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와 과학 정책가들이 과학을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한,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도 과학을 진학과 취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배움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다가오려면 먼저 과학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조셉 라이트의 ‘태양계 모형에 대해 강의하는 자연철학자(A Philosopher Lecturing on the Orrery)’ 그림 / 위키피디아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셉 라이트(Joseph Wright of Derby·1734~1797)는 ‘산업혁명의 정신을 표현한 최초의 화가’라고 일컬어진다. 에이브러햄 다비가 코크스 제철법을 개발한 것이 1709년, 제임스 하그리브즈가 제니 방적기(Spinning Jenny)를 발명한 것이 1764년, 제임스 와트가 개량된 증기기관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 1776년, 리처드 트레비딕이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만든 것이 1801년의 일이었으니 라이트가 활동했던 시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공업도시 더비에서 살았던 라이트는 부유한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산업혁명의 주역이 된 실업가와 과학자·발명가들의 모임인 ‘월광협회(Lunar Society)’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라이트는 서구세계 산업의 변혁을 선도하던 영국인들의 자신감과 낙관, 그리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경외 등을 표현한 그림을 남기게 되었다.

계몽의 시대, 새로운 교양

가장 잘 알려진 라이트의 작품 중 하나는 1766년 무렵 완성한 ‘태양계 모형에 대해 강의하는 자연철학자(A Philosopher Lecturing on the Orrery)’이다. 화폭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은 태엽과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정밀한 태양계의 모형이다. 태양 대신 중심에 놓인 촛불이 모형의 천체들과 화면 속 인물들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과학자는 태양계의 구조에 대해 강의하고 있고, 어른과 아이들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라이트의 작품 가운데 이와 쌍을 이루는 유명한 그림이 1768년의 ‘진공 펌프 안의 새에 대한 실험(An Experiment on a Bird in an Air Pump)’이다. 중세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가르쳤다. 물질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항상 다른 물질이 밀려들어와 메우게 되어 있으므로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여러 가지 기체를 활발히 탐구한 결과 근본 원소인 줄 알았던 ‘공기’는 사실 한 종류가 아니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면 진공상태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결국 산소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라부아지에가 원소 이론을 처음부터 새로 쓰는 ‘화학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진공 펌프는 태양계 모형 못지않게 당시 사람들에게 신기한 볼거리였다. 펌프를 돌려 공기를 빼낸 공간 안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지, 그리고 공기가 빠져나간 공간에 촛불을 넣거나 심지어 살아있는 생물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다. 과학자를 불러 강연을 들을 여력이 있는 신흥 중산층과 상류층 사이에서는 그림과 같은 시연이 성행했다.

진공 펌프로 유리 공 안의 공기를 빼내면 새는 결국 산소가 모자라 숨을 거두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림 속 소녀처럼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겠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림 속 소녀의 아버지처럼 공기와 호흡과 생명의 상관관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는 자연의 신비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듯 느끼고 경탄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영국의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과학을 문화로서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이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한 가족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이들이 과학 강연과 시연을 위해 자기 집에 따로 가정교사를 부를 정도로 부유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학은 문학이나 역사와 같은 전통적인 교양에 더하여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분야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과학 가정교사만 두었을 리도 없다. 즉 라이트의 그림에 묘사된 이들은 대중을 위한 공공교육보다는 가정교사를 통한 사적 교육으로 지식과 교양을 쌓았던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다.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여긴 과학

문화란 그 미덕을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나면 차차 확산되게 마련이다. 라이트가 그림을 그리던 때로부터 두 세대 정도가 지난 1827년,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Faraday·1791~1867)가 왕립과학연구소에서 크리스마스 강연을 시작했다.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변변한 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비범한 노력으로 영국 최고의 과학자가 된 패러데이는 어찌 보면 영국 산업혁명이 아니었다면 나타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패러데이는 대중과 소통하는 법을 잘 알았고, 1860년까지 오랫동안 크리스마스 강연을 맡으며 이를 런던의 명물로 만들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이들이 패러데이의 강연을 들었고, 과학이 알려주는 세계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었다.

패러데이의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는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Davy·1778~1829)의 강연이었다. 부유한 후원자들이 좋은 강연의 표를 사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는 관습 덕에 패러데이는 당대 최고의 화학자 데이비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강연에 감동한 패러데이는 데이비에게 편지를 보냈고 패러데이가 강연을 듣고 정리한 두툼한 노트를 받아 본 데이비는 이 청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조수로 삼기에 이르렀다.

스무 살 남짓한 가난한 직공이었던 패러데이는 왜 그다지도 열정적으로 과학 강연을 들으러 다녔을까? 좋아서, 재미있어서, 너무나 궁금해서 등등 여러 가지 답을 상상해볼 수 있겠지만 현실적 타산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처럼 현실적 타산과는 동떨어진 동기들이야말로 인류의 학문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과학이 발전하다 보면 산업과 경제에 이바지하는 일도 생기지만 과학이 그런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 즐기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한국에서 근대화나 부국강병과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배경은 그래서 뼈아프다. 숫자로 된 지표들만 놓고 보면 한국 과학은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는 수준에 올라섰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아직도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라는 데 머물러 있다. 과학자와 과학 정책가들이 과학을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한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도 과학을 진학과 취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배움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다가오려면 먼저 과학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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