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조지트 라이프(Joseph Wright)가 그린 [공기펌프 내의 새 실험](1768). 새를 공기펌프에 집어넣고 공기를 뺀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실험이 일반 가정집에서 이뤄진 점이 이채롭다. 이처럼 18세기 이후 실험은 중상층의 여흥이자 교화의 수단으로도 널리 확산되어, 과학은 허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확실한 실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지식 체계라는 과학관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과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책상이나 의자가 무수한 원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당연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을 그저 교과서에서 배웠을 뿐, 그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적 근거를 대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과학적 사실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참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 역시 교육과정에서 이런 내용을 습득함으로써 연구자의 삶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요컨대 과학적 사실의 확립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참임을 보증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과학적 사실은 처음 창출되는 과정에서 종종 커다란 논란에 휩싸인다. 가령 물 분자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적 주장 역시, 돌턴의 원자설이 제기된 이후로도 수십년간 경험적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과학적 사실의 경험적 근거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지켜 연구결과를 과장하거나 조작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논란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실험이란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경험적 결과를 주고, 그 때문에 과학이 과학다울 수 있는 것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실험과학의 역사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원자의 존재는 과학적 사실인가? 이 그림은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John Dalton, 1766-1844)이 [새로운 화학철학 체계]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원자 및 분자 기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오감으로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원자를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수용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또한 돌턴의 기호와 화학결합 규칙이 오늘날과 상당히 다른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물이 산소와 수소의 1:1 화합물로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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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경험과 개별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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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신기관]에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학문의 개혁을 위해 새로운 방법론을 주창하며 당시 최고의 지적 권위를 자랑하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론을 내리고 공리를 세우기 위해 응당 경험을 참조해야 할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의대로 질문에 답을 내려 놓은 뒤에야 경험을 참고하고, 그 경험이 답에 부합하도록 그것을 왜곡했다. … 이 점에서 그는 오늘날 그의 추종자들, 즉 경험을 완전히 포기한 대학의 스콜라 학자들보다 책임이 크다.
고대인들과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말과 논리에만 집착하고 사물에 대한 경험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비판은, 근대 초 과학혁명기에 새로운 과학을 주창한 이들의 상투적 논평이었다. 베이컨의 비전을 따라 런던 왕립학회를 창립한 학자들은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nullius in verba)”라는 구절을 학회의 모토로 삼았다. 그러나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역시 “먼저 감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자연학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조차 감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을 앞세우며 실험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과학혁명기의 과학자들은 선행 학자들을 부당하게 매도한 것일까? 해답은 과학혁명기를 거치며 ‘경험’의 의미와 위상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3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왕립협회의 모토는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nulius in verba)’이다. <출처 : (cc) Kaihsu Tai (좌), ⓒRoyal Society (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자연학의 모범은 확실성을 갖춘 기하학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학 역시 기하학처럼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술을 전제로 삼아 개별적인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연역적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자연학의 전제들은 자연세계에 관한 것이기에 경험적 명제의 형식을 띠었고, 보편적이어야 하기에 누구나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나 “무거운 물체는 떨어진다”와 같은 상식적 경험명제들이 그 전형적 사례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들은 자연적으로 늘 발생하기에 현재시제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특수한 개별 사건들은 자연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었고 이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모든 지식의 출발점은 경험이었으나, 그 경험은 특정 시공간의 특정인에게 발생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자연의 일반적 경향을 나타내야 했다.
그러나 과학혁명기를 거치면서 바로 이러한 경험 개념에 변화가 발생했다. 과학혁명기에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더불어 기존의 분류체계로 기술되지 않는 많은 동식물이나 광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적 삽화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발견을 기성의 분류체계에 억지로 끼워맞추기보다는 보고 겪은 대로 표현하자는 자연사의 자연주의적 흐름으로 이어졌다. 해부학이나 생리학에서도 베살리우스(Andreas Vaeslius, 1514-1564)와 같은 이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만을 토대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해명하려 했다. 요컨대 새로운 과학의 주창자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개별적 경험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사실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점차 나아갔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에 실린 인체 해부도. 베살리우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의학의 이론(대학의 의학부에서 주로 이뤄진 활동으로 인체에 관한 철학적 이해를 목표로 했다)과 실제(해부나 외과수술처럼 직접 집도를 하는 장인적 활동으로 대학의 철학적 의학에 비해 천시받았다)가 분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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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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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해부를 할 수 없는 이들이라면 베살리우스의 그림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신세계에서 보내 온 기이한 존재자들에 대한 보고들은 또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어중이떠중이들이 내세우는 저 보고들이 과연 말 그대로 ‘사실’일까? 이러한 문제는 과학혁명기를 거치며 등장한 ‘실험철학’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국의 화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을 비롯한 왕립학회의 회원들이 주창한 실험철학은, 특정한 시공간, 특정한 조건 하에서 관측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일 것,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그에 대한 해석이나 이론과 명료히 분리할 것을 요청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이들이 묘사한 사실은 특별히 제작된 기구들을 통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상황, 즉 실험적 조건하에서만 관측 가능했다. 그런 기구가 없어서 실험을 재현해 볼 수 없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보고를 과연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까? 예컨대 진공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진 보일의 공기펌프는 매우 값비싼 기구로서 일개 개인이 손쉽게 제작할 수 없었고, 기구의 제작원리나 작동원리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매우 파악하기 힘들었다. 둘째, 보일과 같은 이들이 사용한 과학기구들은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만들어내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었다. 실험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관련된 기구의 작동에 대한 ‘설명’ 혹은 ‘해석’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갈릴레이가 천문 관측에 사용한 망원경조차 하늘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간주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현상과 하늘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직접 비교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은 망원경의 작동원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혁명기에 도입된 새로운 과학 실험기구들, 차례대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망원경,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의 현미경, 로버트 보일의 공기펌프, 망원경과 현미경은 각각 육안으로 보기 힘든 아주 먼 세계와 아주 작은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공기펌프는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현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자연의 모습을 ‘실험적으로’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험, 즉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특수한 시공간적 조건하에서 만들어낸 개별적 경험을 자연에 대한 올바른 탐구방법으로 정립하려 한 새로운 과학의 주창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학문적 이상을 여전히 따르려는 이들은 자신의 실험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적 장치를 활용했다. 가령 갈릴레오는 [새로운 두 과학]에서 자신의 경사면 실험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이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수백 번에 걸쳐”라는 문구는 당시 대학의 철학자들이 빈번히 사용하던 문구로서, 갈릴레오는 이를 원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지배적 흐름을 형성한 전략은 실험의 목격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크게 두 가지 세부 전략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선 가능한 한 실험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직접 목격자’를 더 많이 확보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보일과 같은 이들은 소위 ‘가상 목격자’의 수를 늘리는 전략을 고안했다. 그들은 실험과정을 둘러싼 정황을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보고서를 읽는 독자들이 마치 실험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보고서는 실험의 주체가 명시돼 있었고 어떻게 작동하는 어떤 기구와 장치를 써서 실험을 수행했는지가 특정한 과거시제로 서술돼 있었다. 여기에 그 실험을 지켜본 ‘믿을 만한’ 직접 목격자들의 명단을 덧붙임으로써 보고서의 신뢰성을 더욱 높일 수도 있었다. 강력한 후원자의 후원을 받고 이를 언급하는 것 역시 실험 기구나 실험 보고서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전략이었다(네이버캐스트[갈릴레오와 후원]편 참조). 혈액순환설을 제창한 영국의 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이러한 전략의 유효성을 다음처럼 역설했다.
▷혈액 순환이 과연 인식 가능하고 지각 가능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스스로 직접 확인해보거나, 아니면 전문가들의 믿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는 대단히 확실한 무언가를 연구할 수도, 배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즉, 하비의 혈액순환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그 실험을 직접 재현해 봄으로써 ‘직접 목격자’가 되거나 하비와 같은 전문가의 말을 신뢰함으로써 ‘가상 목격자’가 되어야 했다.
│윌리엄 하비의 [피의 움직임에 대하여]에 나오는 “시각적 증명”, “정맥 속 판막의 기능을 보여준다. 하비는 해부와 실험을 통해 정맥과 동맥이 하나의 폐쇄 순환계를 이룬다는 혁신적 이론을 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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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구와 과학자사회를 통해 확립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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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학혁명기를 거치며 일군의 과학자들은 자명한 상식적 경험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특이한 개별적 경험, 즉 실험이 자연을 탐구하는 더 좋은 방법임을 깨닫고 이를 정당화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래전부터 자연에 대한 직접 경험을 강조해 온 연금술이나 장인 전통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당연시되던 자연관, 경험관을 비판하며 이러한 흐름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네이버캐스트 [베이컨주의]편 참조).2)이러한 경험 개념의 변화는 과학기구의 등장과 목격자들로 구성된 과학자들의 모임의 등장이라는 두 가지 큰 변화와 더불어 이뤄졌고, 이는 과학과 경험에 대한 서두의 물음을 해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선 실험철학의 등장으로 인해, 실험을 뒷받침하는 과학기구가 과학자들의 필수적인 연구 도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새로운 실험기구를 통해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가설을 세우며, 다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실험을 수행하는 복잡한 형태의 탐구 관례를 형성해나갔다. 물론 이론적 가설과 무관하게 실험에 실험이 이어지며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통상 이 기구들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특정한 이론이나 인위적 현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만큼, 새로운 실험적 사실은 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정립될 수밖에 없었다. 실험이 복잡해질수록, 사실은 아무런 해석이 가해지지 않은 중립적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과학기구나 장치,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 된다. 더욱이 새로운 실험기구나 장치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종종 매우 논쟁적이고, 이 때문에 실험적 사실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 과정 역시 종종 지난한 논쟁에 휩싸인다(네이버캐스트 [암묵지]편 참조).
│2011년 9월 빛보다 빠른 입자가 관측되었다는 보고에 대해 과학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발표를 듣는 모습. 결국 이 보고는 8개월간의 검증을 거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처 : ⓒ CERN>
그러나 과학자들이 매번 이러한 문제로 고심하거나 논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과학혁명기에 벌어진 두 번째 변화, 즉 실험철학이 전문가들의 단체와 동시에 등장한 대목을 주목할 만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과학혁명기에는 런던 왕립학회(1660년)나 파리 왕립 과학 아카데미(1666년) 같은 여러 전문 과학학회들이 등장했다. 특히 이 학회들은 실험이 자연을 탐구하는 탁월한 방법임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실험적 사실을 교환하고 축적하는 신뢰할 만한 네트워크를 형성해나갔다. 실험적 사실은 상세한 정황적 서술을 제공하는 보고서의 서술 양식 이외에도, 이러한 네트워크에 속한 신뢰할 만한 전문가들의 증언이나 검토를 통해, 반드시 해당 실험을 반복해보지 않고서도 그 신뢰도를 검증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과학자 사회에 보편화된 동료심사(peer review) 제도 역시 이러한 관습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과학적 사실은, 과학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될 뿐 아니라, 전문 과학자 사회의 신뢰를 통해 구축된 사실이 되었다. 이 역시 과학적 사실이 종종 논란에 빠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