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기─유리나 호박을 문지르면 작은 실이나 종잇조각을 끌어당기거나 밀쳐내는 힘이 발생하는 것─는 고대로부터 알려진 현상이었다.

18세기 초에 기계를 이용해서 물체에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전기는 체계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계몽시대 대중 과학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런던의 과학 기기 제작자이자 왕립학회에 고용된 실험가였던 프랜시스 헉스비가 유리로 만든 구를 회전시키면서 계속 솔로 마찰시켜 전기를 일으키는 장치를 설계했다. 뉴턴은 헉스비의 실험에 관심을 보였고, 실험 결과를 가지고 확장력 있는 신비로운 유체 또는 ‘에테르’가 모든 물체를 둘러싸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물체가 전도될 때 ‘전기소(과거에 전도체나 자석 따위에서 발산된다고 상상되었던 미립자. 자석의 경우 자기소, 전도체의 경우 전기소로 번역한다─옮긴이)’가 물체에서 발산되거나 흡수된다고 생각했다. 1730년대 초에 실험가였던 스티븐 그레이는 어떤 물체는 그 자체로 전기를 띠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먼 거리의 전하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 전기 유도 현상을 입증했다.

실험 강연자 중 가장 사업가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놀레는 이 현상을 대중 영역에 도입했다. 1730년대 중반 파리에서 열렸던 강연에서 그는 다양한 전기 현상을 교양 있는 남녀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전기 기계에 부착된 전도체를 통해 절연판 위에 서 있는 사람이나 천장에서 내려오는 줄에 매단 소년에게 전기를 통하게 하기도 했다. 전기가 통한 소년에게서 불꽃이 튀어 오르거나, 소년이 종잇조각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곤했다.

 

놀레의 《Essais sur I’électricité des corps》의 속표지. 파리(1746년) 장 앙투안 놀레의 전기 실험 에서 한 소년이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매달려 있다.

 

 

이런 실험에서 전기는 과거의 빛을 대신해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지식의 소통과 전달을 상징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라이트가 그린 태양계의 장면에서 보듯, 과학적 지식은 남녀노소의 사교적인 모임에서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한편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이루어지고 전기의 불꽃이 튀는 현장은 성적 암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전기유도 실험 시연에서 한 젊은 여성의 몸에 전기가 통하자 곁에 있는 남성에게 ‘전기 키스’를 해서 방전시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기도 했다.

1746년, 전기 실험은 (글자 그대로) 충격을 주는 새로운 장치가 등장하면서 한층 더 발전했다. 그것은 라이덴대학의 교수였던 피터르 판 뮈스헨브루크가 발명한 라이덴병이었다. 이 병은 병의 외부가 땅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기를 흘려주면 상당한 양의 전하를 모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뚜껑을 통해 금속 핀을 집어넣으면 순식간에 방전된다.

 

뮈스헨브루크의 연구실에서 행해진 라이덴병 실험. 회전하는 유리 구가 정전 기전기의 역할을 하여 조수인 안드레아스 퀴네우스의 손에 들린 물이 채워진 유리 병에 전기를 충전한다. 그는 철사를 병 안의 물과 닿아있는 철사에 손을 대고 전기 충격을 받았다.

 

방전될 때 전기 충격의 강도가 상당해서 손에 손을 잡고 선 사람들을 통해 멀리까지 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문제는 이 병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원리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해법을 제시한 사람은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이자 언론인인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그는 《전기 실험과 관찰》(1751년)에서 미묘하고 확장성 있는 전기적 유체가 물체에 스며들어가는데 만일 그 유체가 어떤 물체에 보통보다 많은 양으로 존재하면 그 물체는 양의 전하를 띠고, 부족하면 물체는 음의 전하를 띤다고 설명했다. 이 이론은 물체가 전하를 띠거나 전기가 유도되거나 다시 중성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라이덴병은 전기적 유체를 저장한 병으로, 병의 내부에 유체가 축적되었다가 병 바깥으로 빠져나간다고 설명했다. 음의 전하를 띠고 있는 병의 외부가 양의 전하를 띠고 있는 병의 내부와 연결되면 강한 방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그의 이론을 직접 실용적 분야에 적용했다. 그는 번개가 비구름과 땅 사이의 강력한 방전 현상일뿐임을 보여주었고, 폭풍이 칠 때 전기적 유체가 다른 곳에 피해를 미치지 않고 땅으로 흘러가도록 건물마다 피뢰침을 세우자는 운동을 벌였다.

라이덴병과 프랭클린의 피뢰침은 곧 상업적 강연자들의 주제에 포함되었다. 프랭클린의 친구인 침례교 목사 에버니저 키너슬리는 1740년대 말과 1750년대에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과 인도 서부를 돌며 전기에 관한 강연을 했다. 키너슬리는 전기력을 자연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피뢰침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놀레의 실험 시연과 마찬가지로 그의 강연 역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기 실험의 시연은 겉보기에는 합리적 지식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찬양하는 듯했지만, 한편으로 자연의 경이를 보여주어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런 시연은 실험을 목격하는 사람들, 특히 실험 삼아 또는 다양한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전기를 직접 몸에 통하도록 한 사람들로부터 열광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전기 실험의 시연은 18세기 후반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감각적인 문화 안에서 인기 있는 한자리를 차지했다. 전기 시연은 사교 모임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사람들로부터 강렬한 감정과 신체적 열정을 직접 이끌어냈다.

전기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감의 상징물이 되었다. 어떤 시연 자리에서는 전기를 남성과 여성이 서로 끌어당기는 자연의 힘으로 표현했다. 벤자민 마틴이 1755년에 그린 그림에는 전기 시연의 정서적 측면이 표현되어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전기 장치를 바라보는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을 그린 이 그림은 가정, 더 나아가 사회 안에서 애정 어린 관계를 자각하는 데 전기가 도움을 준다는 것을 묘사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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