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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중국 티베트 라싸 공항. 3500m 고지라는 동행의 말에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로 들어가야 했다. 여인숙 수준 호텔에 두통약은커녕 영어가 통하는 직원도 없었다.
그때 방구석에 비닐 마스크가 달린 통이 눈에 들어왔다. ‘Life Saver(생명 구호품)’ 명찰을 보는 순간 안도했다. 방값보다 바가지 수준인 10달러를 내고 마스크를 썼다. 공급되는 ‘순 산소’ 덕분에 두통도 금방 사라졌다. TV도 제대로 안 나오는 여인숙에 100% 산소를 쉽게 만드는 기기가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내부가 궁금했다. 힘들게 열어 본 상자는 허술했다. 어항에 뽀글뽀글 공기를 내뿜는 5000원짜리 공기발생기만 덜렁 있다. 그동안 공기만 마신 셈이다. 그때까지 괜찮던 머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상자를 열지 않았어야 했다. 산소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고산병 두통이 사라지는 플라시보 Placebo(위약, 僞藥) 효과였다.
플라시보는 실제로 화학적 변화를 만든다
필자가 호텔방에서 마셨던 ‘가짜 산소’는 어떻게 두통을 없앴을까? 단지 기분 탓일까? 아니다. 이탈리아 투린의대 연구에 의하면 고산지대에 있는 사람이 플라시보 산소(가짜 산소, 공기만 공급)를 마시면 혈액 내 산소 농도는 평지의 85% 그대로다. 하지만 두뇌 생산 경보물질은 진짜 산소를 마신 것처럼 낮아진다. 낮아진 경보물질 탓에 혈관 확장이 줄어들어 머리가 안 아프게 된다. 생각만으로 실제 두통 원인 물질 PGE2이 줄어든 것이다. 티베트 숙소에 있었던 가짜 산소통은 경위가 어떻든 필자의 고산증을 없앴다. 플라시보 효과를 티베트 숙소 주인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그는 유능한 의사이고 몰랐다면 사기꾼이다.
Placebo란 라틴어로 ‘I shall please’, 즉 ‘내’가 주어고 ‘좋아진다’ 라는 긍정심이 동사다. 내가 주도해서 좋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이 핵심이다. 통증, 파킨슨,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 우울증, 발기부전에 플라시보 효과가 크다. 모두 두뇌 관련 질병이다.
통증은 두뇌가 느낀다. 약으로 통증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면 굳이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가짜 약(플라시보)을 먹으면 통증이 가라앉는 이유다. 노스웨스턴 의대팀은 만성 관절염 환자 56명에게 진짜와 가짜 약을 투여한 결과 참여자 50%가 가짜 진통제에도 진짜처럼 통증 해당 두뇌 부위가 반응함을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로 확인했다.ⓑ 이 부위를 외부에서 자극할 수 있으면 약, 수술 없이도 만성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가 가장 큰 약과 가장 작은 약
플라시보 효과가 가장 큰 질환은 우울증이다. FDA에 의하면 우울증은 진짜 약으로 41%, 가짜 약으로 32% 줄어든다. 심리적 요인이 80%다. 가짜 약도 그 효과가 오래간다. 7주간 가짜 우울증 약에 효과가 있던 그룹은 그 후 12주간 가짜 약을 먹어도 79%가 효과가 유지됐다. 우울증은 플라시보 효과를 톡톡히 보는 질환이다.
비아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다. 발기는 시각과 상상으로 두뇌가 신호물질을 보내 혈관을 확장해 이루어진다. 비아그라는 79% 효과를 보인 반면 가짜 비아그라는 17% 효과를 보였다. 섹스 상대나 기분에 따라 발기 상태가 급변하는 점을 감안하면 플라시보 효과가 클 것 같지만 우울증 플라시보 효과(79%)에 비하면 작다. 청소년 시기는 의지와 상관없이 잠잘 때도 발기된다. 즉 발기부전 현상은 심리적 요인 이외에 육체 상태가 크게 좌우한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잘 믿어 그만큼 큰 플라시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치매 환자는 효과가 거의 없다.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이 약이 좋을 거라는 생각을 못해 심리적 기대 효과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플라시보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작은 약보다는 큰 약이, 분말보다는 캡슐약이, 안 알려진 약보다는 유명 브랜드 약이, 약보다는 주사가 효과가 크다. 그만큼 기대감이 중요 변수다. 플라시보 치료 효과를 좌우하는 사람은 환자일까, 의사일까?
플라시보 효과가 끊어진 신경 줄을 연결시키거나 암을 퇴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질환들은 두뇌에서 비롯된다. 인간 두뇌는 갖가지 치료제를 갖춘 천연약국이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매일매일 자기암시로 천연 약을 만들어 내자.
아래는 2023년 2월 18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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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의 두 얼굴, 욕망회로와 통제회로
사람들은 보통 미리 예정된 기념일에 예측 가능한 선물을 받는 것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받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누군가로부터 의외의 선물을 받게 될 때 도파민이 폭발하는 듯한 짜릿함과 행복감을 맛보곤 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뇌는 예측 가능한 일보다 예측 불가능한 일에,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을 더 갈망하거나 기대감을 품도록 설계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을 과학자들은 ‘보상예측오류(reward prediction error)’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뇌는 다음 순간 혹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레이더를 가동하며 끊임없이 예측합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거나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을 때 만족감은 훨씬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나의 예상이나 기대가 보기 좋게 빗나갔음에도 그 결과가 긍정적일 때, 우리 뇌의 도파민은 더 큰 흥분으로 격하게 응답하는 것이죠.
그러나 어제의 나를 흥분시켰던 새로운 자극이나 기분 좋은 보상이 언제까지고 나의 도파민을 활성화하는 자극제가 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오래도록 열망하던 그 무언가를 드디어 손에 쥐게 됐을 때 느꼈던 만족감과 행복감이 그리 오래가지 않듯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오랜 진화를 거쳐 온 ‘복측피개영역(ventral tegmental area)’이라는 뇌 심층부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영역에는 도파민이 유독 많습니다. 뇌 안의 주요 도파민 생산지 두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뇌세포는 긴 꼬리를 갖고 있는데, 이 뇌세포들이 활성화되어 꼬리 끝에 달린 주머니가 열리면 도파민을 측좌핵에 분비하게 됩니다.
이 회로는 ‘중변연계(meso-limbic)’라는 하는데요, 쉽게 말해 ‘도파민 욕망회로’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도파민 회로는 흔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며 진화해 왔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 유지나 본능적인 면에서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것들, 이를테면 맛있는 음식이나 매력적인 이성 상대를 만났을 때 도파민 욕망회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듯 도파민 욕망회로는 인간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욕망을 일깨움으로써 삶에 활력과 열정을 북돋우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도파민이 주는 기분 좋은 느낌에 중독돼 계속해서 도파민 회로를 가동하는 데만 몰두하면서 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별다른 흥밋거리나 자극을 제공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이나 현실에서의 경험은 따분하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상 속 판타지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만 장밋빛 기대감을 투영해 미화할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렇다면 도파민 욕망회로가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이 과도하게 폭주할 때, 인간은 쾌락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가는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걸까요?
우리의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또 다른 회로는 바로 ‘중피질(mesocortical) 경로입니다. 이 도파민 회로 역시 중변연계 회로와 마찬가지로 도파민을 분비시키지만, 그 기능은 도파민 욕망회로와 정반대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반됩니다. 고삐가 풀린 욕망회로의 폭주를 멈추게 하는 통제나 조정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소위 ‘도파민 통제회로’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도파민 통제회로도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도파민 욕망회로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도파민 회로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욕망회로가 좇는 것은 흥분과 쾌락인 반면, 통제회로가 좇는 것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구체적인 계획이나 아이디어의 실재화 등 논리적 사고나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도파민이 당장의 욕구 충족을 위해 욕망회로를 작동하느냐, 좀 더 합리적이고 유익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제회로에 올라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은 전혀 다른 행로와 목적지를 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파민 통제회로가 지나치게 우세하거나 욕망회로를 과하게 진압하는 것이 과연 이상적이기만 한 상황일까요? 욕망회로가 과하면 약물중독과 같은 각종 중독에 취약해지듯, 통제회로가 지나치게 작동하는 경우 성취나 목표에만 매달리게 되고 어떠한 성과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시선은 늘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하고 있기에 온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마주해야 하는 감정과 감각을 느끼는 데서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죠. 한마디로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이처럼 ‘쾌락 호르몬’으로 가장 잘 알려졌던 도파민이라는 신경화학물질은 사실, 욕망회로와 통제회로의 양쪽을 오가며 상반된 작용을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