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친구들과 식사모임에서 굳이 자기가 밥값을 내겠다고 고집하면(자존심) 옆에서 보기에 부담스럽다. 큰돈을 번 친구가 계산할 때 모르는 척 뒤로 슬쩍 물러나 있는 것도(인색함) 씁쓸한 장면이다. 어쩌다 한번 모이는 자리라면 돈이 없는 사람은 얻어먹고 있는 사람이 내는 게(물론 생색은 내지 않고) 훈훈한 모습 아닐까.
자기 형편에 맞게 씀씀이를 조절하면 좋겠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건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보낸 인류는 20세기 중반 이후 배고픔에서 벗어나 만성적인 영양과잉에 ‘시달리고’ 있지만(물론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우리 몸의 짠돌이 기질은 여전하다. 그 결과 오늘날 비만이 만연해 있다.
비만이 만연해 있는 현대사회…갈색 지방 속 숙신산에서 다이어트에 도움을 줄 기능을 찾았다. – GIB 제공
그런데 이런 성향에는 개인차가 있다. 똑같이 먹어도 어떤 사람은 살이 안 찌는 반면 어떤 사람은 허리 치수가 늘어난다. 몸무게의 증감은 결국 섭취한 칼로리에서 소모한 칼로리를 뺀 값이므로 이런 차이는 칼로리 소모량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칼로리 소모량은 활동량에 비례하므로 ‘정적인 생활습관이 비만을 부른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살 빼는 약’에 마황이 들어있는 이유
물론 큰 틀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2000년대 들어 활동량만으로 개인차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먼저 장내미생물이 영향을 미치는데, 마른 사람과 뚱뚱한 사람은 장내미생물 조성이 다르다. 후자의 경우 장내미생물이 소화된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일부를 숙주(사람)에게 나눠주고 숙주가 지방을 더 많이 저장하도록 자극한다. 다만 장내미생물 조성은 숙주가 섭취한 음식에 영향을 받는다(대체로 채식 위주인 사람이 몸무게가 덜 나간다).
다음으로 놀라운 발견은 갈색지방조직의 존재다. 즉 우리 몸에는 단순히 지방을 저장하는 백색지방조직뿐 아니라 지방을 태워 열을 내는 갈색(또는 베이지색)지방조직도 소량 존재한다. 정온(온혈)동물의 체온조절 수단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뚱뚱한 사람은 갈색지방조직의 활동이 미미해 열생성(thermogenesis)으로 소모하는 칼로리가 적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백색지방, 베이지색지방, 갈색지방 세포 구조를 나타내는 그림. – KTroike(Wikipedia) 제공
그렇다면 열생성에 짠돌이인 체질을 바꾸면 비만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갈색지방조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밝혀 이 경로를 활성화하는 물질을 찾는다면 놀라운 다이어트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이 이런 연구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갈색지방세포 안에는 세포호흡을 하는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많은데, 세포호흡 과정에서 누수가 일어나 에너지 저장 분자인 아데노신삼인산(ATP)이 만들어지는 대신 열이 발생한다는 메커니즘이 밝혀졌다.
즉 갈색지방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는 UCP1이라는 단백질이 존재해 APT를 만드는 동력이 될 수소이온을 흩뜨려놓는다. 발전소의 효율을 고의로 떨어뜨려 전기(ATP) 대신 폐열(열생성)만 잔뜩 내놓게 한 셈이다.
그렇다면 갈색지방조직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저온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추위를 느끼면 뇌는 교감신경을 통해 갈색지방조직으로 신호를 보내 열생성 반응을 일으키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매개하는 게 갈색지방세포 표면의 베타-아드레날린수용체다.
따라서 이 수용체를 자극하는 약물을 투여하면 추워 덜덜 떨지 않으면서도 열생성으로 칼로리를 소모해 살을 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2013년 연구자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약재 마황(麻黃)의 성분으로 교감신경흥분제인 에페드린(ephedrine)을 투여하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즉 마른 사람은 열생성이 활발해졌지만 뚱뚱한 사람은 약발이 안 들었다. 이는 뚱뚱한 사람의 경우 베타-아드레날린수용체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열생성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 마황이 잔뜩 들어간 ‘살 빼는 약’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정작 절실한 뚱뚱한 사람의 경우 약효는 별로 보지 못하면서 부작용만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저온 노출 등의 자극으로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갈색지방조직으로 신호(이 경우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를 보내 열생성 반응(지방(triglycerides)을 분해해 열을 낸다)을 유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매개하는 게 갈색지방세포 표면의 베타-아드레날린수용체(β-adrenergic receptor)다. 약재 마황이 다이어트 효과를 내는 이유도 베타-아드레날린수용체에 달라붙는 에페드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thermogenin이 UCP1이다. 한편 갑상샘 항진증이면 열이 나고 살이 빠지는 반면 저하증이면 몸이 차고 살이 찌는 것도 열생성과 관련돼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세포호흡 회로 중간물질이 신호분자
학술지 ‘네이처’ 8월 2일자에는 갈색지방의 열생성 활성을 촉발하는 새로운 경로를 찾았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갈색지방 열생성 연구의 메카인 하버드의대 산하 다나파버암연구소를 주축으로 한 미국, 캐나다, 영국의 공동연구자들은 대사체학으로 실마리를 풀었다.
대사체학(metabolomics)이란 생체 내의 대사물질을 총체적으로 분석해 대사 과정을 규명하는 빅데이터 학문이다. 연구자들은 생쥐의 갈색지방조직과 백색지방조직의 대사체 비교와 저온(4도)과 고온(29도)일 때 갈색지방조직의 대사체 비교를 통해 공통으로 차이를 보이는 물질이 숙신산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엄밀히 말하면 숙신산의 음이온(succinate)이나 이하 숙신산으로 쓴다. 구연산 같은 다른 대사물도 마찬가지다.) 즉 숙신산은 백색지방조직에 비해 갈색지방조직에 더 많았고 같은 갈색지방조직이라도 열생성을 유발하는 저온 조건에서 더 많았다.
‘숙신산이라…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 텐데,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세포호흡의 ‘TCA 회로’(‘구연산 회로’ 또는 ‘크렙스 회로’라고도 부른다)에 나오는 분자 이름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세포호흡은 미토콘드리아가 영양 분자를 세포가 쓸 수 있는 에너지 분자인 ATP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TCA 회로이고 두 번째가 ‘산화적 인산화반응’이다. 세포호흡을 좀 더 살펴보자.
포도당이나 지방산, 아미노산 같은 영양분은 세포 안에서 일차적으로 분해돼 미토콘드리아로 들어간다. 미토콘드리아는 이 물질과 CoA를 반응시켜 아세틸(탄소 두 개로 C2로 표시)-CoA를 만든다.
TCA 회로는 아세틸-CoA가 CoA와 이산화탄소 두 개로 바뀌면서 전자와 수소이온을 만드는 과정이다. 즉 옥살로아세트산(탄소 네 개로 C4로 표시)이 아세틸-CoA와 반응해 구연산(C6)이 되고(CoA 방출) 이어서 알파-케토클루타르산(C5)(이산화탄소 방출), 숙신산(C4)(이산화탄소 방출), 푸마르산(C4), 말산(C4), 옥살로아세트산(C4)으로 바뀌어 다시 사이클이 돌아간다.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나는 세포호흡의 첫 단계인 ‘구연산 회로(TCA 회로)’의 핵심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다. 영양분은 아세틸-CoA의 형태로 회로에 공급돼 옥살로아세트산(oxaloacetate)와 반응해 구연산(citrate)이 된 뒤 여러 반응을 거쳐 전자와 수소이온, 이산화탄소로 바뀐다. 회로 아래 숙신산(succinate)이 보인다. – 위키피디아 제공
산화적 인산화반응은 앞 단계에서 만들어진 고에너지 전자가 양성자(수소이온) 기울기를 만들고 ATP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이때 산소가 소모된다. 결국 숨을 쉰다는 건 세포호흡에서 생성되는 이산화탄소를 내보내고(날숨) 쓰는 산소를 공급하는(들숨) 일이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갈색지방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는 두 번째 단계인 산화적 인산화반응 대신 열생성이 일어난다.
아무튼 숙신산은 세포호흡의 TCA 회로를 이루는 한 성분(중간물질)일 뿐 우리 몸에서 별다른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구연산이나 숙신산 같은 물질이 혈액 중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이 신호분자 같은 또 다른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근육에서 만들어져 혈관을 타고 이동
연구자들은 대사체학 분석 결과 갈색지방조직에 유독 숙신산 농도만 높은 데 주목했다. 단순히 세포호흡이 활발해진 결과라면 구연산 같은 다른 성분의 농도도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색지방세포 내 구연산은 TCA 회로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생쥐를 저온(4도)에 둔 뒤 혈액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정말 구연산 농도가 높았다. 즉 추위에 노출될 경우 몸의 다른 조직에서 숙신산이 만들어져 순환계(혈관)를 통해 갈색지방조직으로 들어간다는 시나리오다. 흥미롭게도 40여 년 전인 1976년 운동을 할 때 근육에서 숙신산이 만들어져 혈중 농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추위로 생쥐가 덜덜 떨 때(근육 운동) 숙신산이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저온 자극이 교감신경뿐 아니라 숙신산을 통해서도 열생성 반응을 촉발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숙신산을 직접 정맥에 투여해봤다. 그 결과 저온에 있지 않았음에도 갈색지방조직에서 열생성 반응이 활발해졌다. 그렇다면 숙신산이 어떻게 열생성 반응을 촉발하는 것일까.
미토콘드리아에 숙신산이 많아지면 TCA 회로에서 숙신산이 푸마르산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오는 활성산소의 양도 많아진다. 이 활성산소가 신호로 작동해 UCP1이 활성형이 되고 열생성 반응이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활성산소가 단순히 세포에 해로운 노폐물이 아니라 신호전달물질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은 20년 전인 1998년 미 국립보건원의 이서구 박사(현 연세대 석좌교수)와 동료들이 처음 보고했다. 이번 결과는 이 교수의 가설을 입증하는 또 다른 예인 셈이다.
TCA 회로의 중간물질로만 알았던 숙신산(succinate)이 갈색지방조직(brown fat)에서 열생성 반응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동물실험으로 밝혀졌다. 추위로 몸을 떨 때(shivering) 나오는 숙신산이나 음료로 섭취한(ingestion) 숙신산이 혈관을 타고 갈색지방세포 안으로 들어가 미토콘드리아에서 푸마르산으로 산화될 때 나오는 활성산소가 UCP1을 활성화시켜 열생성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에서도 이 결과가 재현될지 궁금하다. – 네이처 제공
사람에서도 작동할지는 미지수
연구자들은 다음으로 숙신산을 먹었을 때도 열생성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주사제와 먹는 약은 적용 범위에서 큰 차이가 난다. 생쥐들은 고지방 사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상태에서 한 그룹은 맹물을 다른 그룹은 숙신산을 1.5% 농도로 녹인 물을 먹었다. 좀 시큼하지만 먹을 만 하다.
4주가 지난 뒤 맹물을 먹은 생쥐들은 몸무게가 평균 8그램 가까이 늘었지만 숙신산 용액을 먹을 생쥐들은 3그램 정도 느는 데 그쳤다. 그리고 숙신산 용액을 먹은 생쥐들에게서 이렇다 할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숙신산은 식품첨가물로 널리 쓰이고 있고(산도조절제) 사용량에 제한이 없는 GRAS(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보는 물질)로 분류돼 있다. 연간 생산량이 3만 톤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평범한 물질이 효과가 크면서도 별다를 부작용이 없는 이상적인 다이어트약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필자는 건강보조식품 사이트에서 ‘succinate’를 검색해봤는데 없었다. 아마 수주 내에 다이어트 보조식품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식품첨가물로 널리 쓰이는 숙신산… 다이어트 보조식품으로 등장할까?
그러나 지금까지 무수히 경험했듯이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거라고 낙관해서는 안 된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셴 후이와 조수아 라비노비츠는 ‘네이처’ 같은 호에 실린 해설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생쥐와 사람은 덩치 차이가 크다. 즉 몸이 작은 생쥐는 부피 대비 표면적의 비가 사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체온을 쉽게 빼앗길 수 있고 따라서 갈색지방조직이 잘 발달해 있다. 반면 사람은 갈색지방조직이 상대적으로 적어 물 대신 숙신산 음료를 마시더라도 생쥐만큼 효과가 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조만간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될 것이다(어쩌면 이미 실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기적의 다이어트약이라며 기대를 모았던 숱한 후보 물질들이 임상에서 실패해 빛을 보지 못했다. 너무 흔한 물질이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숙신산이 ‘흙 속의 진주’로 밝혀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