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속 아밀라아제의 활성이 큰 사람들은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녹말이 분해된다. 이는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고 많이 먹는데 영향을 미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초중고에서 대학까지 그 많은 수업을 들었음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지적인 깨달음의 순간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일까. 그런데 가끔 선생님들이 딴 길로 새서 들려준, 수업과 무관한 이야기들 가운데 몇 가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교 2학년 때 들은 분석화학 시간도 그런 경우로 교수님의 강의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느 날 들려준 얘기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교수님이 짜장면을 드시면 어느 순간 그릇의 짜장 소스가 녹아 국물이 된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내 침에는 아밀라아제가 많은 것 같다”며 “짜장면을 먹다가 흘러 들어간 침에 들어있는 아밀라아제가 소스를 걸쭉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넣은 전분(녹말)을 분해해 점도를 떨어뜨려 물처럼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분이 워낙 실감나게 얘길 하셔서 듣는 동안 그 상황이 그려지다 보니 비위가 꽤 상했다. 그러면서도 ‘과연 그럴까?’라고 반신반의했다.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다 보면 문득 이 얘기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주위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그릇을 슬쩍 훔쳐보곤 했다.
침 속 아밀라아제 활성 차이 수백 배
침 속 아밀라아제 농도는 개인차가 수백 배에 이른다. 아밀라아제 농도가 높은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다 보면 그릇에 남아있는 소스가 물처럼 될 수도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지난 2010년 학술지 ‘플로스 원’에는 침 속의 아밀라아제 양과 입안 음식의 녹말의 지각에 대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분석화학 교수님이 들려준 짜장면 에피소드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침에는 녹말을 소화하는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들어있는데 사람에 따라 농도 차이가 크다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아말라아제 유전자(AMY1)의 복제수 차이로, 적게는 게놈에 2개뿐인 사람에서 많게는 15개까지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다음으로 유전자 발현의 차이다. 평소 녹말이 풍부한 음식을 즐겨 먹으면 아밀라아제 유전자의 발현이 높아진다.
그 결과 개인데 따라 침 속 아밀라아제 효소의 활성은 수백 배까지 차이가 난다. 논문에서 실험참가자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평균 93U(단위)로 최저 1에서 최고 371에 이른다.
이처럼 효소 활성 차이가 크다 보니 똑같은 음식을 씹어도 느낌이 크게 다르다. 침 속 아밀라아제의 활성이 큰 사람들은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녹말이 분해돼 점도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고 더 많이 먹게 된다. 입안에서 음식이 녹아내려 점도가 떨어지는 현상은 다른 음식에서도 선호도를 높인다. 대표적인 예가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이다.
이처럼 음식의 맛은 단순히 혀의 미뢰에 분포한 미각수용체의 작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건 아니다. 미각수용체의 분포밀도나 유전형 차이로 미각의 민감도에 개인차가 있듯이 침 속 소화 효소의 차이도 음식 맛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위의 경우는 촉각을 통해). 그런데 최근에는 침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맛의 지각에 관여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침의 조성이 미각에 대한 민감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커피가 별로 쓰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
맥주에는 타닌산을 비롯해 쓴맛을 내는 성분이 꽤 들어있지만 자주 마시다 보면 어느새 쓴맛에 둔감해진다. 타닌산과 결합하는 침단백질의 농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제공
학술지 ‘화학감각’ 6월호에는 쓴맛에 자주 노출될 경우 쓴맛에 둔감해지는 현상이 침의 단백질 조성 변화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술이나 커피를 처음 맛본 사람(보통 어린이)은 쓴맛에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데 몇 번 먹다 보면 어느새 쓴맛은 잘 못 느끼고 맛있다고 느낀다. 필자 역시 커피를 안 마셨을 때는 설탕을 넣지 않고 마시는 사람을 보면 ‘저 쓴 걸 왜 마시지?’라며 의아해했지만 지금은 커피를 내릴 때도 원두를 더 많이 넣어 설탕을 넣지 않고 점점 진하게 마시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 뒤의 보상 때문이라고 본다.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커피 쓴맛의 불쾌함을 잊게 하는 심리적 효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쓴맛 민감도를 실험해보니 쓴맛에 자주 노출되면 쓴맛에 대한 역치가 올라가는, 둔감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미국 버팔로대 심리학과 앤-마리 토레그로사 교수팀은 그 이유가 침의 조성 변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이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연구자들은 쥐의 먹이에 쓴맛이 나는 분자인 타닌산(3%)과 퀴닌(0.375%)을 섞어 제공했다. 다른 먹을 게 없었기 때문에 쥐들은 참고 먹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2주를 먹인 뒤 두 분자에 대한 쓴맛 민감도를 조사하자 예상대로 먹이를 먹기 전보다 훨씬 둔감해졌다. 연구자들은 식이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채취한 침과 끝낸 뒤 얻은 침을 분석해 조성을 비교했다. 그 결과 특정 침단백질 농도가 달라졌다. 침에는 아말라아제 같은 소화효소뿐 아니라 수백 가지 단백질이 존재하는데 이를 아울러 침단백질(salivary protein)이라고 부른다.
침을 분석한 결과 7가지 침단백질의 농도가 높아졌다. 침단백질의 조성이 쓴맛에 대한 민감도와 관련돼 있다는 몇몇 연구결과가 있었지만 동일한 개체에서 쓴맛에 한동안 노출된 전후 침단백질의 조성이 바뀐다는 결과는 처음이다. 그렇다면 침단백질은 어떻게 쓴맛 민감도에 영향을 주는 걸까.
지난해 연구자들은 침단백질이 고삭신경의 활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삭신경(chorda tympani nerve)은 미각을 전달하는 안면 신경이다. 퀴닌 용액에 침단백질을 넣은 뒤 혀에 떨어뜨리면 고삭신경의 반응이 약해졌다. 쓴맛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쓴맛에 자주 노출되면 쓴맛에 둔감해지는 걸까.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쓴맛은 먹이에 독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경고인데 말이다.
연구자들은 쓴맛에 자주 노출될 때 발현이 증가하는 침단백질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쓴맛 분자와 결합해 소화과정에서 흡수되는 걸 방해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여러 식물성 음식(맥주, 와인, 녹차, 견과류 등)에 들어있는 타닌산은 침단백질과 결합된 상태로 소화기에서 흡수되지 않고 빠져나간다.
사람의 몸은 음식에 들어있는 독소를 어느 수준까지는 침의 조성을 바꿈으로써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음식을 반복적으로 먹게 되면 특정 침단백질 유전자의 발현량이 늘어나고 해독 능력이 늘어남과 동시에 쓴맛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번 결과가 비만의 만연을 유발한 현대사회의 잘못된 식생활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채소를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맛이 쓰다는 것인데, 며칠 꾹 참고 먹다 보면 어느새 쓴맛이 덜 느껴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쪼록 이번 실험 결과가 건강 식단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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