득 후에 벨 연구소의 반도체 물리학 연구 부서에서 일한 경력이 결코 그의 업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벨 연구소는 1925년에 설립된 이래도 세계 최고 수준의 민간연구기관으로 군림해왔는데, 물론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Alexander Graham Bell)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벨전화회사에서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로 이름이 바뀐 후에 독립적인 성격의 연구기관으로 창립되었고, 노벨상 수상 업적들 이외에도 대단히 중요한 신기술과 첨단 제품들을 숱하게 세상에 선보인 바 있다.
1996년에 모기업이었던 AT&T가 분할되면서 루슨트테크놀로지로 소속이 변경된 이후, 여러 차례의 인수합병을 겪고 연구소의 성격과 위상도 변화하면서 예전처럼 기초과학 연구 등에서도 압도적인 위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의 연구업적을 이룬 지 수십 년 이후에나 노벨과학상이 수여되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벨 연구소 출신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당분간 계속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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