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제시한 E=mc2이라는 공식은 물질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발표 당시만 해도 그 전환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 이가 바로 영국의 물리학자 프랜시스 애스턴이다.
그는 원자의 질량을 1/1000 이상의 정확도로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질량분석기를 개발해 헬륨 원자 하나의 질량이 수소 원자 네 개의 질량보다 약간 작음을 밝혔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영국의 아서 에디턴 등은 특수상대성 이론이 발표된 지 15년 후에 수소 원자 4개가 결합해 헬륨 원자 1개를 만든다면 태양 같은 항성에서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랜시스 애스턴은 1877년 9월 1일 영국 버밍엄에서 금속 상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몰번대학 및 비커리지 학교에서 공부하며 과학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그는 1894년에 메이슨대학(현 버밍엄대학)에 입학해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한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타르타닉산 파생물의 광학적 성질을 연구하던 그는 잠시 학문을 떠나 맥주회사의 양조장 실험실에서 3년간 화학자로 일했다. 그러나 화학보다 물리학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대학으로 돌아와 배출 튜브의 가스 배출 현상 등을 연구했다.
그는 여가 시간에 유리세공과 관련한 장치를 만들거나 선박을 위한 새로운 종류의 펌프를 설계하는 등 기계 제작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1909년에 J. J. 톰슨의 제안을 받고 캐번디시연구소에서 그의 조수로 일하며 양극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양극선이란 진공관 내에서 음극을 향해 가속되는 기체의 양전하 입자를 말한다. 양극선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휘어짐의 정도가 질량비로 결정되는데, 그 편차를 이용하면 입자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다.
속도 수렴성 지닌 질량분석기 발명
즉, 동일한 전하의 경우 똑같은 전기장에서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입자들이 만약 더 무겁다면 움직이는 동안 옆으로 휘는 정도가 덜하고, 더 가볍다면 더 많이 휘게 된다. 톰슨은 이 같은 원리를 이용해 1912년에 방사선형 질량분석기를 최초로 개발했다.
애스턴은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불활성 기체인 네온이 두 개의 동위원소를 지니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한동안 왕립 항공연구소에서 항공기 구조에 관한 기압 조건의 영향을 연구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 그는 캐번디시연구소로 다시 돌아와 네온 동위원소의 분리에 매달렸다. 이때 애스턴은 톰슨이 개발한 질량분석기를 개량해 매우 발전된 질량분석기를 발명했다. 톰슨의 질량분석기는 수렴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분해능을 높일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그러나 애스턴이 새로 개발한 질량분석기는 속도 수렴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두 동위원소의 매우 작은 질량 차이를 이용해 분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실험기구의 발명으로 그는 자연 발생 동위원소 212개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수많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실제로는 많은 동위원소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연구로 인해 애스턴은 동위원소의 원자핵 질량이 양성자 질량의 정수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의된 산소 동위원소의 질량과 모든 다른 동위원소들은 거의 정수가 되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정수 법칙을 공식화한 것이다.
동위원소의 정수법칙 공식화
또한 그는 방사성원소를 제외하면 홀수 원자번호의 원소는 2개 이상의 동위원소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했다. 이처럼 개량된 질량분석기의 도움으로 수많은 비활성원소의 동위원소와 정수법칙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2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질량분석기는 이후 A. O 니어 등에 의해 전기장과 자기장을 병행해 사용하는 이중수렴형 장치로 개발되는 등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현재는 원자량의 상대값 측정 정밀도가 1억 분의 1까지 되는 고분해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한편, 애스턴이 더 정확한 질량분석기로 계속해서 연구함에 따라 원자 에너지 분야에서 중요한 부분이 된 정수율의 편차를 측정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국제원자력위원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애스턴은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키, 암벽 등반, 테니스, 수영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인 그는 운동뿐만 아니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또한 천문학과 사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수마트라,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일식을 연구하는 탐사팀의 일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1945년 11월 20일 주 활동무대였던 케임브리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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