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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0월 18일 미국 전역의 도시들을 밝히던 전등이 1분 동안 일제히 꺼졌다. 바로 그날 사망한 천재적인 발명가 에디슨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84년의 생애 동안 1093개의 특허와 2000여 개의 발명품을 남겼다. 성인이 된 후로 따지면 약 열흘에 한 개꼴로 발명품을 내놓은 셈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탓에 3개월 만에 학교를 중퇴한 에디슨은 12세 때부터 철도역에서 신문을 팔았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로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하루 6시간 이상은 자지 않으며 발명에만 매달렸다. 백열전구를 비롯해 축음기, 축전지, 영화 촬영기 등이 모두 그의 발명품이다.
1983년 미국 의회는 그의 생일을 ‘발명가의 날’로 지정했으며, 1997년 ‘라이프’지는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 1위로 에디슨을 선정했다. 20세기 미국인들은 이처럼 치열한 그의 전기를 읽으며 성장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 그의 말은 한때 전 세계인에게 회자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단 한 곳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자에게 가장 영예롭다는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 이에 대해 노벨상위원회가 발명가에 대한 수상을 꺼려했다는 주장이 있다. 19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리프만이 그 근거다. 리프만은 최초로 컬러사진을 발명한 공로로 노벨상은 받았지만, 그것이 현대 컬러사진의 원리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이후 발명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디슨에게 노벨상 수상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1912년 노벨상위원회는 물리학상 수상자 후보로 에디슨을 지목했다. 그런데 공동 후보로 지목된 테슬라가 에디슨과 함께 받는 상은 싫다며 거절했다. 결국 그해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무인 등대의 자동조명 시스템을 개발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달렌으로 결정됐다.
직류 vs 교류의 전쟁에서 패배
에디슨과 테슬라의 악연은 1884년 6월 테슬라가 에디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테슬라는 직류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에게 더 실용적인 교류전기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미 직류전기에 많은 투자를 한 에디슨은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후 또 하나의 묘한 사건으로 둘 사이는 더욱 틀어졌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모터 및 발전기의 효율을 높이는 데 성공할 경우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테슬라가 정말로 성공시키자 에디슨은 5만 달러 대신 주급을 조금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화가 난 테슬라는 결국 에디슨연구소를 뛰쳐나와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테슬라는 에디슨이 거절한 교류전기의 연구에 매진해 세계 최초의 교류 전기 모터와 변압기 등의 특허를 획득했다. 그러자 웨스팅하우스 사가 테슬라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며 이 특허들을 사들인 후 대대적인 교류 송전 사업을 추진했다.
에디슨이 추진하던 직류는 전류의 방향과 세기가 일정한 전류를 말한다. 따라서 직류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하면 전류를 세게 하기는 쉽지만 전압을 높이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테슬라의 교류 방식은 전류를 세게 만들기 어려워도 전압을 높이는 건 쉽다.
전기를 전송하는 전선에는 저항이 있어 멀리 송전할수록 전기량이 줄어들게 된다. 때문에 전압을 높이기 어려운 직류의 경우 송전 범위가 발전소 주변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류는 발전소를 전기 소비 지역에 가까이 지을 필요 없이 어디든 발전소를 세울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 같은 결정적인 차이로 인해 직류와 교류의 전쟁에서 에디슨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이 후 에디슨은 JP모건은행에게 에디슨전기회사를 양도해야 했으며, 앙숙이 된 테슬라의 거절로 노벨 물리학상의 최종 후보 명단에서도 제외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런데 에디슨에게는 또 한 번의 노벨상 수상 기회가 있었다. 전구의 밝기 개선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에디슨 효과’ 덕분이다. 에디슨은 탄소필라멘트를 수명이 더욱 긴 대나무 숯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대나무 필라멘트가 증발해 전구 안쪽의 유리벽에 검댕이 생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에디슨 효과’ 발견했으나 규명하지 않아
에디슨은 그 같은 검댕 현상을 순수한 금속 필라멘트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필라멘트 사이에 금속판을 넣고 백금으로 만든 선에 연결하자 백금 조각과 필라멘트 사이의 진공관에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 관찰된 것. 더욱 신기한 건 백금 조각을 양극에 연결하면 허공에 전류가 흐르지만 음극에 연결했을 땐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당시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현상이었다. 에디슨은 그 현상과 더불어 그를 증명하는 특별한 램프를 만들어 특허출원을 했다. 하지만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규명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다른 발명에 매달렸다.
이후 월리엄 프리스에 의해 ‘에디슨 효과’라고 명명된 이 현상을 규명한 이는 영국의 물리학자 리처드슨이었다. 그는 거듭된 실험을 통해 에디슨 효과가 진공상태에서 자유전자의 발생과 이동으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라는 걸 증명해냈다.
사실 백금 조각을 넣은 에디슨의 실험용 전구는 사상 최초의 전자기기용 진공관이었던 것이다. 에디슨 효과는 진공관에 응용되면서 무선전신,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등 전자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다. 에디슨 효과를 증명한 리처드슨은 192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나, 이번에도 에디슨은 역시 공동 수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에디슨이 최초의 진공관을 발견하고도 그에 대한 연구를 하지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난무한다. 당시 여러 가지 특허 분쟁과 채권 문제 등으로 골치를 앓던 터라 더욱 시장성 있는 제품을 발명하기 위해 그 현상에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설명이 그중 하나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탓에 평소 이론 규명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방법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수없이 시도하는 시행착오적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에 대해 에디슨은 ‘쓸모없는 실패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과학적 이론의 부족은 그의 치명적 단점이기도 했다.
19세기 최고 천재들의 ‘빛 튀기는’ 전류 전쟁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기의 대결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천재 과학자가
전기의 송전 방식을 두고 맞붙은 것입니다.
직류(DC) 전기 시스템을 주장한
발명왕 에디슨
VS
교류(AC) 전기 시스템을 주장한
전기의 마술사 테슬라
전류 전쟁(current war) 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의 결과는 일단 테슬라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교류가 지금 우리가 쓰는 전기의 표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빛을 둘러싼 천재들의 결투 과정은 어둠보다 더 음산하고 험악했다고 하는데요.
천재들은 어떻게 싸웠으며
당시 세상은 어떻게 그들의 승패를 판정했을까요?
사장님의 몹쓸 미국식 유머
에디슨과 테슬라, 숙명의 라이벌은 회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공학 공부를 한 테슬라는 에디슨의 유럽 자회사에서 일하며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실력은 미국까지 소문이 났고 곧 에디슨이 있는 미국 연구소에 발탁됩니다. 미국에 온 테슬라가 처음 맡은 일은 직류기계장치의 모터를 개량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모터와 발전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설계를 요구하며 성공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몇개월 뒤 테슬라가 그 일을 해내자 ‘이것이 미국식 유머’라고 발뺌하며 돈을 주지 않았다는데요. 대신 주 18달러의 봉급을 28달러로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건네죠. 테슬라는 이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고 에디슨 연구소를 뛰쳐나왔습니다.
만약 에디슨이 약속을 지키는 착한 사장이었다면
전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테슬라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사실 에디슨의 회사에 입사하기 전부터 교류전기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후에는 에디슨에게 교류전기를 제안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직류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에디슨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죠. 동상이몽으로 시작한 둘의 잘못된 만남은 필연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직류냐 교류냐’ 전류전쟁의 시작
테슬라는 결국 1886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에 교류 시스템에 필요한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모두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억만장자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투자에 힘입어 산업용 발전기를 개발한 다음에는, 에디슨이 장악한 전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테슬라의 교류방식은 에디슨의 직류방식보다 싸고 편리하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에디슨은 120볼트(V)의 전기를 생산해 각 지역으로 전송했는데 전선의 저항 때문에 전기량이 감소돼 직류 발전소를 소비지 가까이에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테슬라의 교류 발전기는 수천 V에 이르는 고전압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전압이 높으니 전선을 지나며 전기량이 줄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발전소를 소비지에서 먼 곳에 짓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도시 근처에 변압기를 설치해 110V로 전환해 공급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싸고 좋은 물건은 금방 소문나기 마련. 곧 ‘교류가 직류보다 좋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논리에서 밀린 에디슨의 직류 제국은 위기에 몰렸죠.
사형수까지 동원된 죽음의 결투
궁지에 몰린 에디슨은 비열한 방식으로 테슬라를 공격했습니다. 처음은 신문광고였습니다. 교류는 저주받은 위험한 것으로 법으로 금지해야 하며 직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실었죠. 이에 테슬라는 몇 백만 V가 흐르는 전기 불꽃 밑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사진 한 장을 공개하면서 여론을 뒤집었습니다.
에디슨은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더 잔인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개와 고양이를 사들여 사람들 앞에서 그 가엾은 동물들을 전기로 태워버렸습니다. 대중들이 교류를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죠. 수많은 동물이 희생됐습니다. 1,500명이 보는 앞에서 코끼리를 감전사시키는 죽음의 쇼를 벌이기까지 했는데요. 코끼리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급기야 사형 집행에 교류전기의자를 도입하도록 로비해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가 주도한 전기 사형 집행식은 실패로 끝났지만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습니다.
결국 테슬라는 몸을 내던지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자신의 몸에 고주파 교류 전기를 직접 통과시키는 실험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는 당당히 실험을 성공시켰고 교류 전기의 안전성을 입증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나이아가라 발전소 등 대형 계약을 줄줄이 따낼 수 있었습니다.
교류가 승리한 것입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13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전쟁을 소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장거리 직류 송전이 가능해졌기 때문인데요. 4차 산업혁명시대엔 여러 산업분야에서 직류 송전방식이 더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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