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8년 유럽의 30년 전쟁이 끝났다.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한 개신교와 가톨릭 국가들과의 종교전쟁이었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루터파와 칼뱅파가 승인을 받고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지지했던 종파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전쟁이 종결되자, 사람들은 신학교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에 염증을 느꼈고 자연스레 종교보다는 당시 발전하는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자식이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과학자가 되어 세속적으로 성공을 하기 원하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지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아이작 뉴턴(1642~1727)이 1687년 발표한 《프린키피아 Principia》의 영향으로 과학혁명이 진행될 때였다. 천문학이 큰 진전을 이루고, 만유인력의 법칙과 미분의 발견으로 물리학과 수학이 크게 발전했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은 대대로 내려온 학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비판했다. 의 ・약학에서도 큰변화가 일어났다. 독일 태생의 스위스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파라켈수스(1493~1541)가 나타나 환자 치료는 실험과 관찰을 통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약물을 섞어서 처방하는 것은 유효성분을 희석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약도 독이며, 약과 독의 차이는 용량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치료란 화학물질이 몸속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연금술의 과제는 금 ・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을 만드는 것이라는 혁신적인 사상을 펼쳤다. 파라켈수스 이전의 의사들은 기존에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따를 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의료에서 처방이 복잡해 약 짓기가 힘들었다. 약의 품질이 같지 않아 처방하는 의사와 약을 짓는 약사를 위해 표준화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런 목적으로 17세기 영국을 시작으로 약품의 품질을 규정하는 약전이 생겼고, 18세기에는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의 ・약학은 미신적인 것이 많았다. 치료에 독성물질 수은을 사용하거나 피를 과량 빼는 방법 등으로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곤 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실험약리학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었다. 실험약리학은 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정확하게 측정해서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다.
이를 통해 실험과정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여러 가지 결과를 바탕으로 일관된 법칙을 끌어내게 되었다. 독일 바이엘은 최초의 약리학 연구소를 설립해 아스피린을 개발했다. 의료와 제약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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