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체 실험의 핵심 부품인 ‘비틀림 진동자’. 그 뒤로 KAIST 물리학과 김은성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과학동아 제공

 

 

2000년대 들어 격년으로 노벨 과학상을 받다시피 하다 보니 일본인 수상자가 25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필자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은 2008년 물리학상 수상자인 마스카와 도시히데 나고야대 교수다. 1940년생인 마스카와 교수는 수상자로 선정될 때까지 평생 외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관련 분야(물질·반물질 비대칭성)의 대가임에도 영어를 못해 국제학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식에도 안 가겠다고 해 주변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대학원 때나 기자를 할 때 외국 명문대에서 유학하고 외국 대학이나 연구소에도 꽤 있어서 업적이 뛰어나고 인맥도 좋고 여기에 매너도 세련되고 영어도 능숙한, 한마디로 대단한 과학자들을 여럿 봤다. 그때는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마스카와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수상자들을 보면서 결국 노벨상은 팔방미인 과학자가 아니라 어떤 분야를 만들거나 결정적인 기여를 한, 즉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영어회화를 전혀 못 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 서구 과학자와 인맥이 전무해도 독창적인 연구결과만 있으면 알아서 챙겨준다.

낚시에 비유하자면 우리나라는 준척급 붕어는 꽤 낚고 있음에도 월척 손맛은 아직 못 본 형국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과학계라는 저수지에는 월척 붕어가 살고 있기나 한 걸까.

2004년 실험으로 존재 증명했지만

초고체는 고체이면서 초유체인 물질이다. 외부의 힘으로 구성 원자의 위치가 변해도 힘이 사라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고체이면서(왼쪽) 결정 격자에 원자 하나가 빠진 결함(빈 공)이 있을 때 원자가 격자 사이를 점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초유체의 특성을 보인다(오른쪽). 60여 년 전 초고체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됐기만 아직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네이처 제공

 

 

솔직히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템은 하나뿐이다. 바로 초고체라는 이상한 물질로 그 존재가 확인된다면 이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개척자 가운데 세 손가락에 드는 사람이 바로 카이스트 물리학과 김은성 교수다. 김 교수는 20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물리학과 모제스 첸 교수팀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세계 최초로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필자가 ‘존재가 확인된다면’이라는 문구를 쓴 건 김 교수의 2004년 실험이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반박이 이어졌고 심지어 2012년에는 지도교수인 챈 교수조차 자신들이 틀렸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다만 김 교수는 여전히 자신의 실험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다른 실험을 통해 초고체가 존재한다는 논문 세 편이 발표됐다. 학술지 ‘네이처’ 5월 23일자에는 이에 대한 해설이 실렸는데 초고체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초고체가 뭐길래 “있다” “없다” “아니, 있다”는 식의 엇갈린 주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까.
물질은 보통 세 가지 상 가운데 하나로 존재한다. 고체, 액체, 기체다. 고체는 구성 원자(또는 이온이나 분자) 사이의 상대적 공간 좌표가 일정 범위 안에서 정해진 물질이다. 고체를 누르면 살짝 수축하며 원자 사이의 거리가 약간 가까워질 수 있어도 제멋대로 바뀌지는 않는다.

반면 물 같은 액체는 외부교란이 없을 때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도 확대해 보면 구성 원자(또는 분자)가 요동하면서 상대적인 위치가 끊임없이 바뀐다. 기체는 말할 것도 없다. 액체와 기체를 합쳐 유체(fluid)라고 부르는 이유다.

1937년 러시아(당시 소련)와 캐나다의 연구자들은 각각 초유체라는 이상한 물질 상태를 발견했다. 헬륨-4(양성자 두 개, 중성자 두 개)는 절대온도 4.22K 밑에서는 액체가 되는데 온도를 더 낮춰 2.17K에 이르자 헬륨 원자 사이에 점성이 사라지면서 액체헬륨이 제멋대로 흐르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기존 유체보다 훨씬 더 잘 흘러(마찰력이 없기 때문에) 접두사 ‘초(super)’를 붙였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찾던 연구자들은 2.17K보다 낮은 온도에서 액체헬륨의 원자들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상태가 되면서 초유체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양자역학에서 입자는 스핀이라는 성질이 반(半)정수냐 정수냐에 따라 전자는 페르미온(fermion), 후자는 보손(boson)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보손만이 동일한 양자상태에 놓일 수 있어서 여러 입자가 겹칠 수 있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이 가능하다.

헬륨-4의 경우 페르미온인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각각 두 개씩 존재하는 원자로 다 합치면 보손이 되기 때문에(반정수+반정수=정수) 극저온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이 일어나면서 초유체가 된 것이다.

고체이면서 초유체인 물질

최근 양자 기체를 일정한 배열로 배치한 뒤(고체에 해당) 초유체 현상을 관찰해 초고체임을 보인 논문 세 편이 발표돼 주목을 받았다. 왼쪽은 마찰 없이 흐르는 초유체를 묘사한 그림으로 원자의 밀도가 균일하면서 약간의 편차를 보인다. 가운데는 초고체로 공간에 일정한간격으로 배치된 원자들(방울. 결정 격자에 해당)이 결맞음 행동을 보여 초유체(보스-아인슈타인 응축)임을 나타낸 그림이다. 오른쪽은 방울 사이에 결맞음이 없는 평범한 고체 상태다. 하늘색은 원자의 밀도가 낮은 영역이고 빨간색이 짙어질수록 밀도가 높다. 네이처 제공

 

 

1957년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유진 그로스는 고체이면서 동시에 초유체인 물질이 존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체는 구성 원자의 상대적인 좌표가 일정 범위 안에 고정된 상태이고 초유체는 유체(액체)보다도 유동성이 큰 상태다. 따라서 한 물질이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건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초유체는 본질적으로 반(反)직관적인 양자역학에 따른 현상이기 때문에 모를 일이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물질을 초고체(supersolid)라고 불렀는데, 약간 문제가 있는 작명이다. ‘초유체(superfluid)+고체(solid)’를 줄인 것인데 ‘초’가 ‘고체’를 수식하는 형태라서 ‘다이아몬드보다도 딱딱한 고체’라는 인상을 준다. 초고체는 고체이면서 초유체인 물질이므로 이런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는다.

그 뒤 몇몇 물리학자들이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험에 뛰어들었지만 다 실패했다. 그런데 2004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모제스 첸 교수와 대학원생 김은성이 ‘비틀림 진동자’라는 기발한 장치를 써서 초고체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논문을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잇달아 발표하면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두 사람은 절대온도 0.2K의 극저온에서 액체 헬륨-4에 압력을 높여 고체로 만든 뒤 이를 회전시킬 때 일어나는 진동주기의 변화를 측정해 고체 헬륨을 이루는 원자의 일부가 초유체가 된다는 사실을 보였다. 온도를 낮추면 어느 순간 진동주기가 짧아지는데 이는 진동자내부의 고체헬륨의 양이 줄었다는, 일부가 초유체가 됐다고 보면 설명이 된다.

김 교수는 2006년 카이스트 물리학에 부임한 뒤에도 초고체 연구를 계속했고 2004년 실험을 반박하는 논문이 2010년 6월 나오자 이을 재반박하는 논문을 2010년 12월 10일자 ‘사이언스’에 발표하면서 주목 받았다. 당시 ‘과학동아’ 기자로 있던 필자는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아 2011년 1월호에 초고체를 포함한 물리학계의 기이한 물질 세 가지를 소개하는 특집을 기획했다.

2010년 ‘사이언스’ 논문은 일본 와코 이화학연구소 저온물리연구실에 있는 장비로 실험한 결과였고 마침 연말에 김 교수와 챈 교수가 이화학연구소에서 만나기로 해 필자도 동행취재했다. 당시 챈 교수는 김 교수를 가리켜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라며 치켜세웠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 자세한 내용은 ‘과학동아’ 2011년 1월호 ‘초고체, 원자 따로 노는 ‘구름’ 결정’ 참조)

그런데 챈 교수가 2012년 자신들의 2004년 실험의 해석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장치로 초고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 논문을 ‘피지컬리뷰레터스’에 발표하면서 충격을 준 것이다. 현재 학계는 고체헬륨이 초유체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2010년 12월 일본 와코 이화학연구소 저온물리연구실에 초고체 연구를 하는 한미일 물리학자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펜실베니아주립대 모제스 챈 교수, 게이오대 시라하마 게이야 교수, KAIST 김은성 교수, 리켄 코노 키미토시 박사. 그러나 2년 뒤 챈 교수가 고체헬륨이 극저온에서 초고체라는 2004년의 발견이 틀렸다고 선언하면서 스승과 제자가 갈라졌다.

 

 

양자 기체에서 초고체 현상 구현

고체헬륨으로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험이 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 몇몇 물리학자들은 양자 기체로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를 입증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최근 ‘피지컬리뷰레터스’에 실린 논문 한 편과 ‘피지컬 리뷰 Ⅹ’에 실린 논문 두 편이 그 결과물로 학계에서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이라 여기서는 ‘피지컬리뷰레터스’에 실린 논문을 소개한다.

이번 실험을 이해하려면 ‘물질의 밀도 변이가 주기적인 상태’로 고체의 개념을 넓혀야 한다. 여러 원자로 이뤄진 방울이 주기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상태(고체)에서 초유체 현상이 나타나 초고체가 존재함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양자 기체(quantum gas)란 절대온도 0도보다 불과 수백만 분의 1도 높은 극저온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현상을 보이는 초유체가 되는 기체다. 연구자들은 자기쌍극자모멘트가 큰 원소인 디스프로슘-162에 자기장을 걸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시킨 뒤 극저온에서 수십 밀리초 동안 초유체 현상을 보임을 확인했다. 고체헬륨-4가 초고체임을 보인 실험은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는데 이번 실험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체헬륨-4 실험은 어떻게 됐을까. 김 교수 실험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예전만큼 연구가 활발한 것 같지는 않다. 2016년 학술지 ‘피지컬 리뷰 B’에 논문을 한 편 냈고 현재 ‘회전하는 고체헬륨에서 초유체 같은 비틀림 진동자 반응’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해 심사를 받고 있다는 언급이 있다.

물리학계에서 초고체의 존재를 점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고체헬륨이 초고체라는 김 교수의 2004년 발견을 좀 더 명쾌하게 입증할 수 있는 실험이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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