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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는 연간 1억t이 넘는 바나나가 생산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에 선 보인 필리핀 고산지 바나나. [롯데마트=연합뉴스]

 

전 세계에서는 연간 1억t이 넘는 바나나가 생산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에 선 보인 필리핀 고산지 바나나. [롯데마트=연합뉴스]

전 세계에서 한 해에 생산되는 바나나는 대략 1억t이 넘는다. 돈으로 따지면 50억 달러(5조4500억원)어치다. 이런 바나나가 곰팡이의 공격을 받아서 죽어가고 있다. 10년 전부터 바나나가 멸종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류가 사랑하는 바나나가 처한 위기는 생물 종 다양성, 유전적 다양성이 생태계 혹은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벼랑 끝에 선 바나나

인도네시아 바나나 농장에서 농민이 고객을 기다리며 낮잠을 자고 있다. [연합뉴스]

인도네시아 바나나 농장에서 농민이 고객을 기다리며 낮잠을 자고 있다. [연합뉴스]

 

195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고 있는 바나나 품종은 카벤디시(Cavendish)다. 대략 전 세계 바나나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카벤디시 바나나는 영국의 윌리엄 카벤디시 공작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카벤디시 공작은 1834년 모리셔스에서 보내온 바나나를 정원사에게 맡겨 기르게 했고, 정원사는 온실에서 이 바나나를 기른 뒤 다시 세계 곳곳으로 보냈다.
이 카벤디시가 널리 재배되기 전에는 그로스 미셸(Gros Michel)이란 바나나가 널리 재배됐다. 그런데 푸사리움(Fusarium)이란 곰팡이가 바나나에 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나나의 뿌리를 공격, 썩게 하는 이 병은 파나마에서 100여 년 전 처음 발견돼 파나마병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병은 파나마에서 인근 국가로 번지면서 그로스 미셸 품종은 점차 사라졌고, 카벤디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벤디시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파마나 병을 일으키는 푸사리움의 변종 TR4(Tropical Race 4)의 공격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TR4는 1990년대에 대만에서 처음 발견됐고, 이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호주는 물론 파키스탄, 레바논, 요르단, 오만, 모잠비크 등 중동·동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TR4 바나나 병 피해지역

TR4 바나나 병 피해지역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이 TR4 탓에 2012년 전 세계 바나나 생산량은 전년도보다 3.8% 감소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TR4에 대응할 수 있는 새 품종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5~10년 후에는 전 세계의 식탁에서 바나나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바나나 위기의 원인은

필리핀 바나나 농장 [중앙포토]

필리핀 바나나 농장 [중앙포토]

 

농장에서 재배하고 있는 바나나는 씨앗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생식으로 번식한다. 바나나의 수꽃은 꽃가루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바나나를 잘라내면 남은 그루터기에서 생장지(basal shoot)가 나와 자라는데, 농부들은 이 생장지를 옮겨 심는 방식으로 번식시킨다. 이 때문에 같은 품종의 바나나는 유전자가 거의 동일하다. 한번 곰팡이가 감염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이유다.
바나나를 공격하는 푸사리움 곰팡이는 포자를 만드는데, 이 포자를 통해 번져 나가기도 하고 나무껍질 등에 균사가 붙어 퍼지기도 한다. 이 곰팡이가 감염된 바나나 나무 중에서도 일부는 증상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농부들은 감염되었는지 모르고 계속 심는데, 그러다가 일순간 곰팡이가 빠르게 번지게 된다.

이 곰팡이는 바나나가 아닌 다른 잡초에도 증상을 나타내지 않고 붙어있을 수 있다. 바나나를 베어내고 다시 심어도 곧잘 재발하는 이유다.

TR4 병에 감염돼 말라버린 바나나 [중앙포토]

TR4 병에 감염돼 말라버린 바나나 [중앙포토]

 

곰팡이 포자는 땅속에서 30년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데, 숙주인 바나나의 뿌리가 근처로 뻗어오면 잠에서 깨어난 포자가 발아해 뿌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곰팡이를 죽이는 살균제(fungicide)나 다른 화학물질을 처리해도 효과가 없어 카벤디시 바나나를 공격하는 곰팡이는 세계 곳곳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감자

1850년 대기근으로 큰 고통을 받았던 아일랜드 사람들 [중앙포토]

1850년 대기근으로 큰 고통을 받았던 아일랜드 사람들 [중앙포토]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850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감자 잎마름병이다. 남아메리카 원산인 감자는 1530년경 유럽에 전해졌고, 19세기 초에 이르면 감자는 아일랜드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1845년 하등 곰팡이 종류인 피토프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hora infestans)가 일으키는 감자 잎마름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일랜드에서 재배된 감자는 거의 동일한 조상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감자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덩이줄기를 잘라 심고 기르기 때문에 아일랜드 내 감자의 유전자는 동일했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아일랜드 감자는 모두 곰팡이에 취약했고, 결국 대부분 말라 죽었다.
감자에 크게 의존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농사 흉년으로 굶주리게 됐다. 1845~1852년 사이 대기근 동안 아일랜드 인구는 25%나 줄었고, 많은 사람은 미국에 이민을 떠나게 됐다. 대기근이 발생한 데는 다른 정치·사회적 요인도 작용했겠지만, 감자의 유전자 다양성이 낮아 병균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이 감자 잎마름병은 남미에서 저항력을 가진 감자 품종을 다시 들여오면서 해결됐다.

미국 옥수수 벨트를 휩쓴 감염병

미국의 한 농가에서 농부들이 트랙터를 사용해 옥수수를 대량 파종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의 한 농가에서 농부들이 트랙터를 사용해 옥수수를 대량 파종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중부 옥수수 벨트(Corn Belt) 농부들은 대량으로 재배하는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같은 옥수수 포기의 수꽃에서 나온 꽃가루를 같은 포기의 암꽃이 받아들이는 자가수분을 방지하기 위해 열매가 열릴 옥수수 포기에서는 수꽃 이삭을 일일이 손으로 떼어냈다. 다른 포기의 꽃가루가 와서 꽃가루받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드넓은 농지에서 손으로 수꽃 이삭을 떼는 일은 힘든 작업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꽃이 불임인 옥수수를 개발했고, 대신 꽃가루를 제공할 옥수수를 별도로 심었다. 하지만 수꽃이 불임인 옥수수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한 가지 유전자 타입의 옥수수만 사용하는 바람에 드넓은 옥수수 벨트 전체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게 됐다.
1968년 미국 옥수수 벨트에서는 옥수수 잎마름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비폴라리스 마이디스(Bipolaris maydis)라는 곰팡이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유전적으로 동일한 옥수수는 이 곰팡이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1970년 미국 옥수수 벨트 전체의 생산량이 15%나 줄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옥수수가 완전히 죽어버렸고, 미국 전체로도 1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농부들은 감염된 잔재물을 태우거나 묻어버리고, 다시 유전자를 변형시키지 않은 원래 옥수수 품종을 심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 위기의 해법은 없나

제주시 오등동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온실에서 성기철 연구관이 바나나의 꽃포(苞·꽃대의 밑 또는 꽃 꼭지의 밑에 있는 비늘 모양의 잎)를 보며 바나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시 오등동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온실에서 성기철 연구관이 바나나의 꽃포(苞·꽃대의 밑 또는 꽃 꼭지의 밑에 있는 비늘 모양의 잎)를 보며 바나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학자들은 바나나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씨앗으로 번식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로스 미셸이나 카벤디시 바나나가 씨앗을 맺지 못하는 것은 ‘씨 없는 수박’처럼 염색체가 3벌이 있는 3배체수(triploid)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교배를 통해 씨앗을 가진 4배체수(tetraploid) 바나나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소비자들은 씨앗이 있는 바나나에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4배체수 바나나끼리 다시 교배시켰을 때 유전자가 유지되지도 못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1월 호주 퀸즐랜드 공과대학 연구팀은 카벤디시 바나나의 유전자(RGA2-3)를 변형시켜 TR4에 저항성을 가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야생에서 자라는 바나나에서 얻은 유전자를 카벤디시 바나나에 집어넣었는데, 푸사리움 곰팡이가 퍼져있는 땅에서 3년 동안 완벽하게 잘 자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해당 유전자를 변형시킨 경우도 20% 미만만 감염증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카벤디시 바나나가 67~100% 증상을 나타낸 것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향후 이처럼 유전자를 변형시킨 새로운 카벤디시 품종이 보급되면 TR4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반면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데 대한 우려 때문에 보급이 안 될 가능성도 있다.

 

 

유전적 다양성 보존이 중요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 상황을 담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인공위성 사진.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 상황을 담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인공위성 사진.

결국 카벤디시 바나나 사례나 아일랜드 대기근, 미국의 옥수수 마름병 사례는 인류가 하나의 품종에만 의존할 경우 언제든지 재앙이 닥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농작물 품종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예상하지 못한 감염병이 발생해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유전적 다양성 확보는 소규모 농업을 존속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소품종 대량생산에 맞춰져 있는 대규모 기업농으로는 다양한 품종을 지켜낼 수가 없다.
자연 생태계 내에서는 기존 작물을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식물이 존재한다. 열대우림 속에는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해도 그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한 식물들도 많다. 어쩌면 인류는 70억, 10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을 찾아내기도 전에 열대우림을 파괴해 그 식물을 멸종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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