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장미는 어떻게 꽃의 여왕이 되었나 – 사진 GIB 제공
여름의 마지막 장미(The Last Rose of Summer)
여기 홀로 피어있는 건
여름의 마지막 장미
다정한 친구들은 모두
시들어 사라졌네
얼굴의 홍조를 비춰주거나
탄식을 나눌
동족의 꽃이 보이지 않고
가까이에 장미봉오리도 없네
‘Tis the last rose of summer,
Left blooming alone;
All her lovely companions
Are faded and gone;
No flower of her kindred,
No rosebud is nigh,
To reflect back her blushes,
Or give sigh for sigh.
(이하 생략)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곡가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는 1805년 어느 날 젠킨스타운공원에서 장미를 보고 영감을 얻어 시를 쓰고 곡을 붙였다. 우리에게는 ‘한 떨기 장미꽃’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The Last Rose of Summer로 직역하면 ‘여름의 마지막 장미’ 정도가 될 것이다. ‘한 떨기 장미꽃’의 가사는 원 가사와 워낙 달라 시적 재능이 없음에도 필자가 번역할 수 밖에 없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아무튼 가곡을 들어보면 ‘아하, 이 노래!’라고 반응할 독자들도 꽤 될 것이다.
이날 무어가 영감을 얻은 장미는 50여 년 전인 1750년 무렵 유럽에 소개된 중국의 장미품종으로 올드 블러시(Old Blush)라고 불렸다. 이 장미는 분홍색 꽃이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차례 피고 홍차가 연상되는 향이 난다. 당시 유럽의 장미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사이 한 차례만 폈다. 아마도 무어는 1805년 늦여름에 공원을 찾았고 다른 품종의 장미는 이미 꽃이 진 상태에서 유독 꽃을 피우고 있는 올드 블러시를 주목했을 것이다.
현대장미를 탄생시킨 일등공신 월계화
이 무렵 중국에서 올드 블러시와 함께 여러 품종이 들어오면서 유럽의 장미육종가들은 흥분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꽃을 피울 수 있는 품종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장미와 기존 유럽의 여러 장미품종을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는데, 가장 유명한 게 1867년 프랑스의 장미 육종가 장 밥티스트 앙드레 기요가 개발한 ‘라 프랑스(La France)’다.
라 프랑스는 꽃의 형태가 아름답고 봄에서 가을까지 피는 데다 긴 꽃대 끝에 큼직한 한 송이만 폈기 때문에 꽃꽂이에도 그만이었다. 원예의 관점에서 라 프랑스는 이전의 장미품종들과 격이 달랐다. 라 프랑스는 ‘하이브리드 티(Hybrid tea. 굳이 번역하자면 ‘잡종 차)’로 불리는 품종들의 효시다. 오늘날 장미육종가들은 라 프랑스 이전의 품종들을 ‘고전장미(old rose)’로, 라 프랑스 이후의 품종들은 ‘현대장미(modern rose)’로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꽃집에서 만나는 전형적인 장미라고 생각하는 품종들이 바로 하이브리드 티로 야생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다. 아무튼 현대장미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품종이 바로 중국장미 올드 블러시다.
현대장미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품종인 월계화 올드 블러시(Old Blush).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 중국의 한 육종가가 야생 월계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18세기 유럽에 소개된 올드 블러시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반복적으로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당시 육종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올드 블러시라는 이름처럼 꽃잎의 색은 무척 아름답지만 형태는 평범하다. – ‘네이처 유전학’
식물학적으로 장미는 장미(Rosa)속(屬)에 속하는 200여 종을 포괄한 이름이지만 이들 가운데 다수가 지역에 따라 장미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올드 블러시가 속하는 종 로사 키넨시스(Rosa chinensis)의 영어 이름 Chinese rose를 직역하면 중국장미이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월계(月季)라고 부른다(우리나라에서는 월계화).
이밖에 우리나라가 원산지에 포함되는 찔레꽃(Rosa multiflora), 돌가시나무(Rosawichuraiana), 해당화(Rosa rugosa), 생열귀나무(Rosa davurica)도 식물학적으로는 장미다. 한반도에는 장미속 17종이 자생한다. 참고로 현대장미는 여러 종과 품종이 뒤섞여 독립적인 종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학명 형태로 쓸 때는 ‘Rosa×hybrida’라고 표기한다.
한반도에 장미속 17종 자생
장미속 200여 종 가운데 8~20종만이 오늘날 수많은 장미품종을 개발하는데 기여한 원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류가 야생 장미를 정원에 들여다 심고 품종을 개량한 역사는 적어도 5000년은 된다고 추정되는데 두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이뤄졌다. 즉 지중해 일대와 중국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장미 육종가들이 만들어낸 품종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종류를 꼽으라면 다마스크장미(Damask rose)와 중국장미(월계화)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마스크장미는 중동 일대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되어 온 품종으로 뛰어난 향기가 최대 강점이다. 오늘날 고급 향수나 화장품에 들어가는 장미유(rose essential oil)와 장미수(rose water)는 대부분 다마스크장미를 추출해 얻는데, 불가리아와 터키에서 많이 재배한다. 장미꽃 1kg(100송이는 돼야 한다)에서 고작 장미유(油) 0.8g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장미유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싸다.
수천 년 전 중국과 지중해 일대에서 독립적으로 야생 장미를 개량해 화훼작물로 만들었다. 중국 계열을 대표하는 장미가 월계화라면 지중해 계열을 대표하는 장미는 다마스크장미다. 다마스크장미에서 추출하는 장미유와 장미수는 고급 향수와 화장품에 빠질 수 없는 원료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 Gressa 제공
한편 월계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늦봄부터 가을까지 반복적으로 꽃이 피는 특성으로 현대장미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현대장미의 붉은 계열 색상과 홍차가 연상되는 향도 월계화가 남긴 유산이다.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이 수많은 품종을 만들다 보니 장미의 다채로움은 다른 꽃들을 압도한다. 꽃의 모양이면 모양, 색상이면 색상, 향기면 향기 하나 같이 장미가 최고봉이다(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꽃집에 장미가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 것이며 여성 향수에 장미유가 들어있지 않다면 향기의 우아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처럼 꽃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장미를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했음에도 정작 장미 게놈은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현대장미 품종들은 수많은 교배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여러 장미 원종과 품종의 게놈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미 게놈 연구의 기준이 되는 ‘참조게놈’을 구축하는 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 말 프랑스 장미육종가 프란시스 메이앙이 개발한 로사 피스(Rosa Peace)는 20세기에 가장 널리 사랑받은 품종이다. 피스의 등장으로 하이브리드 티 장미는 현대장미를 대표하는 계열로 자리 잡았다. – 위키피디아 제공
라 프랑스 = 프랑스장미 +다마스크장미 +월계화(두 품종)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 4월 30일자 온라인판에는 현대장미의 탄생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월계화 올드 블러시를 참조게놈으로 구성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미품종의 게놈을 분석해 서로의 관계를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프랑스 리용대가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염색체가 쌍으로 들어있는 2배체(2n) 식물로는 게놈을 재구성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성세포(n)를 배양한 뒤 DNA를 추출해 게놈을 해독하는 전략을 썼다.
장미(월계화 올드 블러시)의 게놈 크기는 5억6000만 염기로 30억 염기인 사람 게놈보다 훨씬 작지만 유전자 수는 3만6000여 개로 추정돼 두 배 가까이 됐다. 이동성이 없는 식물은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어 살아가므로 동물보다 유전자 수가 많은 게 보통인데 장미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연구자들은 올드 블러시 게놈을 기준으로 여러 장미 원종과 오래된 품종의 게놈을 분석해 계보를 구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장미의 시대를 연 라 프랑스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밝히는 데도 성공했다. 즉 라 프랑스를 만드는데 올드 블러시를 비롯한 네 가지 품종이 기여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0여 종의 더 오래된 품종이 흔적을 남겼다. 네 가지 품종인 프랑스장미(Rosa gallica), 다마스크장미, 올드 블러시, 월계화 흄스 블러시(Hume’s Blush) 역시 육종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867년 프랑스의 장미 육종가 장 밥티스트 앙드레 기요가 개발한 ‘라 프랑스(La France)’는 현대장미 품종의 효시로 꼽힌다. 최근 게놈 분석 결과 라 프랑스(FRA) 품종 개발 과정에서 프랑스장미(GAL), 다마스크장미(DAM), 월계화 올드 블러시(OB), 월계화 흄스 블러시(HUM)가 동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장미 역시 여러 원종과 품종을 교배해 만든 것이다. 참고로 장미속 가운데 세 계열(CIN, SYN, CHI)이 현대장미에 기여했다. – ‘네이처 유전학’ 제공
라 프랑스가 반복해 꽃을 피울 수 있게 기여한 월계화 올드 블러시의 유전자는 KSN으로 꽃이 피는 걸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올드 블러시의 KSN 유전자에는 전이인자가 끼어 들어가 이 유전자가 고장 난 상태다. 그 결과 기온이 어느 정도 이상이면 주책맞게 계속 꽃을 피우는 것이다. 교배를 통해 올드 블러시의 고장난 KSN 유전자가 유입된 결과 현대장미(하이브리드 티 계열) 역시 오랜 기간 꽃을 피울 수 있게 됐다.
한편 홍조(blush)라는 이름을 낳은 올드 블러시의 고운 분홍색은 시아니딘(cyanidin)이라는 색소에서 비롯한다. 시아니딘은 안토시아닌의 한 종류로 올드 블러시의 꽃잎에서 만들어진 색소의 99% 이상을 차지한다. 게놈 분석 결과 올드 블러시에서는 안토시아닌 합성을 억제하는 유전자인 SPL9을 억제하는 마이크로RNA(miR156)가 많이 발현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억제하는 걸 억제하므로 결과적으로 시아니딘이 많이 만들어져 풍부한 색조를 띄게 됐다는 말이다.
SPL9은 향기분자를 만드는 유전자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쾌한 꽃향기인 리날롤(linalool)을 만드는 유전자(NES)는 억제했고 묵직한 나무향이 나는 저마크렌D(germacrene D)를 만드는 유전자(GDS)는 활성화했다. 꽃향기의 미적 측면에서는 리날롤이 저마크렌D보다 기여도가 크므로 올드 블러시의 경우 색을 위해 향이 일부 희생된 셈이다.
한편 월계화 특유의 홍차 향기는 디메톡시톨루엔(DMT)이라는 분자에서 비롯되는데, 올드 블러시의 게놈에는 이를 만드는데 관여하는 효소 유전자가 두 가지 존재한다. 참고로 월계화에서 홍차 향이 특히 강한 품종을 ‘티 로즈(tea rose)’라고 따로 부르는데, 라 프랑스의 탄생에 기여한 월계화 흄스 블러시가 티 로즈에 속한다. 현대장미 대다수는 형태와 색 위주로 품종이 개량된 결과라 대체로 향이 약하지만 잘 맡아보면 홍차가 연상되는 향이 느껴질 것이다.
필자는 재작년 5월 말 과천 서울대공원 장미원을 찾았다. 당시 한 화가가 장미를 화폭에 담고 있는 장면이다. 올해에도 26일부터 내달 10일까지 장미축제가 열린다.
이맘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장미축제가 벌어진다. 필자는 재작년 과천 서울대공원 장미원축제를 다녀왔는데 수많은 품종의 장미들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올해는 26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열린다니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이번 글을 준비하며 얻은 장미품종에 대한 지식이 장미를 감상하는데 꽤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