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파일:attachment/reductionism.png
xkcd 435화 ‘Purity’[1]

사실 저 모든 것 위에 철학이 들어가면 게임 끝

 

1. 설명

2유물론과의 관계

2.2심리철학

2.2.1. 오해

3. 환원주의의 가치에 대한 통념과 반론들

3.1. 통념 1: 인문 및 예술에 대한 환원은 부적절하다?
3.2. 통념 2: 환원주의는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4. 대표적 비판론자들

5. 관련도서

 

 

還元主義
Reductionism

 

 

1. 설명[편집]

어떤 높은 단계의 개념을 더 낮은 단계의 요소들로 분할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철학적 흐름. 보통 르네 데카르트를 그 시초로 본다.

사실 무엇이 더 높은 단계인가 낮은 단계인가에 대해서도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정말 거칠게 말해서 “복잡한 것을 더 단순한 것들의 조합으로 생각하는 것” 정도로만 알아두어도 되겠다. 오컴의 면도날과는 전혀 다르니 유의.

현대에는 주로 정신예술사랑 등 일견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과학 가운데서도 생물학이나 화학등이 보다 ‘근본적인’ 과학인 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가리키는데 쓰인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환원주의는 논리 실증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에서 지나가듯 언급되는 “방법론적 일원론” 역시 환원주의와 접점을 갖는다.

일단 어떻게든(…) 더 높은 단계와 더 낮은 단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식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계층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사회학은 조금 복잡한 심리학일 뿐이다. (혹은 사회학은 심리학의 응용일 뿐이다.)
  • 심리학은 조금 복잡한 생물학일 뿐이다. (혹은 심리학은 생물학의 응용일 뿐이다.)
  • 생물학은 조금 복잡한 화학일 뿐이다. (혹은 생물학은 화학의 응용일 뿐이다.)
  • 화학은 조금 복잡한 물리학일 뿐이다. (혹은 화학은 물리학의 응용일 뿐이다.)
각종 사회과학
▼ (환원) ▼
심리학[2] (특히 사회심리학)
▼ (환원) ▼
신경과학, 뇌과학[3]
▼ (환원) ▼
생리학
▼ (환원) ▼
생물학 (특히 분자생물학)
▼ (환원) ▼
생화학
▼ (환원) ▼
화학 (특히 유기화학)
▼ (환원) ▼
물리화학
▼ (환원) ▼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이 도식을 좋아합니다

아무튼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모든 사회과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되고,[4] 심리학은 다시 생물학, 특히 신경생리학으로 환원될 것이며, 생물학은 세포의 단위로, 다시 분자의 단위로 환원되고, 나중에는 생화학을 거쳐서 종국에는 가장 미시적인 입자 수준의 물리학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해질 것이다.[5]이것이 환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각 학문들 사이의 계층구조이다.

이렇다 보니 모든 학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다뿐이지 좀 더 복잡한 물리학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소리. 언뜻 보면 광역 어그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각 분야별로 공부를 하다 보면 서로간의 영역이 많이 겹치고 언어도 나름 비슷하고, 학제 간 협력도 활발히 일어나기 때문에 과격하다고 투덜거릴 수는 있어도 아주 부정할 수만도 없는 게 현실. 한 분야에서 안 풀리던 문제가 옆 동네 분야에서 손쉽게 풀리는 일도 있다더라 실제로도 현대 생물학의 발전은 델브뤽을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들이 바이러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 그래도 어쨌건 위의 계층구조를 두고 이건 웬 물리부심(?)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6]

이와 같은 환원주의의 특성 때문에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수리물리학자이며 동시에 대중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자인 J.폴킹혼 경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 문장에 대해 수긍할 수 있다면 자신이 환원주의자라고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인간이란 단지 무수히 많은 쿼크와 글루온, 전자 등이 모여 있는 집합체일 뿐이다.”

여기서 “단지 ~일 뿐이다”(nothing but ∼ ) 화법에 주목하라. 이것은 환원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환원주의자들은 다른 식자들에게 약간의 위트를 넣어서 “nothing butter” 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매사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결국 그것도 단지 ∼ 일 뿐이지요.” 라고 말을 끝맺기 때문.[7]

철학계의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로는 논리실증주의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루돌프 카르납이 있다. 그 외에도 일명 통합과학(unity of science) 운동을 펼치면서 물리학의 이름 아래 모든 과학을 포섭하려 했던 인물인 오토 노이라트 또한 환원주의자에 포함된다.

과학계의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크릭(1916~2004)[8]이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생물학의 궁극적 목적은 사실상 모든 생물학을 물리학과 화학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 이라고 한다.[9] 다른 네임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역시 환원주의에 우호적이며, 생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G.에델만(1929~2014)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마음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적 물질은 전혀 특별하지 않으며, 약간의 금속과 함께 탄소수소산소질소유황과 같은 화학원소들뿐” 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10] 이 맥락에서 보면 사랑 역시 그저 옥시토신(oxytocin)을 바탕으로 한 신경세포들 간의 의사소통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설명이 가능해진다.[11]

환원주의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치 “부분과 전체 논쟁” 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사회 명목론 또는 사회 유기체설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전체는 단지 부분의 합에 불과하다” 와 같은 논변과도 멀지 않아 보이기 때문. 즉 숲은 나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숲은 단지 나무들의 집합일 뿐이다. 물론 바로 이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복잡계 이론인데, 환원주의에 대한 반박들 중에도 복잡계 이론의 창발(emergence)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이 때문에 결합의 오류와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는 셸든 리 쿠퍼가 대표적인 환원주의자…아니, 물리학 우월주의자(…)로, 물리학 외의 모든 학문들을 업신여기거나 내지는 지적 활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은 대부분 엉터리” 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감히 공학 따위가 과학(science)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다고?” 라고 하면서 씩씩거리기도 했다. 한 번은 “똑똑하지 않은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 는 질문에 “프랑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과 한 적은 있다” 고 대답할 정도.(…)

2. 유물론과의 관계[편집]

환원주의 자체는 유물론이나 물리주의, 즉 “세상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환원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환원주의의 시초라고 언급된 데카르트는 물질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2원론자였으며, 조지 버클리처럼 모든 것이 관념으로[12] 환원된다고 본 관념적 환원주의자도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환원주의자는 대부분 물리적 환원주의자이며, 물리적 환원주의는 물리주의를 함축한다.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형태의 “환원” 개념은 일반적으로 대략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특수과학의 개념 A는 근본과학의 개념 B로 환원된다 iff. A가 들어간 특수과학적 법칙은 (A를 포함하지 않고) B가 들어간 근본 과학의 법칙으로 분석·번역될 수 있다.

이를테면 위 도식에 의거하여 일상적 개념인 “온도“는 근본과학인 물리학의 개념인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화학이나 생물학 등과 달리 이런 ‘물리적 환원’이 성공하지 않는 사례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만약 이런 사례가 합당하다면 물리적 환원주의는 반례에 봉착한다.

2.1. 수리철학[편집]

첫 번째 후보는 수학이다. 왜냐면 수학에서 다루는 대수 구조, 함수집합 등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학적 대상들이 양성자, 중성자, 쿼크 같은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시공간 속에 있는 것들도 아니고 중력, 전자기력 같은 힘의 작용도 받지 않는다. 단적으로 리만 가설의  여부를 밝혀내는건 수학적 증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뿐, 그 어떤 물리학적 실험으로도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물리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곧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가 있다고 하는 것과 별차이가 없다. 따라서 위에서 한 말들이 옳다면 수학은 곧 물리적 환원주의에 대한 반례가 된다.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대표적인 학제는 수리철학이다. 예를 들어 수학적 유명론자인 뉴욕대학교의 철학 교수 하트리 필드(Hartry Field)는 고전역학이 ‘‘, ‘함수‘ 같은 수학적 대상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음을 보인 바 있다.[13] 만약 이런 기획이 성공한다면 수학은 물리적 환원주의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2.2. 심리철학[편집]

두 번째 후보는 심리학이다. 고통믿음지능 같은 심리학적 개념들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철학적 주장의 근거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같은 유사과학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런 입장은 ‘신경과학 등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같은 입장과 양립불가능한건 아니다. 문제는 심리학의 범위가 보다 일반적이라는데 있다.

심리학에서 대개 고통이나 믿음 같은 심리적 상태를 오직 인간만이 갖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고래문어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고등 인지 동물도 이런 심리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인공지능이나 고지능 외계인이 발견된다면 이들 또한 ‘믿음’, ‘지능’ 같은 심리적 상태를 띨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심리적 상태를 갖춘다고 여겨지는 이들 생물(혹은 무생물)의 물리화학적 구조가 반드시 같다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이를테면 인간과 문어가 거쳐온 진화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더불어 SF에 나오는 것처럼 규소로 된 고지능 생명체가 만약 있다고 할 경우, 이는 명백히 탄소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경 작용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토대를 띠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에게 ‘믿음’, ‘지능’ 같은 심리적 상태를 귀속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물리화학적 구조는 제각기 다르다. 이런 시나리오를 두고 흔히 “복수 실현(multiple re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복수 실현 논변이 옳다면 심리 법칙의 물리적 환원은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심리학적 개념인 ‘지능’만 하더라도 물리적 환원을 하려고 친다면 아주 지저분한 형식화 밖에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x는 지능을 갖는다 iff. (x는 a1개의 글루온, b1개 쿼크 …가 c1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1이 상태 ~를 띠는 것이다) or (x는 a2개의 글루온, b2개 쿼크 …가 c2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2가 상태 ~를 띠는 것이다) … (x는 an개의 글루온, bn개 쿼크 …가 cn한 패턴에 따라 배열된 것의 부분 dn이 상태 ~를 띠는 것이다) …

즉 위 형식화를 따르면 ‘지능’ 같은 심리적 현상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여러 현상들을 그저 얼기설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지능’이라는 심리학적 현상은 이런 물리적 상이성과 상관없이 추상적이며 체계적으로 탐구될 수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튜링 테스트는 그 응답자가 인간인지, 문어인지, 규소기반 생명체인지 상관없이 적용된다. 즉 심리적 현상을 따지는데 물리적 구조는 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14]

인지주의를 비롯한 지배적인 심리학적 기조에서는 이처럼 심리 현상의 수리적 구조에 관심을 둘 뿐, 그 물리적 근거가 무엇인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를테면 힐러리 퍼트남은 심리 상태가 확률론적 오토마타로 분석될 수 있다고 보며, 그 오토마타가 어떤 물리적 성질을 띠는지는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한다.[15]

만약 위와 같은 분석이 옳다면 심리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된다고 볼 근거가 희박하며, 곧 물리적 환원주의는 난점에 봉착한다.

2.2.1. 오해[편집]

  • Q. 복수 실현은 심리적 현상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므로 물리주의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무 바퀴와 돌 바퀴는 물질적 구성이 명백히 다르지만, 동일하게 원운동이라는 추상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된다. 좀더 복잡한 사례를 들자면, 사람이나 이족 보행로봇이나 앉았다 일어서는 운동을 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근섬유 다발의 위치 변화를 통해 그런 운동을 하는 반면 로봇은 모터 등을 통해 운동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행위 모두 무게 중심이 발바닥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운동하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처럼 복수 실현의 사례이지만 누구도 물리주의에 대한 반례로 간주하지 않는다.
    • A. 제시된 사례들 모두 보다 추상적인 법칙이 복수 실현된 사례라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그 문제점은 그러한 법칙이 물리법칙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등속 원운동시 물체의 속력 v는 반지름 r 및 주기 T에 관하여 v = \frac{2\pi r}{T}를 따른다. 이때 “속력”, “주기” 등은 모두 물리적 개념이므로 등속 원운동과 관련된 법칙은 물리적 법칙이다. 그러므로 나무 바퀴와 돌 바퀴의 운동 모두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점에서 물리적 현상이다. 반면 지능 현상이 인지심리학 차원에서 잘 설명되며, 이때 인지심리학에서 쓰이는 개념이 “속력”, “질량” 등의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능 현상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은 물리 법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현상은 원운동의 여러 사례들과 달리 물리적 환원주의에 대한 반례로 볼 여지가 생긴다.

3. 환원주의의 가치에 대한 통념과 반론들[편집]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다.”
“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

ㅡ 아이작 뉴턴 극단적 환원론의 위험성을 주식시장에서 몸소 겪으신 물리학의 본좌

아래 사례들이 종합적인 판단 역시 가능한 환원주의적 지향점을 너무 간촐하게 살폈고, 그들이 비판하는 자들의 태도와 똑같이 일종의 허수아비 공격 논리로 기능할 수 있는 문장들이므로 어느 정도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 테마에서 트롤리 문제만 주구장창 주워삼기는 것과 비슷한 광경. 환원주의적 전통은 이런 극단적인 사례 몇몇을 바탕에 둔 논증을 가져다온다고 바로바로 논파될 만큼 만만하지는 않다. 아래에서 제시되는 사례들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것을 권한다. 물론 환원하기를 주장하는 사람의 입에서 저런 수준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에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당성을 찾는 시도를 할 수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따져주면 될 것이다.

3.1. 통념 1: 인문 및 예술에 대한 환원은 부적절하다?[편집]

이와 같은 환원주의적 접근법이 현실을 잘 설명한다면 좋겠으나, 환원주의의 반대자들은 환원주의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연결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환원주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경험적으로 저런 설명이 그다지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대상이 인문 현상일 경우에는 웃지 못할 결과가 나오게 된다고 주장하며, 이하는 그 논거로 제시하는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 음악은 단지 한 종류의 공기의 떨림에 불과하다.
  • 모나리자는 단지 그 화학적 구성이 알려진 페인트 조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단지 흰 종이의 섬유 위에 붙어 있는 검은 잉크의 반점들에 불과하다.(…)
  • ……

위 예시는 보통 극단적으로 꼽히는 ‘단지 ~이고 그런 진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논법에 대한 비판이며, 환원주의의 학문적 가치 혹은 효용성 주장 그 자체에 대한 반발은 아니다.

위와 같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과학에서의 환원과 인문/예술의 환원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생물 자체가 만들어내는 현상을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 그림, 책의 내용이나 예술성은, 종이나 물감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언어에서의 환유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책’이라는 단어는 종이 묶음으로서의 책과 동시에 내용으로서의 책도 가리킬 수 있다. 따라서 책은 물질로서의 책을 환원하는 것과 내용과 예술성으로서의 책을 환원하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차원의 것으로 혼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와 같이 태백산맥을 종이와 글자로 환원하거나, 모나리자를 종이와 물감으로 환원하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책이 담고 있는 태백산맥의 내용과 그것이 주는 예술로서의 감흥이나 가치는 종이나 잉크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인간과 감상하는 인간의 지적활동(심리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 논증의 결함은 모나리자 그림이 종이와 물감에 귀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이와 물감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마스터 녹음 테잎을 재생하여 들은 노래의 예술적 가치와 이것을 복제한 음원 파일을 재생하여 들은 노래의 예술적 가치가 동일하지 않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혹은, 200년 전 작가가 직접 쓴 소설 원고를 경매에서 구입하여 읽어야만 진짜 예술적 감동을 얻을 수 있으며, 동일한 책을 며칠 전 출판된 판본으로 읽을 때 받는 감동은 가짜라는 수준의 주장이다. 그림에서 종이와 물감은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한 것임에도, 복제 불가능성 때문에 그것 자체가 예술과 동일한 것처럼 혼동을 주는 것이다.[16] 거기다 애초에 어떤 물건의 재조합 기술이 가능한지 불가능 한지는 예술의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재조합이 불가능하므로 예술은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원본 모나리자 속에서 나타나는 화풍, 화가가 의도한 부분, 작품 전후의 상황 맥락적 이야깃거리 등”은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생략”된다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어쨌거나 복제 불가능성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윗 논증에서 문제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직, 혹은 영원히) 모나리자를 동일하게 재조합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 뿐이며, 완벽한 복제만 가능하다면, 당연히 원본 모나리자 속에서 나타나는 화풍, 화가가 의도한 부분, 작품 전후의 상황 맥락적 이야깃거리는 모두 복제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물질구성이 동일하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의도한 예술적 구성(물감의 터치 화면의 크기 등)이 복제품에 그대로 존재하므로, 모나리자가 유발하는 예술적 감흥이 동일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완전한 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느낌과 크기 등이 다른 사진이나 모작을 통해서 복제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원본이 주는 느낌과 구성을 동일하게 재현할 수 없으므로 복제품을 가지고 예술적 가치를 논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물질적 복제가 가능해졌을 때, 원본 모나리자의 가치는 없는 것인가를 질문해볼 수 있는데, 그때도 원본 모나리자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예술성과는 관련 없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신활동을 구현하여 최초로 세상에 전파하였다는 기념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다. (초판본 책이 가지는 가치와 동일하다.) 원본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사람에게 첨언하자면, 우리가 보는 박물관의 오래된 그림들은 대부분 시간에 따른 노화를 겪고 변화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을 통해 복원 과정을 거치며 유지 보수를 하는데, 복원기술의 한계상 100% 원래 그림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원본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화풍, 화가가 의도한 부분, 작품 전후의 상황 맥락적 이야깃거리 등은 이 복원작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박물관에 가서 복원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감흥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위에서 예시로 드는 모나리자는 복원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등을 흥미롭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허수아비 논증은 근본적으로 물질로서의 그림과 내용으로서의 그림을 혼동하는 데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물질 레벨에서 복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복제 여부를 모른 상태에서 보여준다면, 감탄하며 즐겁게 감상할 것이다. 물질구성이 동일하므로, 모나리자라는 예술적 내용이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원본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물질과 그 구성 물질들이 만들어 내는 예술적 내용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며, 기술적으로 가능한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즉, 항목 초반에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이 만든 예술적 구성과 관찰자가 받는 감정적 현상은 인간의 지적/심리적 활동으로 환원해야지 모나리자를 구성하는 종이와 물감으로 환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술로서의 모나리자를 제대로 환원하려면 역사와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두뇌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어떻게 신경 활동을 유발하여 그림의 구성과 터치를 만들어 내었는가의 문제와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두뇌에서 어떤 인지과정을 거쳐 이러한 예술적 감흥을 받게 되는 가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나아가 물리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심리적 / 신경적 과정을 다시 분자 활동으로 환원하려 할 것 이다.) 물론, 언어학 이론을 만드는 연구와 언어에 대한 신경 과학 연구가 현재 괴리가 있듯이, 예술 이론과 두뇌 신경 활동에도 거리가 있겠지만, 환원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환원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3.2. 통념 2: 환원주의는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지 못한다?[편집]

환원주의의 현실적 문제라면, 섣부른 미시적 관점을 너무 간단하게 거시적 세계에 대입해서 어설픈 체계를 구성했을 때 나타난다. 지향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수준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유용하게 쓸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물질주의와 결합되어 이중잣대를 휘두르는, 입발린 허무주의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효율을 기준 삼아 인류와 본질을 해치고 뒤트는 실질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최적화하는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원주의는 분명 복잡해보이는 현상에서 그 현상을 이루는 구성요소와 구성요소끼리 상호작용하는 규칙을 파악하는 데는 유용하다. 하지만 구성요소와 상호작용 규칙만으로 원본 현상을 쉽게 예측하면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7] 환원주의자의 입장에서 고전역학의 응용 문제에 불과해야 할 삼체 문제는 질량이 있는 물체 3개와 중력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계이지만, 이런 계는 안정된 일반해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된 지 100년이 지났고, 특수해도 고작 16가지 군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런 특수해를 벗어난 초기 배열은 수치 해석으로밖에 접근 방법이 없는 카오스 이론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물체의 갯수가 더 늘어나면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 규칙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상호작용의 결과 나타나는 현상의 복잡도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환원주의 그 자체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복잡도를 설명하고 복잡한 현상을 예측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환원주의를 통해 밝혀낸 요소와 규칙을 조합해서 일상 현상을 시뮬레이션하고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라 제품을 직접 만드는 야근 일감이 기다릴 뿐이다.

위에서 든 모나리자의 예로 돌아가보자. 모나리자를 종이와 페인트, 더 나아가서 종이와 페인트를 이루는 원자와 각 원자간의 결합으로 이론적으로 분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분해한 원자와 원자간 결합 법칙만 가지고서 원본 모나리자를 완벽하게 똑같이 복구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고를 들인다면 유사한 결과물은 여럿 만들고서 결과물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겠지만[18], 그런 결과물 중 원본 모나리자가 존재할 확률은 0으로 수렴한다.

만약에 원자를 완벽하게 재조합해서 원본 모나리자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하더라도, 원본 모나리자 속에서 나타나는 화풍, 화가가 의도한 부분, 작품 전후의 상황 맥락적 이야깃거리 등, 환원주의에 의해 구성요소와 상호작용 법칙이라는 분류에 담기지 않는 정보는 분해 과정에서 소실될 수 밖에 없고, 이런 무형의 정보를 지니지 못한 모나리자 2는 아무리 원본 모나리자와 똑같다고 해도 위작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다.[19]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생략되는 정보는 인문학의 입장에서 오히려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비판론자들에 따르면, 어쩌면 환원주의는 하나의 접근법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즉, 다층적인 접근을 통해 보다 완전한 설명을 도모할 수 있다.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으며, 작곡가의 의도와 지휘자의 성향, 각 악장들의 구조적 오케스트레이션의 분석에 대한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본 주파수를 바탕으로 하여 각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배음(하모닉스)에 대한 물리학적 지식 역시 음악을 감상하는 정신적 풍요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인문 현상도 그러하다면, 보다 엄밀하고 학술적인 영역에서의 환원주의는 그 가치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여전히 틀렸다. 이는 여전히 허수아비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데, 환원주의가 마치 물리적 구조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환원주의자들에 따르면, 클래식 음악은 소리의 물리적 구조물에 불과하므로 그들은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주장한다.”는 거짓 명제를 만든 뒤, 이것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계속 얘기했듯이, 예술의 내용은 물질 스스로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다. 공기가 스스로 떨려서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해내는 일은 없다. 결국 예술의 내용을 환원하는 것은 창작자가 어떤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소리의 물리적 구성을 만들어내었는지를 환원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윗 문단에서 말하듯이 “작곡가의 의도와 지휘자의 성향, 각 악장들의 구조적 오케스트레이션의 분석에 대한 지식들”이 환원주의에서 배제되고 “각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배음(하모닉스)에 대한 물리학적 지식” 만을 다루는 것이 전혀 아니다. 환원주의가 음악을 이루고 있는 소리의 물리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자명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왜 굳이 그러한 물리적 특성의 조합을 만들어 내었는가라는 측면에서 예술의 내용을 인간의 지적활동으로 환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능의 문제나 감정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심리학 영역[20] 내에서 환원되어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환원주의의 편협함을 비판하고 다층적 접근을 도모해야 한다는 위의 주장은 엉터리이며, 이미 환원주의에서는 이를 모두 포함하여 환원하는 것이 연구 문제이다. 물론 그것을 환원할 수 있는가 없는가, 환원주의 자체가 효용성이 있는가 없는가 등은 별개의 문제이며, 위의 문단은 환원주의의 연구 대상을 논하면서 가짜 허수아비를 내세워 공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근래에 스스로 환원주의자라고 일컫는 자들이 영 쌩뚱맞게도 물질에서 비롯된 접근분석법만을 활용해 완벽하지 않은 의견을 내면서도 다른 관점을 폄하하여 오히려 그들의 영역을 축소했다는 점에서 해당 관점도 과장되었을지언정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며, 똑같이 옹호받을 수 있다. 아직까지는 그냥 참고할 수 있는 수준이지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경지에까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라 추후에 더 발달해서 기존에 분리된 학문과 동등한 또다른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인문학적 해석을 박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21] 또한, 환원 주의가 완성될 수 있는 미래에 환원 주의와 분리된 상위 개념이 나타나거나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더 보완된 뒤에야 충분한 효과를 입증할 가능성도 있다.

4. 대표적 비판론자들[편집]

대표적인 환원주의 비판론자들로서 몇 명을 꼽아 보자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반박한 생리학자로 유명해진 D.노블(1936~)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생명의 음악》에서 시스템 이론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이에 곁들여서 환원주의적 생물학의 이해를 논박한 바 있다. 또한 물리학자 P.W.앤더슨(1923~) 역시 이미 “모든 것을 단순한 근본적 법칙들로 환원시키는 힘은 그런 법칙들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한편 진화심리학자이자 성심리학자인 길리언 브라운은 진화생물학자 케빈 랠런드와 함께 진화론의 적용영역을 총망라하는 《센스 앤 넌센스》 라는 책을 썼는데, 사회과학의 각종 영역들에서 생물학적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까댔다. 즉 사회과학의 여러 문제들을 무작정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사회생물학자들은 진화론에 열광한 나머지, 잠시 멈춰서서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발전시키거나, 사회과학 문헌을 읽거나, 대안이 될 만한 설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문제에서 저 문제로 즉흥적으로 옮겨 다니며 피상적인 이야기만 지어내기 일쑤였다… (중략) …즉, 사회생물학에는 모름지기 ‘모든 유형의 사회는 가능하며, 하위 집단 간의 모든 행동 차이는 제거될 수 있다’ 고 가정하는 출발점, 즉 귀무 가설(null hypothesis)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생물학자들이 가설검증 기준을 좀 더 까다롭게 유지했다면, 진화론적 설명이 남용될 여지는 줄어들었을 것이다…”
– 《센스 앤 넌센스》, p.146

한편 장대익 교수가 네이버에 추천하기도 한 서적인 《DNA 독트린》에서, 저자 리처드 르원틴은 주의 깊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개인적인 공격성과 국가의 공격성을 혼동하는 것은, 개인이 남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 느끼는 급격한 호르몬 분지와 전쟁의 원인인 자연자원, 교역 통로, 농산물 가격, 노동력의 가용성 등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개인들의 실수가 사회를 좌지우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인간 본성 내용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DNA 독트린》, p.167

노벨화학상 수상자 로얄드 호프만도 환원주의 비판자이다. 그의 대표적 서적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에서는 한 목차 전체를 환원주의자들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의 문제점과 환원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서술하고있다.

5. 관련도서[편집]

  • Reductionism: Anaylsis and the Fullness of Reality

추가바람

[1] xkcd 사이트의 카툰 원본 이미지에 마우스를 올리면 나오는 타이틀엔 ‘한 편, 물리학자들은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는 섹스와 자위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기 좋아한다’라고 쓰여있다.
[2] 정신물리학이라는 지름길이 있다.
[3] 이것도 신경화학이라는 지름길이 있다.
[4] 실제로 이와 같은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경경제학 및 신경사회학.
[5] 한가지 예를 들자면, 화학에서 원자들 사이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 중 하나인 공유결합이론은 결국 양자역학에 의해(하나의 전자가 이곳 저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설명(환원)될 수 있다.
[6] 더 궁금한 것이 있는 위키러들은 Nagel(1961/1982), Kuipers(1990) 등을 참고할 것.
[7] 환원주의에는 “존재론적 환원주의” 와 “인식론적 환원주의” 의 두 가지가 있는데, nothing but 화법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해당한다. 사실 그들은 환원주의 내에서도 가장 과격한 흐름이기 때문에 일부드립이 의의가 있으나, 한편으로는 환원주의의 얼굴마담 격으로 취급받는 것도 사실. 반면 인식론적 환원주의는 일종의 오컴의 면도날의 확장 버전이라서 학문 간의 위계서열을 나누는 것까지는 찬동하지만, nothing but 화법에는 납득하지 못하는 편이다.
[8] 제임스 왓슨과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그 사람이다.
[9] F.Crick, 1966.
[10] G.Edelman, p.36.
[11] 한때 신경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샘 해리스가 영혼에 대하여 “그저 한 다발의 뉴런일 뿐이죠 뭐” 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또한 심리철학과 물리주의의 가장 핫한 떡밥들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12] 우리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13] Field, Hartry. Science without numbers.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14] 중국어 방 문제는 이러한 “기능주의”적 관점에 대한 반론 중 하나로 여기지는 사례다.
[15] Putnam, Hilary. “The nature of mental states.” Readings in philosophy of psychology 1 (1980): 223-231.
[16] 반면, 영화, 음악(공연 제외), 사진, 책과 같이 처음부터 디지털라이즈 되어 생산되는 예술은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원본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롭다.
[17] 물론 이는 정보와 연산능력 부족의 문제로 돌릴 수 있다. 라플라스의 악마 수준의 정보와 연산능력이 있다면 해결될 테니…
[18] 시뮬레이션이나 수치해석이 이런 목적으로 수행된다. 물리 법칙을 통해 현상을 모사하고 응용 방안을 찾을 때는 현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상과 완벽하게 똑같지 않고 일부 생략이 포함된 시뮬레이션 모델만으로도 현실 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는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다.
[19] 만약 모나리자를 정말로 가지고 싶어했던 외계인 창조주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던 시절의 지구를 쿼크 하나까지 완벽하게 똑같도록 복원해서 지구2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2가 모나리자 2를 그리도록 한다면 이 모나리자 2는 원본 지구와 지구2의 거주민의 입장에서 원본 모나리자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삽질은 환원주의를 주창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실행할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넘어설 것이다.
[20] 물론 예술가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주는 환경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므로 “사회학적인 측면의 연구도 필요하다는 시점에서 완전한 환원주의의 영역에 들지는 않는다.” 라고 따옴표 내에 해당하는 내용을 누가 수정했는데, 이 항목 내에서 논해지는 환원주의는 사화학적인 측면을 다시 심리학으로 환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사회학적 연구를 포함하는 것도 환원주의 영역에서 논의 가능하다. 다만, 환경적/사회학적 요소는 좀 더 간접적인 차원에서 환원되고 있으므로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서술한 것이다.
[21] 물리적 환원주의자들의 입장대로 그저 우리가 충분히 유능하지 않기에 여러 학문이 서로 구분되었을 뿐이라면, 아직 매워지지 않은 상관관계를 고려해 큰 성과를 낼 수도 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