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같은 옥수수뿌리벌레


옥수수에 치명적인 해충 중에 디아브로티카 버지페라(Diabrotica virgifera)라는 딱정벌레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옥수수뿌리벌레라고 불리는 이 벌레는 미국의 옥수수를 초토화시켜서 살충제를 엄청나게 뿌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흙 속에 사는 이 벌레를 잡겠다고 뿌리에 농약을 뿌리면, 농약은 토양조직에 흡착돼버리고 땅속 깊이 있는 곤충에게는 제대로 닫지 않아서 살충제로서의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옥수수의 뿌리에서 직접 곤충을 죽일 수 있는 독소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게 만드는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만들었습니다. 바실러스 투린지엔시스(Bacillus thuringiensis)라는 세균에서 유래된, Bt 독소라고 불리는 이 독소는 곤충의 장에 천공을 만들어 곤충을 죽입니다. 그러니까 유전자를 조작해서 옥수수 뿌리가 직접 살충제를 만들어 뿌리게 만든 거지요.
하지만 또다른 문제가… 한동안은 Bt 옥수수에서 잘 죽던 옥수수뿌리벌레가 언젠가부터 잘 죽지 않는 저항성으로 돌변했거든요.
이런 걸 보면… 정말 인간은 자연을 앞서 갈 수 없나 봅니다.

 

옥수수를 두고 인간과 경쟁하는 옥수수뿌리벌레입니다.

 

 

미국에서 옥수수뿌리벌레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유럽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유전자조작 옥수수인 Bt 옥수수를 심을 필요도 없었죠.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옥수수뿌리벌레를 해결할 새로운 돌파구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은 먼저 유럽과 미국의 옥수수를 분석해 어떤 차이가 있나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유럽 옥수수의 뿌리는 베타 카이로필렌이라는 물질을 생산하지만, 미국 옥수수는 전혀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렇게 예상합니다. 옥수수뿌리벌레가 베타 카이로필렌을 싫어하나 보다, 그래서 유럽 옥수수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병도 안 나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알고보니 옥수수뿌리벌레는 베타 카이로필렌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던 거죠. 옥수수뿌리벌레에게 베타 카이로필렌이란… 별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충이 왔다!


기대했던 베타 카이로필렌이 열쇠가 아니면 무엇이 열쇠일까요?
과학자들은 일단 옥수수뿌리벌레가 옥수수를 공격하지 못하는 유럽 옥수수밭의 흙에 유럽 옥수수와 미국 옥수수 둘 다 심고 관찰해보기로 합니다. 흙이 달라졌으니 무슨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큰 변화 없이 유럽 옥수수는 여전히 잘 자라고 미국 옥수수는 계속 벌레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답 찾기 힘드네요.

 

그러다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미국 옥수수의 뿌리 근처에 죽어 있는 옥수수뿌리벌레를 관찰했더니 이 벌레의 몸속에서 실처럼 생긴 움직임을 관찰한 것입니다. 마치 수백 마리의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듯한 형태였습니다. 

얘네들한테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이 생명체가 바로 선충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곤충을 죽이는(병원성이 있는) 선충’이라고 부르는 선충의 한 그룹이죠. 좀더 조사해보니 해충의 몸속은 물론이고 유럽 옥수수의 뿌리 주위에도 이 곤충 병원성 선충이 엄청나게 많이 발견됐습니다.
뭔가 감이 오는군요!

 

 

선충도 미생물에 속합니다. 곰팡이처럼 다세포생물이지요. 사진은 선충계의 슈퍼스타, ‘엘레강스’한 ‘예쁜꼬마선충’입니다. 생물학 연구에서 대표적인 모델 동물이죠.(위키피디아)

 

 

앞서 두 옥수수 품종에서 유일한 차이는 베타 카이로필렌이라는 냄새를 풍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였습니다.
유럽 옥수수의 뿌리는 베타 카이로필렌을 생산하지만 미국 옥수수는 전혀 생산하지 않았다고 했죠?
과학자들은 옥수수뿌리벌레는 이 냄새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지만 혹시 옥수수뿌리벌레 속에 있는 선충은 반응하나 싶어서 실험을 해봤습니다.
결론은 역시나 이 냄새가 선충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선충은 베타 카이로필렌의 냄새를 맡기만 하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결국 베타 카이로필렌 냄새를 맡으면 선충은 그쪽으로 향하고 거기서 만난 곤충의 몸속으로 들어가 곤충을 죽이는 것이었죠. 미국 옥수수는 이 냄새를 풍기지 않기 때문에 선충은 다가오지 않고 옥수수뿌리벌레는 별다른 방해 없이 옥수수 뿌리를 갉아먹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유럽 옥수수가 해충으로부터 안전한 이유는 바로 선충… 덕분이었을까요?
그런데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았습니다.

 

 

가운데 통에 있던 선충은 베타 카이로필렌 냄새를 맡으면 홀린듯이 그쪽으로 몰려갑니다. 

 

미국 옥수수는 왜 카이로필렌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렸을까?


유럽 옥수수는 어떻게 해서 베타 카이로필렌을 만드는 유전자를 가지고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 걸까요? 혹은 미국 옥수수도 원래 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찌어찌 해서 잃어버린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국 옥수수 품종들은 맛과 크기 등 상품으로서 잘 팔리기 위해 여러 차례의 교배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애초에는 카이로필렌 냄새를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옥수수 알의 크기, 키, 병에 대한 저항성 등 다른 형질(유전자)을 중심으로 교배되다 보니 뿌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경 쓸 수가 없었고, 그러는 사이 생각지도 못하게 베타 카이로필렌을 만드는 유전자는 사라져버린 겁니다.
이런 걸 보면 자연은 인간보다 몇 수 위인 것 같습니다. 함부로 대했다가 언젠가는 꼭 뒤통수를 맞거든요.

 

사람들은 돈이 되는 맛있는 옥수수만 바라죠.(© christophem71, 출처 Unsplash)

 

 

아무튼 과학자들은 옥수수의 유전자지도를 뒤져서 베타 카이로필렌을 만드는 유전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듯 이 냄새를 다시 만들 수 있도록 미국 옥수수에 이 유전자를 넣어준 다음 미국 옥수수 밭에 이 옥수수를 심었죠. 아… 이제 드디어 해피엔딩인가요?

 

아니요! 실패했습니다.
미국 옥수수는 계속 옥수수뿌리벌레의 공격을 받았으니까요.
아… 정말 뭐가 문제였을까요?
이번에는 흙이 문제였습니다. 베타 카이로필렌 냄새를 흘려봤자 그 냄새에 유혹당해 꼬일 선충이 없었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좋아하는 냄새도 안 풍기는 옥수수만 심어지니 선충들도 다 사라진 겁니다.
결국 이 선충의 알을 미국 옥수수밭에 뿌려준 후에야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답니다.

옥수수곤충선충세균, 4자회담


한 가지 궁금증이 남습니다. 도대체 선충은 곤충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 걸까요?
언뜻 선충이 곤충의 몸에 구멍을 뚫어 죽이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사실 곤충 죽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선충의 해충 퇴치법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다가 또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곤충을 죽이는 선충을 항생제에 잠시 담갔다 곤충 주위에 놓아두었더니 곤충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항생제는 세균만 죽이지 선충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아무튼 항생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선충은 어째서 곤충을 죽이지 못하는 걸까요?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이 이야기의 종착역은 세균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시 말해 곤충을 죽이는 진짜 암살자는 선충이 아니라 선충의 몸속에 있는 세균이었던 겁니다. 선충은 곤충에게 세균만 전달할 뿐 곤충을 죽이는 직접적인 역할은 이 세균의 몫이었던 거죠. 좀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세균이 만들어내는 독소가 곤충을 죽인 겁니다.
곤충병원성 선충이라는 버스를 탄 세균은 자기의 암살 대상에 도착하면 옥수수뿌리벌레를 사정없이 죽입니다. 이후 죽은 벌레를 선충이 먹고 배를 채우면 선충은 세균에게 그 대가로 많은 영양분을 제공하죠.
선충과 세균은 완벽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덕분에 옥수수는 옥수수뿌리벌레라는 천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종착역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는 것도요.
자연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신비로 가득 차 있다지만 어떻게 이런 기막힌 조합이 생겨난 걸까요?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더 알아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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