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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회생물학(Sociobiology) 또는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또는 신다윈주의(New Darwinism)라고 불리는 학문에 대해 다룬다. 세 가지 표현(또는 학문)을 구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며 가장 잘 알려진 사회생물학이라는 표현만 사용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콘라트 로렌쯔(Konrad Lorenz),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L. Trivers),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등이 그 대표적 학자들이다.

입문서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와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의 <도덕적 동물(The Moral Animal: Evolutionary Psychology and Everyday Life)>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으로는 리처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의 <DNA 독트린(The Doctrine of DNA : The Biology as Ideology)>이 번역되어 있다.

사회생물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진화론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그것도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다윈 시대라면 진화론을통해 인간의 육체를 설명한다고 해도 화를 낼 사람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가 많은 면에서 다른 척추동물과 비슷하며 특히 포유류와는 아주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인간의 요통을 진화상의 예기치 않는 직립보행 때문이라고 설명하더라도 이제는 그 진위를 떠나서 적어도 화를 내지는 않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생물학이 인간의 사회적, 정신적 측면까지도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데서 발생한다. 인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가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면 기분 나빠할 사람들이 많다.

사회생물학 이전에도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학문은 많이 있어왔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이다. 사회생물학과 마르크스의 이론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은 조금씩 다른 측면을 건드렸지만 어떤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했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리고 기분 나빠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마르크스는 대학 교수의 고귀하고 신성하며 순수한 이론이 그가 재직하는 대학에 돈을 대는 자본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품에 그의 성적 욕구, 욕망, 충동, 소망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신성한 사랑이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마르크스는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경제결정론자’이며 프로이트는 ‘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성결정론자(범성론자Pansexualist)’이며 사회생물학은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하며 더 이상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를 거부한다. 문제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사회생물학자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가, 성이, 유전자가 중요하다고 말했지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또 다른 태도는 사회생물학과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사회생물학과 사회다윈주의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며 다른 것이 있다면 사회생물학이 조금 더 세련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르원틴의 <DNA 독트린>도 이런 태도를 취한다. 아주 단순한 삼단 논법이다.

  1. 사회생물학과 사회다윈주의는 본질적으로 같다.
  2. 사회다윈주의는 틀렸다.
  3. 따라서 사회생물학도 틀렸다.

사회다윈주의만 비판하면 사회생물학 비판은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르원틴은 사회생물학 자체도 비판하지만 대체로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삼단논법은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이다.

사회다윈주의는 다윈주의를 이용해서 계급 지배, 성차별, 인종차별 등을 정당화하려는 노골적인 시도였다. 사회다윈주의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문제는 사회생물학자들도 사회다윈주의를 엉터리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과 사회다윈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또는 어떻게 ‘세련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내세운다면 누군가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1. 스딸린주의와 뜨로츠끼주의는 본질적으로 같다.
  2. 스딸린주의는 틀렸다.
  3. 따라서 뜨로츠끼주의는 틀렸다.

유전자 결정주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르원틴은 사회생물학이 유전자결정주의라고 주장한다. 르원틴이 보는 사회생물학은 이런 주장을 한다.”유전자가 생물 개체를 몽땅 결정한다. 생물 개체가 생물의 집단을 몽땅 결정한다. 따라서 유전자를 연구하면 생물 집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모두 알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은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개미 연구에서 커다란 업적을이룬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사회생물학자로서는 좀 이상하게 연구했다. 윌슨은 개미의 DNA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개미를 연구했다. 게다가 윌슨은 한 마리의 개미만 실험실에 놓고 연구한 것이 아니라 개미 군집(colony)을 연구했다. 윌슨이 밝힌 것 중에는 개미가 페로몬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있는데 페로몬은 개미 개체끼리의 의사소통에 쓰인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생물의 유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추측할 때 많이 들어가는 논리는 생물 사이의 경쟁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유전자 -> 개체 -> 군집이라는 일방통행만 아는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일부 나찌가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조용히 무시하면 된다. 사회생물학자는 생물이 유전자와 환경의 조합에(원한다면 우연까지 포함해서) 의해 이루어진다는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오히려 고집스러운 쪽은 환경결정론자들이다.  예컨대 지능의 유전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직까지는 사람의 행동 변화에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설득력 있는 조사 결과도 없다.”(<DNA 독트린> 17쪽) “사회계급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DNA 독트린>73쪽) 르원틴은 지능과 유전자의 관계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 하지만 <DNA 독트린>68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하나는 입양아의 생물학적 부모의 IQ가 높을수록 입양된 아이들의 IQ가 높다는 의미에서 생물학적 부모를닮는다.” 이것은 르원틴 자신이 쓴 문장이다. 이것은 증거가 아닌가? 다운 증후군이 유전자와 관련이 있고 정신지체를 보인다는 것은 증거가 아닌가? 르원틴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환경결정론자가 아니며 유전자와 환경이 모두 작용한다는 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암묵적으로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평등했으면 하는소망을 객관적 사실인 양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다윈주의자들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려고 사실을 왜곡한다면 르원틴 같은 좌파 학자는 그에 반대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르원틴은 아마도 어떤 인간은 선천적으로 다른 인간에 비해 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더 크다면 계급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 다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이 정신지체를 타고난다고 해서 그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아서(물론 의대에 가는 문제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도 작용한다. 예컨대 등록금을 낼 수 있어야 의대에 갈 수 있으며 고액과외를 받는 사람이 더 유리한 것은 분명하다)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된다고 해서 의사가 보통 노동자보다 열 배나 돈을 많이 버는 사실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설명하는 것과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유럽인이 과학, 기술에서 아프리카인보다 앞섰기 때문에 그들을 노예화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노예제와 식민화가 정당화되는 것이아니다. 사회다윈주의자들이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우리도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단골 비판 중 하나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맞는말이다. 증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한 것은 그이론이 ‘약한 이론’ 즉 그럴 듯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이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천동설을 내세웠을 때 그의 이론과 관측 사실은 잘 들어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행성은 타원에 가까운 운동을 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었다. 아인슈타인이 승리한 것은 몇 년 후에 수성의 궤도 등의 증거에서 그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과학이 처음부터 완벽한 증거와 함께 출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그것은 어린애보고 걸음마도 익히기 전에 뛰어다니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생물학은 아직 탄생한지 30년 밖에 안 된 학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생물학자의 편견이 그들의 이론에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가 그 이론을이용하기 때문에 사회생물학이 위험한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위험한 학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마르크스주의도 아주 위험천만한 학문이다.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는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편견이 녹아들어갔다면 어떤 편견이 들어갔는지를 따지면 되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이용한다면 그것을 비판하면 된다. 심지어 상대성 이론도 ‘모든 이론은 상대적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이 들으면 뒤로 자빠질 주장을 하는 상대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그런 것을 연구하느냐고 비난한다. 19세기에 칸토르라는 사람이 무한집합을 연구할 때 많은 수학자들한테 따돌림을 당했다. 왜 그런 쓸데 없는 것을 연구하느냐고. 그는 따돌림 속에 쓸쓸히 죽어갔지만 그의 연구 덕분에 20세기의 수학은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집합론이 수학의 기초가 된 것이다. 레이저가 처음 연구되었을 때 흥미롭기는 하지만 쓸모가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다. 무기로도 쓰이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의학용으로도 쓰인다. 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할 때 그것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알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뭐하러 연구하겠는가? 그리고 쓸모가 있든없든 학자들이 연구하겠다는 것을 막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르원틴에 의하면 사회생물학은 “인간은 개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이방인을 혐오하고, 가족 중심적이고, 지배를 지향하고, 사회의 급격한 재조직화의 어떤 가능성도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기 본위적이다.”(<DNA 독트린> 210쪽) 여기에 이 책의 다른 부분에 있는 있는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이다”라는 사회생물학의 주장은 교묘하게 빠져 있다. 그리고 사회생물학자들은 사회생물학이 초기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회생물학자가 “사회의 급격한 재조직화의 어떤 가능성도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기 본위적이다”라는 주장을 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사회생물학자는 흑인은 선천적으로 백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한다”라는 말을 덧붙일 것이다. 이것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이며 내 생각에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회생물학자는 없거나 극히 소수다. 그리고 인간에게 공격성이 있다는 주장과 인간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주장은 완전히 다른 주장이다. 공격성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레닌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글을 신랄하게 써서 적을 ‘공격’할 수도 있고 스딸린처럼 자객을 보내서 ‘공격’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공격성이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스딸린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 특히 배타적 동성애 문제도 단골 메뉴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이것을 어설프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적어도 일부 사회생물학자들은 그 설명이 어설프다는 것을 그리고 배타적 동성애가 사회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물론 물리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물리현상이 있다는 이유로 물리학을 폐기처분해야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프로이트를 공부하면서 진화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인간이 왜 기뻐하고 슬퍼하는지에 대해 진화론이 해답을 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직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 신다윈주의)의 이론에 대해 자세히는 잘 모르며 어느 정도가 맞는 말인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좌파의 사회생물학 공격에는커다란 문제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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