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파동이자 입자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빛을 금속 표면에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빛은 파동이라고만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빛이 입자라는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됐다. 1923년 시카고대학의 아서 콤프턴 교수가 X선을 산란시켰을 때 빛의 파장이 길어지는 ‘콤프턴 효과’를 발견한 것. 그러자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빛의 입자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콤프턴 효과가 무엇이기에 아인슈타인의 말도 믿지 않던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아서 콤프턴은 1892년 9월 10일 미국 오하이오주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철학 교수였던 그의 부친은 우스터대학의 학장이었다. 아서의 첫째 형은 MIT 총장을, 둘째 형은 워싱턴주립대학의 총장을 지낼 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 아서 컴튼 역시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 총장을 지냈다.
1913년 우스터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장 프린스턴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핼리혜성 사진을 촬영하는가 하면 지구의 공전을 입증하기 위해 원형 튜브에서 물의 운동을 관찰하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했다.
하지만 이후 X선으로 연구 분야를 변경한 그는 1918년부터 X선 산란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콤프턴 효과에 대한 최초의 증거를 얻은 것은 광학적으로 동일한 파장으로 이루어진 광원을 입사한 후 나타난 2개의 산란 복사에서였다.
하나는 원래의 빛과 동일했으나 다른 것은 약간 더 긴 파장을 지닌 산란복사였던 것. 에너지는 파장에 반비례하는데, 산란 후 빛의 파장이 길어졌다는 것은 산란된 빛이 원래의 빛보다 에너지가 적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원자폭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전자파 복사의 입자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콤프턴 효과는 이후 케임브리지대학의 찰스 윌슨 교수에 의해 실증됐다. 전기적으로 대전된 입자의 경로를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확장법을 발견한 것.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아서 컴튼은 찰스 윌슨과 공동으로 192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콤프턴은 X선의 전체 반사 현상과 완전한 편광 현상을 발견해 원자에 있는 전자의 수를 더욱 정확하게 측정했다. 그리고 X선의 파장을 측정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회절격자에 의해 최초로 X선 스펙트럼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한편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콤프턴은 우주선(宇宙線)의 세기에 대한 지리적 변화를 전 세계적으로 조사해 그 강도가 지리적 위도가 아닌 지구 자기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는 지구 자기장과 1차 대전입자가 유입되는 등방성 흐름의 상호작용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야기했다.
1941년에는 원자력 이용에 관한 국가위원회 의장이 되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는 엔리코 페르미, 유진 위그너, 레오 실라르드 등과 함께 최초로 제어되는 우라늄 핵분열 원자로를 건설했으며, 워싱턴 핸포드의 대형 플루토늄 원자로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제조된 플루토늄이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었다. 콤프턴은 미국 정부가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할 때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MP탄의 원리는 콤프턴 효과
그가 사망한 직후 태평양 존스턴섬의 상공 400㎞에서 1.44메가톤급의 수소폭탄 실험이 진행됐다. 그런데 그곳에서 800㎞ 떨어져 있던 관측 장비가 파손됐고, 1500㎞나 떨어진 하와이에서는 가로등이 파손되고 통신망이 두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핵폭탄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감마선은 대기 중의 산소 및 질소 등의 분자와 충돌하면서 전자를 튕겨낸다. 이렇게 튕겨나간 전자는 지구 자기장 영향을 받아 전자파 형태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고, 그 영향으로 주변에 있던 전자기기를 먹통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이 원리를 이용한 EMP탄이 개발되었는데, 전자기펄스를 이용한 이 폭탄은 전자 장비가 많은 현대 군대의 방어 체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핵폭탄보다 더 파괴적인 무기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EMP, 즉 전자기펄스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콤프턴 효과 때문이다. 즉, 현대에서 가장 위협적인 두 무기의 개발이 모두 아서 콤프턴과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시카고대학에서 콤프턴 효과로 노벨상을 수상하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콤프턴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 총장으로 취임했다. 1954년부터 1961년 은퇴할 때까지는 이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바로 이 무렵 콤프턴은 현재 전 세계 도시에서 운전자들이 속도를 줄이게끔 만드는 ‘과속방지턱’을 고안했다. 학교 교정에서 차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학생들을 위협하는 걸 보고 착안해낸 것이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간 그는 1962년 3월 15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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