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어느 날, 한 남자가 치사량이 훨씬 넘는 진통제 모르핀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동물학자이자 대학교의 비교해부학 교수이니 그처럼 많은 양을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 그는 자살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재직할 때 만난 그 아내에겐 폐결핵이란 불치의 병이 따라다녔다. 그녀를 위해 좀 더 따뜻한 지방에 있는 오데사대학으로 옮겨 왔으나 결국 아내는 결혼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미생물이 유기체 내의 세포에 의해 파괴된다는 포식이론을 발표해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메치니코프 박사 ⓒ public domain

 

아내가 죽은 후 평소의 지병인 안질환이 심각해져 실명의 위기까지 닥치자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죽지 않았다. 모르핀을 워낙 많이 삼킨 탓에 바로 토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그 남자는 프랑스 파리의 한 강연장에 서 있었다. 대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강연의 요지는 유산균이 든 요구르트를 많이 마시면 대장 속의 유해 세균을 죽여 140세까지도 장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강연 내용은 뉴욕타임스 등의 유력 매체들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됐고, 미국에서는 요구르트 신드롬이 일었다. 서구에서 요구르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의 연구 덕분이다. 한때 자살을 기도했던 그도 그때부터는 술과 담배를 끊고 매일 유산균 발효유를 먹고 있었다.

30년 만에 인생의 전혀 다른 두 상황을 연출한 이 남자의 정체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한 요구르트 회사의 상표명으로도 유명한 메치니코프 박사이다.

 

면역현상에서 세포의 중요성 강조한 최초 연구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는 1845년 5월 15일 러시아제국의 이바노브카(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임)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열일곱 살에 하리코프대학에 입학해 4년 정규 과정을 2년 만에 마쳤다. 하리코프대학에서는 동물학을 전공했으며, 다시 나폴리대학에 들어가 발생학을 공부했다.

이후 오데사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아내를 만난 후 1870년 오데사대학교의 동물학 및 비교해부학 교수로 임용되어 1882년까지 재직했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그는 14살 연하의 부잣집 딸을 만나 재혼했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여 있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대학에 사표를 낸 후 시칠리아로 간 그는 그곳에서 개인 실험실을 차리고 평소의 연구 주제였던 무척추동물의 발생학 연구에 매진했다. 부잣집 딸과 결혼한 덕분에 연구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현미경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가사리 유충의 체내에 떠도는 방랑세포들이 붉은색의 염료 입자를 먹어치우는 현상을 관찰한 것이다. 연구를 이어간 그는 그 세포들이 벌이는 ‘식세포 작용’의 원리를 알아냈다.

식세포(백혈구)가 생체 내로 침투한 유해세균이나 노폐 조직 등을 먹어 치워 파괴함으로써 동물이 세균에 대해 면역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바로 식세포 작용이다. 그가 발견한 식세포의 포식이론은 면역현상에서 세포의 중요성을 강조한 첫 번째 연구로서, 오늘날의 선천성 면역(자연면역 또는 1차 면역) 이론에 해당한다.

 

프랑스 과학계와 독일 과학계는 면역계의 실체를 두고 거의 20년 동안이나 서로를 비판하는 면역논쟁을 이어갔다. 결국 두 진영의 면역 이론이 모두 맞다는 사실이 점차 확인되면서 노벨위원회는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두 진영을 대표하는 메치니코프와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에게 공동 수상했다. ⓒ Pixabay

 

하지만 당시 미생물학을 이끌고 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메치니코프의 연구를 믿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독일 과학계는 오늘날 적응면역(후천면역 또는 2차 면역)에 해당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후 파스퇴르연구소에 들어간 메치니코프의 프랑스 과학계와 독일 과학계는 면역계의 실체를 두고 거의 20년 동안이나 서로를 비판하는 면역논쟁을 이어갔다. 결국 두 진영의 면역 이론이 모두 맞다는 사실이 점차 확인되면서 노벨위원회는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두 진영을 대표하는 메치니코프와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에게 공동 수상했다.

 

장수하려면 유산균 먹어야 된다고 주장해

한편, 메치니코프가 유산균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파스퇴르연구소를 이끌던 루이 파스퇴르 때문이었다. 조국인 러시아를 완전히 떠나 새로운 연구처를 찾던 그는 자신을 환대하는 파르퇴르에게 감동해 1888년 파스퇴르연구소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점차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파스퇴르의 모습을 보곤 인간의 장수 비결과 노화 원인을 밝히는 노인학 연구에 빠져들게 된다. 동물들의 수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생명의 연장’이란 논문을 발표하고 ‘대장 무용론’이란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대장에서 일어나는 부패 현상이 노화의 원인이라는 게 이 이론의 요지다. 그는 대장이 없는 거북은 수명이 175년인 데 비해 대장의 길이가 긴 소나 양은 수명이 짧다는 사례를 실례로 들기도 했다.

또한 그는 불가리아에 장수하는 이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유산균 때문이라는 사실을 접하고, 유산균이 대장의 부패를 막아준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가 발견한 락토바실러스 불가리쿠스는 불가리아 지역에만 자생하는 채소에서 분리할 수 있는 독특한 유산균으로, 특정 지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유일한 유산균이다.

 

메치니코프가 유산균의 효용성을 알린 이후부터 서구 사회에서 요구르트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주장한 유산균 가설에 대해 염려했다. ⓒ Pixabay

 

메치니코프는 약 20년간 좋은 유산균을 장복했으나, 1916년 7월 16일 71세의 나이에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유럽인의 평균 수명보다는 훨씬 오래 살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주장한 유산균 가설에 대해 염려했다.

유산균을 먹으면 140살까지 장수한다고 했는데, 정작 유산균을 장복한 자신이 일찍 죽으면 반론이 난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염려와 달리 장내미생물에 대한 연구는 21세기 들어 게놈 해독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차세대 바이오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그가 최초로 밝힌 선천면역에 관한 연구 역시 최근 들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새 치료제 개발 등에 활용되고 있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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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19년 10월 7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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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요법의 창시자 파울 에를리히

 

 

독일 생화학자인 파울 에를리히는 신체의 면역반응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화학요법과 관련해 중요한 업적을 이뤘다.

에를리히는 세균 같은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만을 제거하는 물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물질을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렀다. 그는 면역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8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에를리히는 1854년에 현재는 폴란드 영토가 된 실레지아 슈트레헨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레슬라우와 프라이부르크,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샤리테병원에서 연구를 수행하면서 특정 장기, 조직, 세포에 대한 염료의 선택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발견한 결핵균을 염색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이 방법은 나중에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개선돼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에를리히는 코흐의 요청으로 결핵 치료를 위해 여러 국가를 오가고 민간 실험실에서 일하다가 코흐의 제의에 따라 베를린 감염병연구소에서 일했다. 에를리히의 동료 연구자로는 디프테리아를 연구한 에밀 폰 베링과 파상풍을 연구한 키타사토 시바사부로가 있었다.

두 사람은 혈청의 면역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항독소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혈청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이 때 에릴리히의 성과 중 하나는 폰 베링의 디프테리아 항독소를 표준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08년에 에를리히는 면역 반응에 대해 별개의 연구를 수행한 일리야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에를리히는 항독소 생성을 설명하기 위한 화학 이론을 제시하고 메치니코프는 식세포의 역할을 연구했는데 당시 학계에서는 면역체계를 설명하는데 두 이론이 모두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에를리히는 살아있는 세포가 곁사슬(측쇄)을 갖고 있고 이것이 독소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이물질로부터 위협을 받는 세포는 더 많은 곁사슬을 성장시키는데 여분의 곁사슬은 분리돼 항체가 되고 체내를 순환한다.

에를리히는 치료 효과가 곁사슬과 연관이 있다는 그의 이론에 따라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화학요법은 마법의 탄환으로 묘사됐다.

그는 1906년에 프랑크푸르트 게오르그슈파이어하우스 연구소의 소장이 된 뒤 사하치로 하타를 비롯한 연구자들과 함께 매독을 유발하는 스피로헤타 등의 미생물을 연구했다. 그리고 수백 번의 합성을 수행한 끝에 1909년에 살바르산이라는 최초의 마법의 탄환인 매독치료제를 발견했다.

살바르산은 초기 질병 단계에 투여했을 때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에를리히의 연구소는 훽스트(Hoechst) 회사와 맺은 계약 덕분에 화학물의 임상 개발을 신속히 수행할 수 있었다. 살바르산과 이후 부작용 및 용해성을 개선해 만들어진 네오살바르산은 1940년대까지 매독을 치료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로 사용됐다.

마법의 탄환에 대한 에를리히의 연구는 차후 제약 연구의 기틀이 됐다. 마법의 탄환에 대한 개념은 암 세포 같은 특정 표적에 대해 선택적으로 전달되는 세포독성 물질의 개발을 통해 일정 부분 실현됐다. 에를리히는 1915년에 뇌졸중으로 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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