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빛을 뿜는 오징어
하와이에는 눈에서 빛이 나는 오징어를 볼 수 있습니다. 1년 중 하와이 오징어가 모이는 시기가 되면 밤마다 엄청나게 빛나는 장관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50년 전 미국의 세균학자 J. W. 헤이스팅스(J. W. Hastings) 박사는 이 오징어의 눈에서 어떻게 빛이 나는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이 오징어의 눈이 아니라 눈 안에 있는 세균 덩어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오징어가 포식자를 피해 먹이를 먹으려면 밤에 활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징어의 먹이는 빛을 보고 몰려드는 식물성 플랑크톤입니다. 야행성인 오징어가 먹이를 유인하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빛을 내는 세균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세균은 오징어의 눈 안에서 오징어가 제공하는 영양분을 먹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지요.
오징어와 함께 서로 잘 돕고 사는 이 세균의 이름은 비브리오 피셔리(Vibrio fischeri)입니다.
그런데 비브리오 피셔리를 분리하여 실험실에서 키워보니 재미난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비브리오 피셔리는 동료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빛을 아예 내지 않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보통이라면 그 수가 적을 때는 약하게 빛을 내고 많을 때는 밝은 빛을 낼 것 같잖아요? 그런데 왜 동료들이 어느 정도 모여야 빛을 내는 걸까요? 비브리오 피셔리는 자기 옆에 동료가 얼마나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요?
기본적인 개념은 이렇습니다. 작은 공간에 밀집해 있는 세균들은 서로의 신호물질이 세포벽을 통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균은 이 신호물질로 친구들이 주위에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때라는 게 오묘해서 그렇지… 납득은 가지요?
비브리오 피셔리와 오징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
비브리오 피셔리와 만난 오징어는 참 좋았습니다. 이제 덜 위험한 밤에 먹이를 먹을 수 있으니까요.
비브리오 피셔리도 참 좋았겠죠. 오징어가 좋은 집과 맛있는 먹이를 제공해주니까요.
하지만 세상사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네요.
오징어가 볼 때 비브리오 피셔리가 참 고마운 존재긴 하지만 어쨌거나 세균입니다. 자신의 몸 안에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면역체계를 자극해 병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거죠.
비브리오 피셔리도 그렇습니다. 오징어 집이 참 좋기는 하지만 동료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오징어의 면역체계가 자신들을 공격하겠죠.
오징어와 비브리오 피셔리는 타협을 봅니다. 몸 안에는 빛을 낼 수 있을 정도만 있자! 그리고 필요할 때만 있자! 그래서 오징어는 낮이 되면 비브리오 피셔리를 몸 밖으로 내뿜습니다.
비브리오 피셔리와 오징어는 낮 동안에는 서로 따로따로 지내다가 밤이 되면 다시 만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때나 일하지 않는다!
피셔리처럼 빛을 내는 세균은 동물이 제공하는 먹이를 먹으면서 일정하게 숫자를 늘리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빛을 냅니다. 이 빛의 근원은 빛을 내는 단백질 루시퍼레이스(luciferase)인데, 세균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전혀 만들어지지 않다가 정해진 숫자에 도달해야만 만들어져 빛을 냅니다.
꼭 빛을 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일정 수에 이르러야 어떤 활동을 시작하는 세균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더욱이 특이한 건 동물이나 식물에 병을 일으키는 세균들 대부분이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상추나 양상치를 냉장고에 오래두면 점점 물러지다가 냄새를 내며 상하기 시작하죠? 바로 펙토박테리움 카로토보룸(Pectobacterium carotovorum)이라는 세균 때문입니다.
이 펙토박테리움 역시 일정한 숫자가 돼야 비로소 식물 부패 효소를 내놓아 식물을 썩게 하죠. 왜일까요?
펙토박테리움이 식물에 무름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식물의 세포벽이라는 두껍고 크고, 높다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를 통해 펙토박테리움은 식물의 세포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식물의 세포벽은 셀룰로오스라는 시멘트와 펙틴이라는 철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펙틴은 매우 단단한 물질이라서 나무로 지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세월이 흘러도 묵묵히 견딜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펙토박테리움은 세포벽을 구성하고 있는 이 두 가지 구성성분을 레이저건처럼 한 번에 녹여버릴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바로 효소입니다.
세균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게 세포벽에 효소를 막무가내로 들이붓는다고 성벽을 녹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는 겁니다. 순차적으로, 적당하게 식물에 처리돼야만 세포벽을 녹일 수 있는데, 세균은 이 작업까지 능숙하게 해냅니다.
식물의 세포벽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벽부터 차근차근 녹여나가야 합니다. 만약 실수로 두 번째 벽을 녹일 수 있는 효소로 첫 번째 벽을 공격한다면 식물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펙토박테리움이 식물을 공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피셔리처럼 서로 인구(개체수) 조사를 해서 효소를 생산합니다. 펙토박테리움은 각자가 어설프게 공격하다 식물의 면역 시스템에 당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일단 얼마나 모였는지를 가늠하며 공격 타이밍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공격하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합니다.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겠다고 대포 한 개를 쏜들 만리장성은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내부의 파수꾼에게 금방 발견되어 도리어 공격받을 게 뻔합니다. 하지만 대포 1억 개가 한꺼번에 만리장성을 공격하면 성벽은 결국 무너지겠죠?
식물의 면역반응이 세균을 인식하고 반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펙토박테리움은 식물의 면역체계가 반응하지 않도록 숨죽이고 있다가 때가 되면 일제히 공격태세에 들어갑니다.
이런 세균의 개체수 조절 능력을 정족수 인식(Quorum sensing)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붙인 미국 코넬대학의 클레이 푸쿠아(Clay Fuqua) 교수의 처형이 제안한 이름인데요, 이 분이 변호사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재판을 할 때 배심원 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로 구성된 배심원의 찬성과 반대가 과반수를 넘느냐에 따라 유죄와 무죄가 결정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을 결정하게 하는 최소한의 숫자를 영어로 quorum, 우리말로는 정족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쿼럼은 세균학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법률용어가 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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