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미래의 과학

 

(2014년 5월 16일)

 

1. ‘과학의 한계라고 하는 것들 대한 오해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절대로 대답을 해 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1) 미적 가치 판단의 문제들: ‘장미가 아름다운가 국화가 더 아름다운가,’ ‘모짜르트의 음악이 더 위대한가 베토벤의 음악이 더 위대한가,’ ‘가수 싸이의 입에서 나오는 특정 소리들의 연속은 음악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가(혹은 오직 미적 가치를 가진 것만이 음악이라고 불려야만 하는가)’ 등의 문제들.
  • (2) 도덕적 가치 판단의 문제들: ‘모든 사람은 정말 기본권을 갖고 있는가,’ ‘안락사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육식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가 새정치연합을 지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가’ 등의 문제들.
  • (3) 종교적/초자연적 판단에 대한 문제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의 말씀하신 바는 무엇인가,’ ‘인간이 쉽게 감각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존재하는가,’ ‘사후세계가 있는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등의 문제들.

 

그리고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과학이 절대 대답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과학의 이러한 ‘무능함’을 과학의 한계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통상적인 주장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깔고 있는 기본 가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과학이 아닌 것들, 가령 미학, 윤리학, 종교 등이 제공해 준다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학이나 미학, 윤리학, 종교 등이 위의 질문들에 대해 답을 주냐 안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시된 답이 좋은 답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과학이 위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는 반면 미학, 윤리학, 종교 등은 답을 제공 준다고 하더라도, 후자가 주는 답이 받아들일 만한 좋은 답이 아니라면 오히려 답을 주지 않는 과학이 받아들일만하지 않은 나쁜 답을 주는 것들보다 더 낫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위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과학의 상대적 장점이 될지언정 한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설혹 한계라고 하더라도 이는 모든 것들의 한계이지 과학만의 한계가 되지는 않습니다. 즉, 과학 아닌 것들이 위의 질문에 대해 좋은 답을 주는 경우에만, 위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주지 않는 것이 과학의 한계가 됩니다. 따라서 위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못하는 것이 과학의 한계라고 주장하려면, 과학 아닌 것이 위의 질문에 대해 좋은 답을 준다는 것을 먼저 보여줘야 합니다 — 과학 아닌 것들이 위의 문제에 대해 좋은 답을 주는가의 문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둘째, 과학이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정말 대답하지 못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대다수 과학자들의 일상적 과학 활동의 목표가 위의 질문들에 답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학은, 적어도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위의 문제들과 매우 유사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룹니다.

 

  • (4) 미적 가치 판단과 관련된 사실의 문제들: ‘사람들은 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모짜르트의 음악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
  • (5) 도덕적 가치 판단과 관련된 사실의 문제: ‘모든 사람들의 기본권을 인정할 경우 현 상황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인가,’ ‘안락사는 허용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안락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가’
  • (6) 종교적/초자연적 판단과 관련된 사실의 문제들: ‘신의 말씀이라고 주장되는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어 왔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존재가 있다고 확신하는가,’ ‘소위 ’사후세계 경험’을 인위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가’

 

(4)-(6)에 대해 과학이 제공하는 답들이 바로 (1)-(3)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1)-(3)의 질문들에 대해 좋은 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4)-(6)에 대한 답들을 반드시 그리고 매우 비중있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이 점은 제가 주장하는 것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주장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제 주장이 맞다면, (1)-(3)에 대해 과학이 절대 대답하지 못한다고 하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맞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주장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마트폰 완제품을 생산하는 A라는 회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A가 생산하는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들이 B라는 회사에서 만든 것이며, B는 스마트폰 완제품을 만들지는 않지만 (혹은 만들 능력은 없지만) 스마트폰 핵심 부품들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술력을 가진 회사라고 합시다. 이 경우, ‘B는 스마트폰을 절대로 만들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한 적합한 묘사가 아닙니다. 크게 보았을 때 스마트폰 완성품은 A와 B가 공동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상황을 ‘스마트폰을 만드는데 A와 B가 공동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기여한다’라고 묘사하는 것이 보다 적합합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제 주장이 맞다면 (1)-(3)의 질문에 대해 과학이 직접적인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로 과학의 한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은 (1)-(3)의 질문에 대해 좋은 답을 찾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점입니다: 과학은 (1)-(3)의 질문들에 대한 좋은 답을 찾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하며, 과학 아닌 것들은 어떤 기여를 하는가? 이는 짧게 논의해서는 유익한 결론을 얻기 어려운 질문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1)-(3)의 여러 질문들 각각 하나씩에 대해 과학과 비과학의 기여를 개별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논쟁이 될 만한 주제에 대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저는 도덕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의 방식과 배치되는 방식으로 (참을 위한) 좋은 근거를 가진 믿음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이 점은 짧게 얘기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저는 인간이 좋은 근거를 가진 믿음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 과학의 한계에 관한 근본적 문제

다음과 같은 주장 또한 많이 들어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방법-4 과학의 한계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23&type=C&orderby_1=subject&page=7 에서 인용)

김명현

재료공학박사

전 한동대학교 교수

성경과학선교회 대표

 

  • 과학을 정의할 때 필요한 기본적 요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게도 정확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책처럼 보이는 과학적 연구영역에 너무도 분명한 한계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보통 이 한계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의 능력에 대해 맹신하여 엉뚱한 믿음과 때로는 미신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 19세기 이후 눈부신 과학의 발전은 오늘날을 과학의 시대로 만들어 놓았다. 현대인들은 과학의 발전과 그 혜택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아울러 과학주의라는 과학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무슨 주의(主義)라 함은 무엇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라고 하면 사회주의 이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주의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과학주의를 때론 과학만능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주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과학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과학주의는 과학의 한계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학의 한계, 혹은 과학적 연구의 한계란 무엇일까?
  • 과학적 연구의 첫번째 한계는 바로 관찰의 한계이다. 과학연구의 출발점은 관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은 관찰 가능한 물리적 우주만 규명할 수 있기에 관찰할 수 없는 개념들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결론을 얻을 수 없다. 쉬운 예로 누구나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마음 혹은 정신’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마음’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고 반응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존재는 분명히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무게를 잴 수도 없고 크기를 측정하여 물리적인 양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비물리적인 것이다.
  • 과학적 연구의 두 번째 한계성은 ‘시간’에 관한 것이다. 과학은 ‘현재’에 대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일, 즉 1회적인 사건은 결코 다시 되풀이해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1회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에 대한 과학적 증명(재관찰)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 또는 과거에 대한 기록을 믿는 ‘믿음의 영역’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역사에 대한 증거들의 확고함과 애매함에 따라 확실히 믿는 것도 있고 어설프게 믿는 것도 있다.
  • 과학적 연구의 한계에 대해 세 번째는 선악의 분별 또는 도적적 가치판단에 관한 영역이다. 이 영역도 과학적 연구결과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의 경우 과학자들은 폭발의 원리나 폭발력과 같은 물리적인 양들을 밝혀내는 일을 담당할 뿐이지 폭발의 결과에 대한 선악의 판단을 과학으로 정의 할 수 없다. 선악과 도덕의 판단은 과학의 바깥 영역인 인간의 양심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것들이다.
  • 이상의 세 가지 한계, 즉 관찰의 한계, 시간의 한계, 가치판단의 한계만을 고려하더라도 과학적 연구란 지극히 제한된 인간의 활동영역일 뿐 아니라 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이렇듯 제한적인 영역만을 다루고 있는 과학적 연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왜냐하면 관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 즉 사람들의 마음이라든지 영혼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주 분명하게 쓴 좋은 글입니다. 먼저 위 글의 필자가 지적하는 첫 번째 한계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마음이 비물리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마음 역시 뇌를 이루는 여러 단백질, 기타 등등의 입자들이 모여 나타내는 물리 현상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렇게 믿을 좋은 이유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지 않을 이유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합니다. 아직까지는 어떻게 단백질 분자들이 모여 의식현상을 보이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과학이론이 없을 뿐더러 아마 앞으로 상당 기간 없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즉, 앞으로 상당 기간 아니면 영원히, 의식 현상을 비의식적인 미시입자의 특성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과학의 한계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비물리적이다는 점이 아니라, 마음이 물리적인지 비물리적인지에 대해 과학이 현재 좋은 답을 줄 수가 없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이 글을 소개한 것은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과학의 인식적 지위와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윗글의 결론이 바로 그 논점입니다: “이렇듯 제한적인 영역만을 다루고 있는 과학적 연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왜냐하면 관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 즉 사람들의 마음이라든지 영혼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과 달리 이 결론이 말하는 바는 불분명한데, 그 한 가지 이유는 ‘믿음’이란 말이 중의적이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은 belief로도 그리고 faith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belief가 보통 믿음 일반을 통칭하고 faith는 통상 종교적 믿음을 지칭한다는 차이에 더해 이 둘의 가장 큰 인식적 차이는 faith는 소위 과학적/학문적 방법, 즉,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 등의 방식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정당화될 필요 없는)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이 가장 큰 논점입니다. A라는 주장이 과학적/학문적 방법으로는 정당화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A라는 주장과 not-A(A에 반대되는 주장)이 경쟁하고 있는데,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 등을 사용한 방법으로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고 모자라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를 다루는 학문이 결정이론(decision theory)라는 것으로 이는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 결정이론 같은 분야가 바로 과학과 비과학이 뚜렷이 나눠지지 않는 예입니다. 결정 이론의 다수 견해에 따르면 이 경우 취해야 하는 태도는 A는 50%확률로 믿고 not-A도 50%의 확률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상황에서 A를 100% 믿고 not-A는 틀렸다고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A와 not-A 중 하나를 반드시 택해서 택한 이론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이 경우 과학자 갑이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 등과 무관한 신념을 통해 (가령 꿈에서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기에) A를 택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에도, 이 연구를 통해 A를 지지할 더 좋은 근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갑의 선택이 B를 선택한 을의 선택보다 전혀 낫다고 할 수 없고 갑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이는 나중에 A가 참이라고 드러나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서 1등을 한 사람이 복권을 사서 아무 것도 따지 못한 사람보다 더 합리적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필자는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 외에 신앙의 영역이 있어서 과학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의 적용 영역을 벗어나는 믿음의 영역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 제가 여기서 반종교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성, 연역, 경험, 관찰, 실험, 귀납을 적용해도 A라는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고, 이 경우 A를 선택하든 not-A를 선택하든 특별히 어떤 것이 우열하거나 열등하다고 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제 결론은 과학이 종교적 판단에 대해서 좋은 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비과학들도 마찬가지이므로 이 점이 특별히 과학의 한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과학(만능)주의도 아닙니다. 저는 과학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좋은 해답을 주지 않는 문제가 많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과 다른 학문이 못하면 학문이 아닌 것도 못할 거다라는 주장은 하고 있습니다. 누구 입장이 더 맞는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해 보세요.

 

  1. 진짜 과학의 한계 두 가지

제가 보기에 진정으로 과학의 근본적 한계가 될 만한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 단기적으로는 자원, 기술, 인력의 제한으로 생기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한계는 아닙니다. 첫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 가진 한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침팬지나 개가 양자 역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침팬지, 개와 의사 소통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고, 침팬지와 개가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침팬지와 개는 양자 역학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하드웨어, 즉 복잡한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두뇌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년 전의 인간의 선조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해 보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두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우주의 여러 가지 진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과학 활동은 인간의 활동 중 하나이기에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의 한계가 바로 과학의 한계가 됩니다. 그런데 이는 극복하지 못할 한계이므로 별로 의미 있는 한계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한계는 과학의 통일성의 문제입니다 — 밑의 얘기는 과학의 방법론적 통일성의 문제는 아닌데, 일단 이 글에서는 과학의 방법론적 통일성 문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K 교수님 수업에서 보셨듯이, 물질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인 미시입자들이 보이는 현상들을 아주 잘 기술하고 예측하는 물리학 이론이 바로 양자 역학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양자 역학이 매우 기묘한 주장을 한다는 점을 기억하실 텐데, 가령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물체들은 주어진 시간에 특정 위치에 있고 또 특정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 반해 양자 역학은 개별 미시 입자들에 대해 특정 시간에 위치와 속도값을 부여해 주지 않습니다. 또 어떤 물리학자들은 ‘측정 이전에는 미시입자들이 전혀 위치값을 갖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케일을 약간 확대하여 분자와 물질을 다루는 H 교수님의 강의에서부터는 이러한 미시세계 입자들의 특성에 대한 언급이 사라집니다. H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왓슨과 크릭의 DNA 모형 그림을 보면 마치 레고 조각들을 맞추어 놓은 것처럼 DNA를 이루는 원자/분자들이 특정 위치를 분명히 차지하고 들어 앉아 있습니다. C 교수님이 보여주신 단백질 분자 모형도 마찬가지이고, 또 다른 K 교수님이 보여주신 반도체, 나노물질의 모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가지고 현상을 설명하지 않지요.

문제는 왜 우리가 보는 거시세계는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방식처럼 움직이지 않는가를 양자 역학이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 굉장히 많은 미시입자들이 모이면 우리가 보는 거시물체처럼 움직이게 된다는 점을 양자역학에서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매우 거칠게 또는 상당히 정교하게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거칠게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은 틀렸고 정교하게 주장하시는 분들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즉, 양자 역학이 보여주는 세계상과 거시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상이 다른데,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를 양자 역학이 잘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또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미시세계를 다룰 때와 거시 세계를 다룰 때 상이한 이론을 사용하고 상이한 세계상을 그리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 역학과 거시 세계를 다루는 다른 과학 이론들은 하나로 잘 통일된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들은 미시 입자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시세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최고의 이론인 양자 역학을 아무리 사용해도, H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들의 모두를 유도하지 못합니다 (물리화학만으로는 모든 화학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H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이론들만으로는 C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들이 모두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C 교수님이 말씀 하신 이론들을 아무리 공부해도 G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이 대부분 안나옵니다. 또 다른 K 교수님께서는 다양한 크기를 가진 것들에 대해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하신 대부분의 내용은 양자역학이 아닌 고전전자기학으로 설명 가능한 것들이고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에는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지리학자, 공학자 들이 다 따로 있는데, 이 분들이 같은 이론을 가지고 대상만 달리하는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분야마다 완전히 다른 이론들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 저는 다음 중 두 번째에 동의합니다. 한 부류는 과학의 통일성을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당장은 과학 이론들이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과학이 더 발전하면 결국 하나로 통일되게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이렇게 믿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통일되고, 심지어 인간, 사회를 다루는 여러 사회 과학들도 자연 과학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입니다. 지금은 사회학이 물리학의 세부 분야가 될 것이라고 믿는 분이 거의 없지만, 적어도 자연과학은 더 좁히면 물리과학(물리학, 화학)은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 과학이 이런 방식으로 통일될 거라고 믿지 않는 분들은 미시세계를 입자들을 모여 큰 분자를 만들면 이 분자는 미시입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성질을 보이기에 이를 다루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고, 분자들이 많이 모여 물체를 이루면 또 전혀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기에 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고, 물체들이 많이 모여 집합체를 이루면 또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기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게 각 단계마다 새로운 이론이 필요한 이유는 기초단계의 이론이 완벽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상위단계가 너무 복잡해서 이를 기초단계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인간이 해 낼 수 없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과학이 위에서 말한 통일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왜 과학의 한계인지가 조금 명확해졌을 것입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진리탐구입니다. 가장 작은 미시세계로부터 전 우주까지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런데 이를 한 사람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분야마다 나누어 합니다. 즉 개별 과학 분야마다 우주의 한 부분에 대한 조각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 그림들을 맞추어 우주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 하면, 위에서 말한 통일성이 없기에, 각 조각이 서로 안 맞아서 마치 피카소의 그림 같은 우주상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세계는 피카소 그림처럼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과학이 통일성을 갖지 못한 것은 기초 단계의 이론이 완벽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상위단계를 기초단계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인간이 해낼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엄청난 과학 연구의 성과를 거두어서 우주에 대한 개별 진리들은 많이 밝혀내었지만, 우주 전체의 통일된 모습은 과학이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입니다.

 

4. 과학이 아직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그리고 미래의 과학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는 앞으로의 과학발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예측이 많았습니다. 가령 ‘21세기가 되면 현재의 대부분의 과학과 기술의 난제들이 해결되어 암 정복, 핵까지의 지구탐사, 우주 및 외부행성 기지 건설, 인간 수명 200살, 대부분의 육체/정신 노동을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 어릴 때 듣던 것보다는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느리더군요.

또한 저는 어릴 때부터 과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과학자들이 말하는 설명이 제가 사는 동안 (여러번) 바뀐 예들도 아주 많습니다. 가령 제가 어렸을 때,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이유는 ‘스케이트 날이 얼음에 압력을 가하면 얼음의 어는점이 내려가서 녹게 되어 스케이트 날이 물에 떠 있는 상태처럼 되어 미끄러진다’라고 설명되었는데, 이후에 여러 번 크게 설명이 바뀝니다. 또 다른 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물은 왜 1기압 0도씨에서 어는가?(1기압하 0도씨가 더 이상 물의 어는점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1기압에서 물이 항상 0도씨에서 얼지도 않습니다. 영하 40도에서도 얼지 않는 물방울이 구름 속에서 발견됩니다)
  • 우리 태양계에는 행성이 몇 개가 있는가?(단지 명왕성 빠지게 된 얘기가 아닙니다. 아직도 계속 태양계에 명왕성보다 큰 군소 행성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 왜 우리는 잠을 자는가? (이와 관련되어서는 정말 손가락을 다 꼽을 만큼의 얘기를 들어 보았는데, 현재로서는 다 믿을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왜 자전거는 안 넘어지나? (위키피디아 찾아보세요)
  • 지구상의 생물 종의 수는 얼마나 되나? (심해바다, 화산 용출수가 나오는 곳 등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물종들이 무수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이유는 이들 문제가 간단해 보여도 실제 대답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직 감기를 치료하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은 있어도) 약이 없는데 이는 감기 바이러스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거의 매년 어떤 때는 매 계절마다 급격히 진화하기 때문이며, 상당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암 정복도 되지 않았는데 이는 여러 종류의 암들이 각기 다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기에 그렇답니다.

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룬 경우가 있습니다. 21세기가 이것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하는 생물학의 여러 분야가 그렇습니다. 20여 년 전 제가 대학에서 일반물리학을 배울 때 교재가 Halliday와 Resnick라는 사람들이 쓴 책으로,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막 3판이 나왔는데, 당시 세계의 여러 대학에서 사용하는 표준적인 교재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책이 지금도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10판째 나왔는데, 그 동안 내용상의 큰 변화는 거의 없고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따라서 20년전 3판의 책으로 지금 가르쳐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생물학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지난 2, 30년 사이 생물학 교재의 내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세포 생물학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세포를 이루는 각 기관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기술이 많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세포 생물학은 세포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기술만 하는 학문이 아니라 세포 자체를 하나의 공학 실험실로 바꾸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금세기 내에 여러분들이 생물학의 기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20세기에 쓰여진 대부분의 공상과학소설은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지금 이루지고 있는 생물학 연구가 공상과학 수준입니다. 금세기 말이면 더 이상 생물학적 부모가 정확히 둘이라는 상식이 성립하지 않게 될 겁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한 명 일수도 또는 셋 이상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DNA를 비롯한 생명을 이루는 기본 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어 아예 생물학적 부모가 없는 고등 생명체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남자들끼리만도 부모가 될 수 있고(가령 정자의 핵을 난자에 이식한 후 다른 정자로 수정하는 방식을 통해 — 이렇게 만들어진 쥐가 이미 있답니다), 여자들끼리만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체 기관마다 다른 유전형을 가진 키메라 인간도 나올 것이고 (자연적으로 키메라인 사람들이 이미 여럿 보고 되었습니다) 아예 여러 다른 종의 DNA의 가진 혼종 생물도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 II에서만 보던 얘기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진화가 자연 선택에 의해서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인위적인 선택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심리학의 발전도 눈부십니다. 제가 젊어져서 다시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하게 된다면 저는 인지 심리학을 택하겠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 올 때에는 아직 프로이트와 융의 자취가 남아 있고 피아제라는 6, 70년대 거물의 이론이 발달/인지 심리학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더 이상 아닙니다. 현대 인지 심리학은 신경생물학, 인지과학, 통계학, 언어학, 경제학, 철학 등이 결합한 복합 학문으로 아직 초보 단계이지만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현대 인지 심리학이 우리 수업에 대해 주는 한 가지 시사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을 배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도 크게 행동에 변화를 가져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평생 쉽게 바뀌지 않으며, 알아도 바뀌지 않는 습관, 인지적 편견과 제한, 그리고 감정적 요인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는 겁니다. 가령 9,900원이나 10,000원이나 가격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을 물어볼 때는 안다고 대답하지만 같은 물건을 이 두 개의 가격으로 팔 경우 9,900원에 팔 때 훨씬 많이 팔리고, 죄인의 죄의 경중이 판사가 배고프고 피곤한지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배고프고 피곤할 때의 판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보석 허가를 훨씬 덜 하게 되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응가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맛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여러 연구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또 맞는 얘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얘기하면 틀린 얘기라도 생각되고, 반대로 틀린 얘기도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맞다고 생각되고, 마찬가지로 과학도 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면 영 재미없는 쓸모없는 얘기라고 생각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과학의 발전이 결국 인문학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지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인이 있다고 다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과학 외의 것을 전공으로 하는 여러분 같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과학의 방법과 성과를 수용하고 새로운 탐구를 시도할 경우에만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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