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몇 가지 사례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 (1908-1915)

 

 

벵상 랑베르, 자히 맥매스. 42세 프랑스인 간호사와 13세 미국인 소녀는 연결점이 없어 보이지만, 각 나라에서 최근 안락사에 대한 논쟁을 불러온 이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녔습니다. 벵상은 오토바이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있다가 법원에서 연명의료 중단 판결을 받았어요. 벵상의 어머니는 그가 단지 의식이 미약할 뿐 뇌사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연명의료 중단에 불복했죠. 자히는 편도절제술을 받은 이후 뇌사 상태에 들어갔고, 가족은 자히가 살아있다 믿고 연명의료 중단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두 사례 모두,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죽음의 정의라고 할 수 있어요. 과거엔 호흡 정지와 심정지를 사망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연명의료 장치와 소생술이 발전하면서 의식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되었지만 생징후는 유지할 수 있는 경우, 즉 아무리 기다려도 의식이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인공호흡기와 식도 튜브 등을 통해 호흡과 심박수는 유지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거예요.

장기 이식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습니다. 사망이 호흡 정지와 심정지로 규정된다면, 여전히 호흡을 하는 누군가는 살아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식이 소실되었다 해도 호흡을 하는 사람에게서 장기를 적출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일 거예요. 하지만 장기 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선 이미 멈춰버린 심장을 옮길 수는 없었어요. 호흡이 정지되어 산소 부족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조직을 이식할 수도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1968년 하버드대학교는 사망의 새로운 기준으로 뇌사를 제시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특별위원회’는 소위 불가역적 코마(irreversible coma)라고 부르는 상황을 규정했어요. 자발적 운동과 호흡, 반사가 소실되었으며 뇌파가 평탄해진 상태가 그 정의였지요. 보고서가 이후 규정 및 제도와 관련하여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온 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여전히 ‘뇌사=죽음’이라는 등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맥매스의 경우, 혈류 공급이 중단되어 뇌조직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었음에도 부모는 그가 주변 자극에 반응하고 심지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프랑스 소설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은 2014년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1]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열아홉살 청년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이식하는 과정을 둘러싼 주변 사람의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한 작품인데요. 2017년 빌 게이츠가 꼽은 여름 휴가 도서에 포함되면서 유명해진 소설이기도 하지요.

작품은 탁월한 심리묘사를 자랑하는데요. 여기서 특히 주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랭브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을 묘사한 부분이에요. 랑베르, 맥매스 두 사례와 소설에 나온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뇌사’가 지닌 무게를 가늠해 보려 합니다. 그 무게는 아마 요새 점점 부각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우리 생각을 돌아보게 해 줄 거라 생각합니다.

 

의식 소실과 뇌사의 경계 : 벵상 랑베르의 경우

벵상 랑베르는 11년 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사지 마비, 미약한 의식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이나 자극에 반응할 수는 없었고 영양 튜브로 음식과 수분을 공급받아야 했지만, 자발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고 가끔 눈을 뜨곤 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상태를 호전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지만 의료팀은 더 치료하는 것이 가망 없는 일이라고 판단, 2013년 벵상의 아내와 치료 중단을 상의하지요.

벵상은 사고 전에 연명의료에 관한 의견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내 라셸은 그가 연명의료를 받길 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며 연명의료를 중단할 것을 결정하지요. 여기에 다른 가족, 특히 그의 부모가 반대 의견을 표합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아직 살아 있는 벵상을 죽이는 것을 허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부모는 벵상이 뇌사 상태가 아니라 미약한 의식 상태일 뿐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다고 보았어요. 단지 움직일 수 없을 뿐, 나머지 신체활동은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죠. 벵상은 사지마비 상태인 장애인일 뿐, 그가 사망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예요. 마치 사지마비 장애를 입었지만 눈은 움직일 수 있어 이십만 번을 깜빡거려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을 썼던 장 도미니크 보비와 더 가까운 상태라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벵상의 생명 유지 장치를 끄는 일은 사지마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될 거예요. 단지 그가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음식을 주지 않는 일이니까요.

아내와 형제들은 계속 치료를 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학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벵상이 원하지 않는 치료를 지속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정신과 간호사였던 벵상이 평소에 식물인간 상태가 되면 자신은 계속 치료받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아내와 친척의 증언이 이쪽 입장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2015년 6월 유럽인권재판소 공판 앞에서 사람들이 ‘벵상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출처: 씨엔엔

 

 

두 의견은 충돌했고 견해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어요. 결국 법적 다툼으로 이어졌고, 찬반논쟁은 가열하게 이어졌지요. 프랑스 법원이 몇 번씩 판결을 바꾸고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결정이 개입하는 등 법도 벵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쪽을 명확하게 지지하지 못했습니다.[2]

결국, 프랑스 최고법원인 파기원(Cour de Cassation)이 2019년 7월2일 치료 중단을 결정했고, 의료진은 벵상의 영양공급 튜브를 제거했습니다. 벵상은 9일 뒤인 2019년 7월11일 사망했지요. 이 사건에서 그가 사고 전에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 의견을 명확히 밝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남겨두었다면 간단하게 정리되었을 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랬다 한들 부모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 아들은 죽은 것도, 죽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영양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오히려 내 아들을 죽이는 일이다’라고.

더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견해일 거예요. 벵상이 처한 상태는 무엇이었을까요. 반대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어 말씀드릴 자히 맥매스 사건은 이 지점을 더 부각해서 보여주지요.

 

뇌사와 전통적 죽음의 경계 : 자히 맥매스의 경우

자히 맥매스는 2013년 12월 오클랜드 아동병원에서 편도절제술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입원실에서 자히는 계속 피를 흘렸고 중환자실로 옮겨집니다.[3] 출혈이 심했지만 병원 기록에 의하면 필요한 처치는 충분히 이뤄졌다고 해요. 다음날 새벽 자히의 산소포화도가 79퍼센트까지 떨어진 것을 본 할머니 샌드라는 급하게 의료진을 불렀고, 기도 삽관이 이뤄졌지만 자히의 심장은 멈춘 상태였어요. 후속 치료로 심박과 호흡을 안정시켰지만, 자히는 뇌사 상태에 빠져듭니다.

자히는 장비 도움 없이는 숨 쉴 수 없었고 동공대광반사를 보이지도 않았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사가 손전등으로 의식이 없는 환자의 눈을 비추는 장면을 기억하실 거예요. 이때 동공 반응에 따라 신경계 상태를 판단하는 것이 동공대광반사인데, 빛을 비춰도 동공이 변화가 없다는 것은 신경 반응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뇌파 검사도 아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뇌사 판정이 이뤄졌기에 병원은 가족에게 연명의료 장치를 중단하고 장기 기증을 권했어요. 주 정부는 사망증명서를 발부했죠. 모두가 자히를 죽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비록 장치가 돕고 있지만 숨을 쉬고 있고, 자히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 갈등이었어요. 흑인인 맥매스 가족은 자히와 가족들이 병원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미국 의료제도가 자히를 포함한 미국 흑인에게 불공정하게 짜여 있다고 느꼈어요. 자히 사건과는 별개로 미국에선 여전히 백인과 흑인 사이에 건강 격차가 존재하기에, 맥매스 가족이 주장하는 바가 터무니없다고 일축해 버릴 수는 없었죠.[4] 교회와 인터넷을 통해 맥매스 가족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지원을 요청했고, 논쟁은 점차 확산하여 갔습니다.

 

자히를 바라보고 있는 맥매스 가족. 출처: 뉴요커

 

 

의료과오 소송이 진행되는 것과 별개로 병원은 자히에게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확정 짓고 싶어 했어요. 가족은 이를 거부하고 기부금을 통해 자히를 뉴저지로 옮겼습니다. 뉴저지는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종교적 믿음을 근거로 가족이 뇌사 판정을 거부할 수 있는 법을 가진 주입니다. 4년 동안 자히는 부모가 임시로 구한 거처에서 돌봄을 받았어요. 자히의 어머니 나일라와 변호사는 자히가 건네는 말에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지요.[5]

2018년 6월 22일, 뉴저지의 한 병원에서 자히가 사망했다고 가족 변호사인 크리스토퍼 돌란이 발표했습니다. 사망 원인은 간부전으로 인한 출혈로 기록되었지요. 자히는 두 번 사망한 셈이에요. 한 번은 뇌사로, 한 번은 간부전으로.

자히 사건을 놓고 생명윤리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했어요. 많은 사람은 맥매스 가족이 보이는 태도는 오히려 자히를 제대로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자히는 이미 죽었는데, 굳이 매달리는 건 집착일 뿐이라는 거예요. 한편,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생명윤리센터 로버트 트루그는 이런 견해에 반대를 표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흑인이기에 받는 차별을 고려하지 않고 이 사건에 접근할 수 없으며, 죽음의 정의를 다시 한번 논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죠.

앞서 벵상 사건은 벵상이 뇌사 정의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자히 사건은 1968년 내려진 뇌사의 정의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촉발했죠. 가슴에 귀를 대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족의 몸, 하지만 더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표정을 지을 수도 없는 그 몸을 바라보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그려낸 죽음의 모습들

시몽 랭브르는 파도타기를 즐기는 스무살 청년으로, 잡지에 소개된 세계 각지의 파도를 타러 여행을 떠나는 꿈을 품고 있어요. 적당한 파도가 밀려올 거라는 소식을 들은 시몽과 친구 조앙, 크리스는 새벽에 차를 타고 바닷가로 달려갑니다. 바다로 나아가는 시몽은 파도를 기다립니다. “자기 존재의 파열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내고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져 생명 탄 것들에 섞여 들게 해주는 순간.” 파도가 그를 밀어 올리면 시몽은 보드 위에서 파도와 하나가 됩니다.

파도타기를 마치고 온몸을 소진한 채로 셋은 다시 귀갓길에 올라요. 예상하셨겠지만, 운전대를 잡은 크리스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합니다. 셋이 타고 있던 소형 트럭은 과속 중에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기둥에 충돌하고 말았어요. 안타깝게도 셋 중 둘만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죠. 가운데 앉았던 시몽은 전면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친 상태로 구조대에 발견됩니다.

시몽이 실려 간 병원에는 소생의학과(응급의학과와 중환자의학과 역할을 같이 수행하는 프랑스 의학 분야)가 있고, 당직 의사 피에르 레볼이 그를 맞아들여요. 시몽은 글라스고 코마 척도 3(머리를 다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신경학적 평가 방법으로 눈, 자극반응, 언어기능 세 가지 항목을 측정하며, 3점은 코마 상태다)으로 뇌출혈이 의심되는 상태죠. 그러나 피에르는 시몽의 몸이 아닌, 한 시간 뒤 전달받은 엑스레이 영상에서 죽음을 봅니다. “한 시간 뒤,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이 자신의 도착을 알려 온다. 엑스레이가 보다 환하고 보다 넓은 형체로 투과되는 것을 막는 불규칙한 윤곽의 움직이는 얼룩. 바로 저거다. 저게 죽음이다.” 영상에서 본 뇌손상의 증거가 소생의학과 피에르가 보는 죽음입니다.

시몽의 어머니 마리안은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처음 찾는 낯선 병원에서 헤매는 것도 잠시, 마리안을 맞는 것은 피에르입니다. 피에르는 경험이 안배한 암묵적 지식에 따라 첫 마디를 꺼내는 것에 신중합니다. 이미 큰일이 벌어졌음을 마리안이 직감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무한한 친절함으로, 말을 꺼내기까지의 시간을 늘리는 데 동조한다.” 그리고 피에르는 마리안에게 시몽의 상태를 전달합니다. “’아드님의 상태가 아주 위중합니다.’ … 시몽은 병원에 도착할 당시 이미 코마 상태였어요.”

전화를 받고 도착한 남편 숀과 함께 마리안은 시몽이 누워 있는 병실에 들어섭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몸. 의학적으로 선고된 죽음과는 별개로, 시몽의 몸은 여전히 박동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숨을 쉰다. 그것이 느껴진다. 아이의 가슴이 뛴다. 그 소리가 들린다(그려는 어느 가을날 오후, 오데옹의 초음파 검진 센터에서, 화면 위에서는 빛나는 얼룩들이 그저 덩어리를 이루고 있을 뿐인데도 최초의 심장 박동이, 또렷하게 쿵쿵거리는 원초적 뜀박질 소리가 들렸던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

다른 곳이 다치지 않았기에 시몽이 다시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아들을 부르는 마리안. “내 말 들리니, 시몽, <마이 보이>, 우리가 여기 있어.” 여전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피부 때문에,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 때문에 부모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이 심장이 뛰어요, 그렇지 않나요?” 기대를 품고 던진 질문.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조심스럽지만 단정적입니다.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너무 오랫동안 흘렸더군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카텔 퀼레베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밀도 있는 표현으로 각자의 마음을 잘 표현한 소설도 뛰어나지만, 깨어나지 못하는 시몽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그린 장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영화 또한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준다. 출처: 아이엠디비

 

 

피에르는 부모에게 죽음의 소식을 전달하는 저승사자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기계 때문이지만 숨을 쉬고 있는 몸을 ‘죽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이후 소설은 시몽의 심장을 기증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역할과 생각을 깊이 있게 담아내며 이어집니다. 위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의사 피에르와 어머니 마리안이 보는 죽음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이를 굳이 학문적인 표현으로 옮기자면, 의학적 죽음과 현상학적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예요. 의학적 합의가 낳은 상징적 죽음과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서 타인의(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우리에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는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바뀌고 있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소위 ‘죽음학’에 관한 책들을 최근 여럿 만나볼 수 있는 것이 그 방증이겠지요. 잘 죽는 법, 죽음을 준비하는 법, 때로, 미리 죽음의 순간에 관한 세부를 결정하는 법까지. 이를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법과 제도가 가져온 새로운 논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의과학이 발전하면서 죽음을 다시 정의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어요. 단지,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하는 것을 꺼려왔을 뿐이지요.

오랫동안 연명의료 중단과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이어져 왔던 외국 사례가 우리에게 정답을 줄 수 없음을 벵상과 자히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참고로 삼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답을 내려야 하겠지요. 학문과 제도는 우리 삶을 바꾸지만, 때로 그것을 개인 수준에서 직접 수용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경우가 여럿 보입니다. 의학과 개인, 학술과 사적 자아의 죽음에 대한 인식 차이 또한 그 예시 중 하나겠지요. 우리는 무엇을 죽음이라고 말하고, 어떤 죽음을 승인하며,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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