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의 ‘고무고무’는 옛말, 고무의 대변신
만화 원피스(ONE PIECE)의 주인공 루피는 ‘고무고무열매’라는 가상의 열매를 먹은 뒤 신체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어나는 ‘변종’이 됐다. 그가 “고무고무!”라고 외치면 팔이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긴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적을 무찌른다. 루피의 팔은 무려 7200%까지 늘어난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고무줄은 쭉쭉 늘어나긴 하지만 본래 길이의 72배까지 늘어나는 ‘초능력’은 없지 않은가.
고무에 ‘능력’ 한 방울 첨가했더니···
천연 상태의 고무는 고무나무의 수액을 처리해 얻어진다.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천연 고무의 신장률은 최대 700% 정도로 루피의 능력엔 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천연고무는 온도가 높아지면 부드러워지면서 탄성을 잃고, 온도가 낮아지면 굳어져 잘 부서진다. 루피가 만약 ‘천연고무고무열매’를 먹었다면 여름엔 흐물흐물하고, 겨울엔 쉽게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무 인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고무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고무에 다양한 능력을 첨가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 시작은 바야흐로 1838년. 미국의 발명가인 찰스 굿이어는 어느 날 우연히 천연고무 덩어리에 황을 혼합한 물질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열에 약했던 고무가 뜨거운 난로 위에서도 탄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이 계기로 천연고무에 황을 첨가하는 ‘가황공정’이 개발됐고, 고무의 쓰임을 다양한 분야로 넓히는 계기가 됐다. 고온에서도 탄성을 유지하게 된 덕에 1850년대에는 가황한 천연고무로 타이어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고무의 화학 구조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합성고무, 세계대전을 계기로 발전하다
고무의 화학적 구성은 전기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1829년 고무가 탄화수소의 일종인 이소프렌(isoprene) 단위체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를 기반으로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호프만은 1909년 최초의 합성고무인 ‘폴리이소프렌’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만들어진 폴리이소프렌은 온도에 약하고, 마모와 노화가 빨리 된다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상용화에는 실패했지만, 합성고무 시대에 막을 올린 사건으로 평가된다.
합성고무는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격히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독일의 천연고무 생산지와 고무를 수입하는 해상을 막아버렸고, 손 놓고 있을 수만 없던 독일은 천연고무를 대체할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그 끝에 ‘메틸고무(Methyl Rubbber)’, ‘부나-S(Buna-S)’ 등의 합성고무가 만들어졌다.
상용화는 미국이 한발 앞섰다. 1930년대, 미국의 화학자 윌리엄 캐러더스는 폴리클로로프렌, 폴리아미드 섬유 등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합성고무 제품을 개발했다. 이들 제품은 각각 ‘네오프렌’과 ‘나일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네오프렌은 천연고무만큼 잘 늘어나면서도 열에 강해 체온 유지가 필요한 잠수복, 전화선의 절연제 등으로 쓰이며, 나일론은 스타킹 등 신축성을 필요로 하는 의복에 주로 사용되는 소재다. 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기술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소재로 이렇게 재탄생했다.
고무의 쓰임새는 현재 4만 가지가 넘을 정도로 현대문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듀폰을 중심으로 고무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점차 우수한 성질을 가진 합성고무 제품들이 개발됐다. 탄생 100년이 넘은 지금 합성고무는 점점 슈퍼고무로 거듭나고 있다.
합성고무 ‘네오프렌’은 잠수복 외에도 도료, 접착제 등에 사용된다. 보온성과 열에 강해 최근에는 겨울철에 각광받는 일상복 소재로도 떠올랐다. (출처 : Pixabay)
나노입자 더해 전기 통하는 고무 만든다
이처럼 합성고무는 천연고무의 탄성, 신장률(소재가 최대로 늘어나는 한계) 등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재다. 네오프렌을 비롯해 부틸고무, 폴리우레탄 등의 신장률은 약 600%로 고무의 신장률과 맞먹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현대의 대장장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고무 이상의 능력을 갖는 슈퍼고무를 만들어냈다.
일례로,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은 고무에 은 나노선을 첨가해 전기가 통하는 고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두께 150nm, 길이 30㎛의 은 나노선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고무와 섞어 전도성 고무를 만들었다. 이후 심장내과 전문 의료진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심장의 이완과 수축을 돕는 자극기의 형태로도 개발했다. 이 연구결과는 2016년 의학분야 권위지인 ‘사이언스 중개의학(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에 실렸다.
연구진이 개발한 전도성 고무는 전기적‧기계적 특성이 심장과 유사해 그물망 형태로 제작해 심장 전체에 씌웠을 때 심장의 수축을 돕는다. 또 심장이 이완할 때는 부드럽게 늘어나 이완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기존 심장 자극기는 전극이 닿는 일부부만 자극하기 때문에 오히려 심장 박동을 불규칙하게 만들고, 심장마비나 부정맥 등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와 달리 연구진이 개발한 자극기는 심장 전체에 한번에 전기 자극을 전달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이 없고, 심장의 운동을 보조할 수 있어 심장 기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이후 연구진은 심근경색을 유발한 실험용 생쥐에 개발한 자극기를 적용해본 결과, 심장신호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성공했다. 또 심장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고, 수축 시 심장을 도와 심실 벽의 스트레스를 줄여심장의 부하를 덜어준다는 장점도 확인했다.
천연고무보다 더 잘 늘어나는 팔방미인 전도성 고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IBS 나노입자 연구단은 지난 8월 13일 전도성은 물론 천연고무보다도 더 잘 늘어나는 새로운 신소재 개발 소식을 알렸다. 새로운 소재는 인체에 독성이 없고, 최대 8.4배까지 유연하게 늘어나면서도 전기도 통해 ‘팔방미인 전도성 고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연구진은 이제까지 개발된 전도성 고무가 금속 성분을 늘려 전기가 잘 통하게 만들면 신축성이 떨어지고, 반대로 고무 성분을 늘려 신축성을 늘리면 전도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에 주목했다. 또 은으로 만든 기존 전도성 고무가 물에 쉽게 산화되는 은의 특성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전도성이 떨어지고, 은 나노 선에서 발생하는 은 이온으로 인해 생체 독성이 나타났다.
이 한계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돌입했다. 연구진은 은 나노 선의 표면에 생체에 무해한 금 나노 입자를 균일하게 입혔다. 높은 전도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은 표면이 생체에 닿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금–은 나노 선에 고무를 섞은 뒤 건조시킨 결과, 독성과 산화현상 문제가 해결된 ‘금–은 나노복합체 전도성 고무’를 개발할 수 있었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Nature Nanotechnology)’에 실렸다.
금–은 나노복합체 전도성 고무는 원래 길이보다 8.4배까지 늘어나는 신장률과 금속에 준하는 높은 전기전도도를 동시에 갖췄다. 8.4배까지 늘린 상태에서도 1㎝당 3만S(전도율 단위·1S는 전압이 1V 걸렸을 때 1A의 전류를 통과시키는 전도율) 수준의 전기신호가 전달되고, 최대 전기전도도는 1㎝당 7만2600S를 기록했다. 기존 개발된 전도성 고무의 전기전도도보다 수천 배 높은 수치다.
김대형 IBS 나노입자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이번에 개발한 금–은 나노복합체는 고전도성, 고신축성, 생체 친화적이어서 향후 바이오메디컬디바이스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며 “피부에서나 인체 삽입형 의료기기에 모두 활용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생명 살리는 전도성 고무
IBS 나노입자 연구단은 이번에 개발된 전도성 고무를 살아있는 돼지의 심장에 적용하는 실험도 진행했다. 심근경색을 앓도록 한 돼지의 심장에 ‘금–은 나노복합체 전도성 고무’로 만든 심장 박동 조절기를 씌운 뒤, 전기 자극을 가하자 심장의 기능이 회복됐다. 돼지 심장은 사람의 심장과 가장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체 적용 가능성을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전도성 고무는 피부에 붙이는 웨어러블 의료기기 소재로도 상용화할 수 있다. 피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전기신호를 측정해 신체 상태를 모니터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성 고무에 전극과 히터를 내장시키면 원하는 곳에 전기 자극이나 열 자극을 동시에 가해 간단한 물리치료가 가능하다.
IBS 나노입자연구단 연구팀은 혈액 순환이 잘 안 되는 손목에 전도성 고무를 얇게 붙인 뒤, 전기 자극이나 열 자극을 가하면서 열 감지카메라로 손 부위를 촬영하는 실험도 추가로 진행했다. 그 결과 차가웠던 손이 따뜻해지며 혈액순환이 좋아진다는 점이 확인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무가 자유자재로 늘어나기 때문에 손목의 움직임에 큰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개발한 고무는 아직 루피의 능력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슈퍼 고무’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IBS 연구진이 개발한 전도성 고무가 840%, 즉 천연고무보다도 더 잘 늘어나는 소재인 것처럼 말이다. 루피에게 없는 장점도 있다. 현대판 연금술사들이 개발한 이 새로운 소재들은 전기도 통하고, 생명도 살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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