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와 관련한 게놈 및 유전자 발현 분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문)
얼마 전 필자는 2300여 년 전 진시황 할머니 무덤에서 멸종된 긴팔원숭이를 발견했다는 연구결과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다른 매체에 기고). 긴팔원숭이는 사실 원숭이(monkey)가 아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인원(ape), 즉 사람상과(上科)에 속하는 영장류다. 참고로 원숭이와 유인원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꼬리 유무다. 즉 긴팔원숭이는 꼬리가 없다.
오늘날 긴팔원숭이는 4속(屬) 20종(種)이 중국 남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종 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그런데 2000여 년 전만 해도 중국 중부에도 긴팔원숭이가 살았고 오늘날 멸종한 종류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인구의 증가로 서식지가 파괴된 게 멸종의 주된 이유이겠지만 무덤에서 뼈가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애완동물로 키우려고 잡아간 영향도 있을 것이다. 옛날 중국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원숭이를 소인(小人)에 비유하며 경멸한 반면(황금들창코원숭이가 모델인 손오공을 떠올려 보라), 나무 위에서 긴 팔로 우아하게 이동하는 긴팔원숭이에서 군자(君子)를 떠올렸다.
당시 글을 쓰면서 ‘동물원에서 긴팔원숭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여러 원숭이 가운데 하나로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서 날이 좀 선선해지면 동물원에 가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며칠 전 한가한 날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다녀왔다.
GIB 제공
긴팔원숭이가 애완동물로 사랑받은 이유
긴팔원숭이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은 동시에 더 깊은 안타까움도 느꼈다. 긴팔원숭이는 덩치가 생각보다 꽤 작았지만 움직임은 체조선수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우아했다. 게다가 성격도 온순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도 커 보였다. 실내에서 관람할 때 투명 벽 건너편의 어린(청소년?) 긴팔원숭이가 ‘체조 동작’을 한 뒤 필자를 향해 달려와 ‘어땠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어딘가 애처로웠다.
과천 서울대공원 동양관에 있는 흰손긴팔원숭이. 우리 가까이 가자 다가와 창살에 매달려 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긴팔원숭이는 유인원임에도 작은 덩치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는 것 같다. – 강석기 제공
순간 ‘이 녀석을 데리고 가서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옛날 중국의 상류층에서 긴팔원숭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긴팔원숭이의 주거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동물원에는 유인원관이 있지만 소형 유인원인 긴팔원숭이는 입주권이 없었다. 대신 동양관의 비좁은 우리 몇 개에 종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무 한 그루 없는(대신 여기저기 매달아 놓은 밧줄을 타고 다닌다) 삭막한 철창 안에 살고 있었다.
반면 원숭이 가운데 몇몇 종은 자연 서식지를 모방해 꾸민 꽤 널찍한 야외 우리를 배당받아 지내고 있었다. 물론 유인원이 원숭이보다 좋은 환경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침팬지 동물실험 금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에 가까운 종은 특별대우를 하는 게 현실인 점을 감안하면 침팬지/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 다음으로 우리와 가까운 종인 긴팔원숭이(약 1700만 년 전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가 옥살이 신세인 게 필자로서는 충격이었다.
가지가 길게 뻗은 나무들이 적절히 배치된 널찍한 야외 우리를 만들어 이들이 우아한 곡예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면 동물원의 명소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더 안타깝다. 현재 동물원 여기저기서 동물복지를 높인 우리 개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하루빨리 긴팔원숭이도 혜택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은여우 세 집단 게놈 비교
‘여긴 왜 새끼만 있냐?’
오랜만에 동물원을 찾았기에 다른 동물들도 둘러봤는데 사막여우가 인상에 남았다.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둘러봐도 어미가 안 보였다. 이상해서 안내를 읽어보니 녀석들은 새끼가 아니라 다 자란 상태였다. 즉 사막여우 성체의 몸무게가 1kg 내외라고 한다.
갯과(科) 동물 가운데 이렇게 작은 종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TV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사막여우를 본 적이 몇 번 있는 것 같은데 좀 작은 것 같기는 했어도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주먹만한 머리에 커다란 귀 두 개가 솟아 있는 사막여우 역시 무척 귀여워 애완동물로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행성이라 낮에 이렇게 계속 잠만 자면 곤란하지만 말이다.
문득 지난해 읽은 ‘How to tame a fox’란 책이 떠올랐다. 러시아에서 1959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은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를 다룬 책으로 과학카페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자세한 내용은 ‘여우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참조). 올해 7월 ‘은여우 길들이기’란 제목으로 한글판이 나왔다.
그런데 최근 은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와 관련한 게놈 및 유전자 발현 분석 논문 두 편이 발표됐다. 먼저 학술지 ‘네이처 생태학 및 진화’ 9월호에 실린 붉은여우의 게놈 해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은여우 세 그룹의 게놈을 비교한 논문이다.
러시아에서 5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를 소개한 책 ‘은여우 길들이기’가 지난 7월 번역출간됐다. – 교보문고 제공
참고로 은여우는 붉은여우의 변종으로, 19세기 후반 캐나다에서 모피를 얻기 위해 사육하기 시작했고 그 뒤 러시아에서도 대규모로 길렀다. 비록 우리 속에서 사람이 주는 걸 먹으면서 살지만 성격은 야생 그대로여서 사람을 피했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생각하면 공격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차피 한두 해 기르다 잡아 모피만 얻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0년대 러시아의 동물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가 늑대의 가축화, 즉 개가 되는 과정을 은여우로 압축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1959년부터 본격적인 실험에 들어간 것이다.
그 뒤 50세대(1년이 한 세대다)가 넘는 선별과정을 거쳐 온순한 여우가 만들어졌다. 한편 1960년대 후반부터는 거꾸로 더 사나운 여우를 선별하는 작업을 시작해 40세대가 지났고 아주 포악한 여우가 나왔다. 여기에 따로 선별은 하지 않은 은여우 이렇게 세 그룹이다.
1950년대 시작한 은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는 1960년대 들어 더 사나운 쪽으로 선별하는 과제를 추가했다. 수십 세대 선별을 거쳐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은여우의 모습이다. – Darya Shepeleva 제공
일리노이대 동물과학과 등 미국과 중국, 러시아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참조게놈으로 먼저 붉은여우 수컷의 게놈을 정밀하게 해독했다. 그리고 길들인 은여우 10마리, 더 사나워진 은여우 10마리,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 10마리의 게놈을 해독해 참조게놈과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살펴봤다.
그 결과 단일염기다형성(SNP), 즉 게놈에서 DNA 염기가 다른 자리가 845만여 곳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그룹별로 의미가 있는 자리를 찾았다. 그 결과 길들인 은여우와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 사이의 차이가 사나운 은여우와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 사이의 차이보다 큰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예상한 결과로 애초에 은여우가 사나운 편인 데다가 길들인 은여우의 세대 수가 10년 더 많기 때문이다.
은여우 세 그룹 30마리의 게놈을 분석해 주요 특징을 추출한 뒤 2차원 좌표에 나타냈다. 각 그룹의 열 마리가 한 데 묶임을 알 수 있다. 길들인 은여우(tame)와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conventional) 사이의 거리가 사나워진 은여우(aggressive)와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conventional)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 – 네이처 생태학 및 진화’ 제공
예를 들어 CACAN1C 유전자의 경우 SNP1(937번째 아미노산이 아이소류신에서 트레오닌으로 바뀜)은 길들인 은여우에서만 발견되는데 반해 SNP2(1875번째 아미노산이 트레오닌에서 아이소류신으로 바뀜)는 사나워진 은여우와 선별하지 않은 은여우에서만 나타난다. CACAN1C 유전자는 뉴런 발생, 시냅스 가소성, 기억 및 학습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 그룹에서 차이가 나는 유전자의 80% 이상이 뇌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여우의 선별은 순전히 행동(공격성, 사교성, 불안 정도)을 기반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예상한 결과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유전자의 상당수가 사람에서 정신질환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즉 자폐스펙트럼장애와 관련된 유전자가 13개, 양극성장애와 관련된 유전자가 13개, 윌리엄스-보이렌증후군(Williams–Beuren Syndrome. 사교성이 과도한 반면 지능이 떨어지는 유전질환)과 관련된 유전자가 3개로 밝혀졌다.
세 그룹 사이에 차이가 있는 유전자 가운데 면역계와 관련된 종류도 꽤 있었다. 면역계와 공격성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데, 공격적인 그룹이 온순한 그룹보다 면역반응이 더 강하다.
세로토닌과 글루타메이트 경로 달라
한편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 9월 18일자 온라인판에는 온순한 은여우와 사나운 은여우 각각 12마리에 대해 뇌에서 유전자 발현 패턴을 비교분석한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그 결과 전전두피질에서 유전자 146개, 기저전뇌에서 유전자 33개가 차이를 보였다.
전전두피질과 기저전뇌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비롯한 정보를 처리하는 곳으로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길들인 동물에서 보이는 쾌활하고 싹싹한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쾌락중추에 작용하는 도파민 경로는 뜻밖에도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세로토닌과 글루타메이트 경로 관련 유전자가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 관여하는 뉴런 역시 성격이나 학습, 기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생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명저 ‘총, 균, 쇠’ 9장에서 ‘안나 카레니나 법칙’으로 가축화를 설명한다. 즉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 다르듯이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책에서 야생동물 대부분이 가축화에 실패한 원인 가운데 6가지를 들고 있다. 즉 까다로운 식성, 느린 성장 속도, 감금상태에서 번식 실패, 골치아픈 성격, 겁먹는 버릇, 과도한 독립성 등이다. 이는 애완동물로서의 가능성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가 사실상 성공한 이유는 여우가 불과 1000만 년 전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늑대와 공유하는 특성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늑대도 성공했기 때문에(개로) 여우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 즉 골치아픈 성격, 겁먹는 버릇이 장애로 보였지만 개체에 따라 편차가 컸기 때문에 이를 선별해 극복할 수 있었다.
대형 유인원은 설사 50세대에 걸쳐 선별하더라도(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겠지만) 애완동물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힘이 사람보다 서너 배 더 세고 머리가 워낙 좋아 개처럼 자유롭게 놔둬서는 사람이 제압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반면 소형 유인원인 긴팔원숭이는 과거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역사도 있지만 여기에 50세대 선별까지 거치면 정말 환상적인 동물(키우는 사람의 입장에서)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이런 초(ultra)장기 프로젝트가 진행될 일은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