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1. 개요
2. 전개
2.1.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 중
3.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
4. 과학자들의 입장
5. 교훈
5.1. 과학계의 교훈
5.2. 인문학계의 교훈
6. 그 이후
7. 비슷한 논쟁
8. 관련항목

문과vs이과 대학 교수버전이라 카더라 현실은 사이좋게 치킨집

그래도 우리는 못따라가는 승리자들의 지능낭비다

1. 개요

과학전쟁이란 일부 인문학자[1]들이 “과학지식은 패러다임 (paradigm)에 따라 결과가 다른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며 사회문화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과학지식의 본질을 놓고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 일어난 논쟁을 말한다.

2. 전개

홍성욱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과학전쟁”(Science War)이 북미와 유럽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서 화제와 논쟁의 대상이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혹은 과학전쟁 에 대한 기사가 복수 신문[2]은 및 전문 과학학술지[3]에 게재되었고, 1996년 가을 독일 빌레펠트에서 열린 유럽과학기술사회학회에선 과학전쟁이 학자들 사이의 규범을 어기고 서로를 헐뜯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개탄한 성명서가 채택되는 등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다.

 

2.1.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 중

과학전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을 인용하였다.[4] 본문은 다음의 기고문 참고. 국내외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대한 해부

… 1980년대를 통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 과학문화학의 연구와 주장을 몰랐거나, 알아도 무관심했거나, 관심이 있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에 대한 과학자의 반론은 영국 런던대학의 생의학 교수인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가 저술한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이라는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개설서였다. 책의 첫머리부터 월퍼트는 과학이 특별한(special and privileged) 지식임을 강조했다. 그는 과학이 우리의 시각, 경험, 직관 등에 의존하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비자연적”(unnatural) 사고 수학의 사용, 복잡한 실험 데이터의 해석, 추상적 개념의 사용 등을 요구하는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상식에 반(反)하는 과학의 특성이 과학을 일반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이런 몰이해가 상대주의적 과학사회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가 과학이 비자연적인 특별한 지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의도하는 바는, 과학과 다른 지식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과학이나 인간의 다른 지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자들의 입장을 견제,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SSK 과학사회학을 “반-과학”(anti-science), 이들을 “과학을 단지 수사학, 설득, 권력의 추구”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고, 이들의 상대주의가 현대 과학과 원시 사회의 신화적 자연관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학의 (몰)이해에서 기원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는 신화적 자연관과 근대 과학의 차이를 길게 설명하면서 과학적 분석은 실재(reality)에 닻을 내리고 있고, 따라서 객관적이며, 결과적으로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지식이라고 단언했다. 과학의 진보는 사회문화적 요인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과학자의 노력과 사고에 근거한 내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과학이 사회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는 모든 주장을 상대주의, 회의론으로 돌리고 있다.

월퍼트의 책이 나온 다음 해 과학자사회에서 스타급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와인버그[5]가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 재판, 1993)이라는 저서에서 과학에 대한 제반 철학적 입장과 사회구성주의를 다시 비판했다. 먼저 그는 근대 철학이, 특히 20세기 과학철학이 과학자에게 미친 영향이 거의 전무하다고 하면서 과학에서 철학 무용론을 강조했다. 철학이 과학에 미친 영향의 저평가는 곧바로 철학이외의 다른 사회문화적 요소가 과학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과학의 진리는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타협’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합의”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이 그의 표적이었다. 와이버그는 20세기 후반의 입자물리학의 발전을 사회구성주의의 방법론으로 기술한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쿼크의 구성(Constructing Quarks)을 주 비판 대상으로 선택한 뒤, 입자물리학의 이론, 법칙, 심지어는 몇몇 “실재”(entity)가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피커링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은 본격적으로 과학전쟁이 불붙기 시작한 해였다. 이 해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소인 우즈홀 (Woods Hole) 해양생물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폴 그로스(Paul Gross)와 럿거스 대학의 수학자인 노만 레빗(Normal Levitt)이 SSK 과학사회학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고등미신(Higher Superstition)이란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기서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과학론자, 페미니스트 과학론자, 극단적인 환경론자, AIDS 활동가, 다문화주의자(multiculturalist)들을 싸잡아서 신좌익의 뒤를 잇는 “강단좌익”(academic left)으로 규정, 이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난했다. 강단좌익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골자는 1) 강단좌익 대부분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2) 과학에 대해 조금 아는 경우도 과학을 (의도적으로) 오해한 경우가 태반이며, 3) 이런 무지와 오해는 과학을 왜곡된 모습으로 그리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 과학사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로스와 레빗은 고등미신의 출판의 여세를 몰아 1995년 여름 뉴욕 과학아카데미의 후원 하에 초대형 학회를 개최했고, 주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발표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UFO 광신론자, 창조론자, 민간의료와 같은 대체의료(alternative medicine) 신봉자와 함께 싸잡아서 “반과학”(anti-science)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대항해서 그로스와 레빗의 고등미신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던 “소샬텍스트”(Social Text)의 편집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자신의 소샬텍스트의 한 호를 “과학전쟁”이라는 제목하에 출판하는 계획을 세웠고 샌드라 하딩, 스탠리 아로노위츠같이 역시 고등미신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저자들의 반론을 모은 뒤 1996년 봄에 이를 출판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소샬텍스트의 “과학전쟁” 호에 논문을 기고했던 기고자 중 한 명인 앨런 소칼(Alan Sokal)이 자신의 논문이 엉터리 날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것이다. 소칼의 인터뷰는 과학사회학 진영에 터진 “폭탄,” 소칼의 “화염병”등으로 묘사되며 유력 일간지의 문화면과 사회면을 장식했고 과학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소칼은 스스로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좌익지식인, 국제주의자임을 자청하고 있는 뉴욕대학의 수리물리 교수였다. 그는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이 과학을 상대적, 주관적으로 만들고 이것이 “진리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합의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사회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을 참기 힘들었음이 자신이 “날조”를 택한 동기라고 밝혔다.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과학에 대한 주장의 허구를 밝히기 위해 엉터리 논문을 써서 이들의 학술지에 출판하는 방법을 택한 소칼은 “경계선을 넘나들기: 양자 중력의 변형적인 해석학을 위해서”(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s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라는 이해하기 힘든 제목에 각주가 100개가 넘고 참고문헌이 200개가 넘게 달려있으며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의 인용으로 가득한 긴 논문을 써서 소샬텍스트에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소칼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을 간단히 소개한 뒤에 아직도 과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양자중력이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며 해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에선 해방적인 포스트모던 과학의 특징으로 1) 비선형성(nonlinearity)과 비연속성의 강조, 2) 인간과 자연, 관찰자와 대상, 주체와 객체의 구분의 초월과 해체, 3) 근대과학의 특징인 정적인 근대과학의 특성과 위계의 해체, 4) 상징과 표현의 강조, 마지막으로 5) 전통과학의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부정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소칼은, 만일 포스트모던한 사회구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이 학문이 엄격한 사고보다는 그럴듯한 입발림과 과학자를 자신들의 동지로 얻을 수 있다는 이점만을 선호한다면 이 엉터리 논문을 눈치채지 못하고 출판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소칼은 이러한 논리의 허구의 증명을 통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세계는 존재하며, 이 세계의 특성은 단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사실과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소칼은 합리적 사고와 자연,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정확한 분석이 사회의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싸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소칼 사건은 “와이즈 사건”(Wise Affair)라고 불린 충격적인 사건의 전주곡이었다. 소칼의 날조가 밝혀진 후 스티븐 와인버그는 “뉴욕 서평지”(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긴 글에서 소칼을 칭찬한 뒤에 소칼의 날조가 모든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허무맹랑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와인버그에 대해 몇 사람이 같은 잡지에 반론을 게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교수 노턴 와이즈(Norton Wise)였다. 와이즈는 1997년 초에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 (아인슈타인이 재직했던 곳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연구소)에 있는 사회과학스쿨의 과학학(Science Studies) 교수직에 추천되었다. 과학사학계에서 와이즈는 명성과 실력을 인정받는 학자였지만, 고등연구소의 과학자들과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와인버그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다. 이 과학학교수직은 브루노 라투어도 추천되었다가 과학자들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던 자리기도 했다. …

 

3.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

이들의 이론도 시간에 따라 변하고 학파에 따라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과학철학의 상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과학지식은 과학자 개인의 합리적 추론과 객관적 관찰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사회적 협상과 합의에 의해서도 구성된 상대적이며 한 시대에 한정된 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사회문화의 영향 : 관찰을 해석하는 방법 등에 불가피하게 사회문화의 영향이 들어간다.
  •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 : 시대에 따라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변한다.(업데이트이든 개정이든)

더불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런 지적들을 싸잡아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어떤 설을 진리라 주장하면서 다른 의견들을 싸잡아 무시하는 태도는 겉보기엔 미신을 믿는 광신교도들의 태도와 다를바 없으며, 이는 학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다.[6]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 과연 사실이냐는 문제와, 그것이 과학자 외의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가치있고 이득을 주는 것이냐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별개의 문제이고 말이다.[7]

그리고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을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고 사실과는 동떨어졌다거나 아예 사실이 존재하니 않는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상대성이론의 역사를 연구한 사회구성주의의 대가 해리 콜린스는 “상대성이론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8]라고 말한 바 있고, 사회구성주의와는 좀 떨어졌지만 저명한 학자인 브루노 라투르도 과학을 이미 정립된 ‘과학’과 아직 정립되지 않은 ‘연구’로 나누고 진화론과 같은 ‘과학’은 연구와 달리 합리적이고 증명된 것이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9]

사회구성주의자의 의견으로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이 있다. 원문은 다음의 논문 참고. 누가 과학울 두려워하는가 ” – 최근 ” 과학 전쟁 ” ( Science Wars ) 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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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학자들의 입장

물론 과학자들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가능한 공통적인 입장을 서술한다. 위의 사회구성주의 진영과 반대되는 의견을 보완해 추가해주길 바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사회적 구성론과 상대주의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한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중 두가지(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이 아주 터무니 없는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 주장들이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뿐이다. 과학자도 사람이니만큼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받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저명한 과학자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관측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수정/폐기 된다는 점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보조가설들을 수정해야 유지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조금 수정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대뜸 일반화하여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실제 과학사에서는 몇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지만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

사회구성주의에서 패러다임과 사회적 영향 의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뉴턴 물리학, 아인슈타인 물리학, 양자역학의 순으로 이어지는 역학의 패러다임 변화는 철학적인 패러다임이나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물론 과학자들도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이므로 사회적인 동의가 패러다임의 전제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집단으로서의 동의가 아니라 부지(不知)했던 차원에 대한 증명이 완료되었음을 모두가 검증하였다는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다.따라서 과학적 패러다임은 그 해석결과의 유사와는 무관하게 공존 혹은 후퇴 불가능하다. 이전에 놓친 것을 새로 발견하거나 오류를 폐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알아낸 것(엄밀한 영역으로 들어가자면, 수학에서 공리에 의해 증명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을 잊고 묻어버리거나 ‘사회적 집단’ 에 따라 일부 지식만을 취사선택하는 집단이 대립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여기서 멈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것이 반과학으로 향한다면 과학자들이 뒷목을 잡을 수 밖에 없다. 사회구성주의 진영에서는 자신들이 반과학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을 추켜세운다고 열심히 주장하지만[10] 일부 철학자들이 보이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빼도박도 못할 반과학이다. 일례로 파이어아벤트는 강연 중에서 대체의학,초능력이 현대과학과 별 다를바 없는 동등한 과학이며 자신은 텔레파시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11] 파이어아벤트는 사회구성주의 내에서도 좀 극단으로 치우쳤으니 무시하고서라도, 페미니즘적 과학학의 거두로서 사회구성주의 안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샌드라 하딩도 실증주의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이 전부 남성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2] 그리고 이런 주장은 페미니즘의 입장에 선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많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인정하지만, 또한 위와 같은 반과학적 주장들을 탁월한 업적이다.,명쾌한 분석이다.라고 칭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과학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연히 사회구성주의=반과학 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구성주의 진영에서 ‘과학계 내에서 사회적 상대주의의 발현’ 으로 발견한 상당수의 예가 유사과학 혹은 과학계 내의 아집과 싸우고 있는 과학계의 모습을 나름대로 해석한 그쪽 입장에서의 시각일 수 있다. 진화-창조론 논쟁이라든가.

‘1+1=2’를 인정하지 않는 수학자 집단이 있을 수 있다. / ‘지구가 평평하다’ 라고 주장하는 과학자 집단이 있을 수 있다.[13] 그러나 그것이 ‘1+1=2’ 혹은 ‘지구는 둥글다’ 라는 것의 상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외에도 사회구성주의 진영의 실수로 과학자들이 뒷목을 잡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 현장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듯. 예로 상온핵융합이 있다. 20년전 유타대 교수 2명이 자신들이 상온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된 적 있다. 당시 그들의 연구는 실험의 재연실패,데이터 조작 징후 발견 등 연구부정행위로 드러나 기각되었는데, 해리 콜린스라는 사회구성주의자가 이것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연구부정행위와 관련된 부분은 감추고 물리학의 관행과 어긋나서 기각된 것처럼 서술하여 오해를 부른 일이 있다.

 

5. 교훈

간단히 요약하면 과학자들은 “과학의 엄밀성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왜곡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사회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좀 사회문제에도 관심좀 가지고 살아라. 우리가 보기엔 니들도 인간사회 흐름따라 이래저래 하는것 같더만“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투닥투닥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사이에 골이 생기기도 했다. 인문학계쪽은 과학자들을 과학에 미쳐서 딴건 어찌되든 상관안하는 사람들쪽으로, 과학계쪽은 인문사회학자들을 유사과학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며 서로 키배언쟁을 벌인 것이다.어차피 르네상스 이후로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마는

양측의 시각 대립을 보여주는 예로 위에서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만 보아도 일관되게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을 ‘소칼의 날조 사건’ 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날조한 논문을 기고한 것이니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단어 선정에 있어서 의도된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5.1. 과학계의 교훈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사회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이 병크를 저질렀고 정의롭고 똑똑한 과학자들이 승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일부 과학자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과학지상주의 태도는 까여야 마땅했다. 과학이 엄밀하고 신뢰도가 높은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 과학들도 결국 밥먹고 똥싸고 실수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과학 이외의 분야에 무지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 페니: “라디오헤드가 누군지 알아?

단편적인 예로 리처드 파인만이 언급한 한 일화를 보면 이들의 태도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미술가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이 친구는 가끔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 꽃을 집어 들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죠. “얼마나 예쁜가 좀 보라고.”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이어서 이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미술가로서 나는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어. 그런데 과학자인 자네는 꽃을 갈기갈기 찢어 지루한 물건으로 만들고 말지.” 저는 이 친구가 좀 돌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가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면 저나 다른 사람도 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죠. 물론 제 미적 감각이 친구보다 덜 세련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능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저는 꽃에서 제 친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봅니다. 꽃 속의 세포를 상상할 수 있고 세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것도 또한 아름답습니다. 꽃의 색은 곤충을 유인하여 수정을 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곤충이 색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죠.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나옵니다. 인간보다 더 낮은 생명체들에게도 이런 미적 감각이 있을까? 미적 감각은 왜 존재하는가? 과학적으로 알면 알수록 꽃은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임과 동시에 경탄의 대상이 되고, 꽃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늘어만 갑니다. 이 즐거움이 어떻게 하면 줄어드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논쟁에서 당연히 파인만의 사고에 동의하지 않을수도 있다. 세세하게 대상을 아는 것보다는 자신의 느낌에 따라, 복잡한 사고과정 없이 그저 감정을 느끼는 것을 더 아름답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과 그 가치가 대중에게 올바로 전달되고, 대중도 그것을 중요시하게 될 때에야 과학의 가치는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은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전락할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문학자들이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는건 아니다

결국 이런 논쟁이 생겨난 근본 원인은 과학계와 사회학계(또는 인문학계)[14]의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란 점이 중요하다. 과거 철학에서 중요시한 3대 가치로 진, 선, 미(즉 진리, 윤리, 아름다움)가 있는데, 현대과학은 진리에 치중하는 반면, 인문학계는 윤리 등의 다른 가치도 중요시한다. 과학이 “무엇이 사실이냐?“를 따진다면, 인문학은 “그것이 올바르냐?“를 따진다는 것. 앞서의 예를 봐도, 파인만 같은 물리학자는 꽃이 구성된 원리를 ‘아름답다’ 보는 반면, 미술가는 ‘현재 있는 꽃’이 주는 ‘심리적 미감‘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혹은 그 꽃을 보는 사람들이 취할 반응을 예상하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명백히 둘은 추구하는 즐거움이 다르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을 무작정 깎아내리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하며, 과학자들이 인문학에 이런 태도로 접근했던 것이 과학자들의 잘못.

과학계가 보였던 무조건적인 이성중심주의, 진리의 추구가 결국 인간 집단 전체의 측면에서 봤을 때에는 도리어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건 분명 사실이다. 무조건적인 이성중심주의 자체가 이미 비이성적인 태도이기 때문. 인간 능력의 한계, 현실세계가 인간을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성을 지나칠 정도로 추구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15]

 

5.2. 인문학계의 교훈

다만 위 서술은 과학 vs 인문학이라는 흑백논리에 의거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과학계에서도 윤리적으로 민감해 할 집단이 있거나 현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위 혹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소재에 대해서는 아예 연구를 하지 않거나 설령 연구 결과가 나와도 발표를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위키러들도 알다시피 배아줄기세포나 진화론은 기독계와 연일 피튀기는 전쟁터이기에 특히 서구쪽의 신생 과학도들은 기독교 단체와 맞붙기를 결심하지 않는 이상 연구 소재를 정할때 이쪽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물리 화학 공학자들의 경우 무기개발 분야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물론 덕업일치를 노리는 새나라 어린이 밀덕후들은 예외다. 살인을 목적으로(혹은 살인에 적합한)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분야에 종사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타인에게 그리 좋은 시선만을 받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이쪽은 자칫하면 지탄받기도 쉽다. 당장 리틀 보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만 봐도 당시 명령을 내린 상부보다 더 표면적으로 인지되기에 세계적으로 비난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향의 원인은 과학자들 역시 인문학자들과 같이 똑같은 세상, 똑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16][17]

당연히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과학자는 인문학적 지식에 무지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야 문과, 이과로 학문의 영역을 분리하여 청소년들을 한쪽에만 속하게 가둬버리니 그런 시각이 형성될 수도 있겠지만 영미권에서는 과학과 철학을 같이 배우기도 하는 등 그런 쪽으로 상당히 유연한 편이다. 그리고 위키러가 이공계열 학사 재학 이상의 학력이라면 잘 알겠지만 당연히 정상적인 대학에서는 이공계열 학도들에게도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을 쌓도록 커리큘럼을 짠다. 사실 학사과정 까지 갈 것 없이 애초에 과학자라고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든가 인문학적 고찰은 갖다버리고 과학계통 자료만 탐독한다고 생각하는게 넌센스다(…). 더욱이 인문학자들 역시 그동안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나름의 인문학적 결론을 내려 책을 써낸다. 인문학자들의 활동 또한 사회에 큰 파급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소칼이 지적했던 것은 이런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에 전문적이지 못한 인문학자들이 섣불리 과학 이론들을 인용하는 태도이다.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과학 vs 인문학 식의 진영 논리를 적용시키는건 그냥 싸움판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문제점은 너무 오버했다는 것이다. 과학계의 엄밀한 연구방식에 지나치게 과민반응해 기독교의 권위주의나 나치의 전체주의와 별반 다를바 없는 위험사상으로 찍어버렸다. 과학이나 종교나 국가주의나 “A라는 가치를 중시하고, 그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A에 따라 해석한다”는 점에서 편협한 관점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지만[18] 그렇다고 마이너리티 리포트마냥 죄인 취급하는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위의 홍성욱 교수의 말처럼 그런 과민반응 자체가 포용력 없이 편협한 관점이 될 수 있기 때문. 상식적으로 과학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연구하는건 결국 그 연구 결과가 사람들을 이롭게 할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않은가?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소칼이 지적했던 것처럼, 대안없이 ‘탈피해야 한다’고만 말하는 이론치고 제대로된 해결책이었던 적이 없다.[19] 과학자들이 해석가치를 설정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인문학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집중하는 정도 자체가 과학이 추구하는 위계라고 해석해버린 것이다.

 

6. 그 이후

현재는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이후로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정/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과학계도 더 이상의 광역도발은 서로에게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 예전보다는 많이 조용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세력이 줄어든 것도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기존 것을 비판하고 해체하자는 얘기에 사회학, 인문학계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신합리주의자 사이에서 과학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과학과 공학의  에서 또 다른 과학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7. 비슷한 논쟁

이런 마찰이 일어나는 또다른 분야로는 뇌과학 분야가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자유의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대한 찬반에 따라 진영이 나눠진다. 당연히 신경과학이나 정신의학 쪽은 자유의지는 없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음과 같은 기사에 드러나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일부에서는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로 격하시키는 이야기라며, 우생학이나 홀로코스트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는 식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착각이다. 단순한 유기체이니 함부로 다뤄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뇌과학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류가 새로운 지식들을 밝혀낼 때마다 흔하게 일어나던 가치관의 혼란일 뿐이다. 물론 이로 인해 벌어질 미래의 일들에 대한 우려도 있겠지만 말이다.[20]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걸 가지고 과학에 무작정 태클을 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과학자들도 물론 고려해야 하지만, 오히려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다’는 가치중립적 사실에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인문,사회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노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인문학적 개념에서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물을 유리잔에 담든지, 플라스틱 컵에 담든지, 그것이 ‘용기에 담긴 물’이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자유의지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노엄 촘스키 말처럼, 우리가 뇌과학을 평생에 걸쳐서 공부하는 것보다 잘 쓰여진 소설 한 편을 읽는 것이 우리의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시적이고, 수단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환원적 사고의 오류라는 것.

 

8. 관련항목


  1. [1] 이때 상당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었다.
  2. [2] 뉴욕타임스, 디 차이트, 르 몽드
  3. [3] 사이언스(Science)와 네이쳐(Nature)
  4. [4] 홍성욱 교수는 사회구성주의 진영에 가까운 학자이다. 중립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기성 과학 진영 학자의 의견을 첨부할것.
  5. [5] Steven Weinberg;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일로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태초의 삼분간의 저자
  6. [6] 물론 과학은 엄밀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고압적인 태도는 결국 과학자들도 광신도들와 다를 바 없게 행동한다는 오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비존중적인 태도는 인문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태도 중 하나이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처세술의 문제인 것.
  7. [7] 원자폭탄이나 어린 앨버트 실험# 등이 대표적인 사례. 일부 옹호론자들은 이건 과학자들을 협박하고 과학을 오용한 문과출신 관료들의 문제라고 선을 긋지만, 과학자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면 그런 오용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점에서 보면 당연히 책임이 0%라고 할 수 없다.
  8. [8] Harry Collins 외 1인,’골렘:과학의 뒷골목’,이충형 역,새물결,2005
  9. [9] 홍성욱 외 7명,’과학철학: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창비,2011에서 재인용
  10. [10] 그리고 상당부분 사실이지만
  11. [11] E Selinger 외 1인 편집,’The philosophy of experience’,Columbia university press,2006
  12. [12] Harding, S.(1986),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Ithaca: Cornell Univ. Press
  13. [13] 실제로 존재한다.
  14. [14] 미적 가치에 한정한다면 예술가도 이에 해당한다.
  15. [15] 물론 과학계라고 해서 이상중심적 사상만 관철하려는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은 아니다.
  16. [16]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사실을 밝히는 것에 대해 주변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피력한다.
  17. [17] 물론 리처드 도킨슨이 말한 것은 지성의 산물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의해 발표하기가 어려울때 용기를 내어 밝히라는말이지 비윤리, 비도덕적 결과를 초래할 자료를 발표하라는 것이 아니다.
  18. [18] 사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허구한 날 다양성이니 다원주의니 죽어라 부르짖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단일 사상, 이론, 질서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치고 좋게 끝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 [19] 물론 대안 하나 만들어서 ‘이거닷’ 하고 미는 경우엔 또 그 대안이 권위적인 질서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20. [20] 역시 이전 글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관이 종래에는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일반적인 인식에 기대고 있다가 그런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 그 기대고 있던 가치관까지 흔들린 셈인 것이다.”라고 써놨지만,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과 과학적 환원론으로 인해 인간이 더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 우려하는 인식은 상당히 다른 문제이다. 과학자들 중에 후자를 전자로 자꾸 물타기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글에도 썼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타인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꼴에 불과하게 된다.

 

 

 

 

아래는 2020년 10월 13일 기사입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 철학의 “우드스탁”

일러두기

    에세이 집필에는 다음 번역서를 활용했다.
: 파이어아벤트, 파울. 『방법에 반대한다』, 정병훈 옮김, 그린비, 2019. 약자를 사용해 AM(Against Method)으로 지시하기로 한다.
    이 에세이는 저자 사정으로 전체 3~4회로 나누어 개제될 것이다.

 

이제 이 연재는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한 네 명의 과학철학자 가운데 마지막 순서에 오는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1924~1994)에게 도착했다. 많은 문헌은 파이어아벤트가 나머지 세 명과 이질적인 인물이라는 데 주목한다. 과학적 탐구에 적합한 고유의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파이어아벤트, 그리고 그러한 방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나머지 셋 사이에 있는 이질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파이어아벤트가 나머지 셋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에 대해 무언가 이상한, 좀 더 강하게 말해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듯 하다. 내가 택하지 않을 또 다른 대조도 가능하다. 포퍼와 쿤을 대조하고, 파이어아벤트를 쿤 이후의 한 변종적 견해로 다루는 것이 바로 그 대조 방법이다. 이런 대조는, 포퍼와는 달리 과학사의 다양한 장면을 단지 ‘발견의 맥락’으로 치부하여 과학의 논리를 반성하는 데서 배제하지 않은 쿤과 그 이후의 성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 속에서, 파이어아벤트의 독창성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듯 하다.

나는 포퍼와 파이어아벤트를 양 극단으로 놓고 서술하는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슬로건, 또는 결정적인 기여를 조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는 과학을 통해 인간의 해방과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으로 만들기 위해 과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두 사람을 서로 반대로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자란 비판적 개인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과학을 구성하는 방법과 제도는 이러한 이상을 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발전해 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학 속에 담긴 비판적 개인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만 한다면, 물론 인간의 해방과 발전 역시 달성될 것이다. 쿤과의 소통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파이어아벤트는 이러한 주장을 과학에 대한 일종의 왜곡이라고 말한다. 그는 학계와 과학 훈련의 경직성에 대해 쿤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적어도 학계의 경직된 분위기 내에서는 비판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과학은 심하게 말해 다른 종류의 억압적 제도에 비견할 만한 압력을 구성원들에게 가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공격적 발언이 가득 담긴 『방법에 반대한다』는, 과학 속에서 포퍼가 기대했던 이상을 정말로 실현하려면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단 하나의 방법론적 원리 이외에는 믿지 말라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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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이어아벤트. 두발의 상태로 보아 『방법에 반대한다』를 집필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보인다. 다음 인터넷 출처에서 얻었다.

 

“철학의 우드스탁”, 그리고 과학과 자유

“『방법에 반대한다』는 …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고], …. 철학의 우드스탁”1) 이라는 해킹의 진술보다 파이어아벤트의 지적 생애와 이 책이 과학철학에 준 충격을 잘 설명하는 진술은 없을 것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 1969)에서 히피들의 반문화(counterculture)는 마침내 지상에 실현되었다.2)  2차 세계대전에서 전체주의를 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자유의 사도로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게 다가섰던 미국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권위는 베트남에서의 불명예, 다시 말해 빈약한 무장만을 갖춘 제3세계 인민이 첨단의 작전 능력을 가진 미군에 맞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과 함께 실추되었다. 국가 뿐 아니라, 종교,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과 같은 전통적 제도 일체가 청년들에게는 지극히 보수적인 것으로서 의심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우드스탁의 경험은 이들 제도를 대신하려는 반문화의 시도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철학의 우드스탁”이라는 말은, AM이 동일한 희망, 또는 방향성을 과학에 대해 사유하던 많은 학자들에게 던졌다는 뜻이다. 달에 도달한 과학(1969)은 절정에 도달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문명적 병폐들의 원인으로 지목받았다. 이러한 병폐의 초점에는 국가가 있었다. 전쟁, 그리고 냉전을 거치면서, 문명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을 격멸하고 억제해야 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은 유래없는 규모로 관료화되고 국가의 체계 하에서 제어받는 상황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의 제도적 배경이 된 국가의 도덕적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과학이라고 해서 상황이 특별히 나았을 리는 없다. 결국 해킹은, 과학에 대항하는 반문화라는 방향성이 AM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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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한 장면. 다음 인터넷 출처의 6번 사진임을 밝힌다.

사실 이러한 논지는, 이미 쿤의 논의에서부터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쿤은 과학자로서의 생애 초기, 즉 학부나 석사 과정에서 겪는 훈련은 과학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억제하고, 현재의 퍼즐 조각들이 어떻게 잘 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학계에서 잘 풀리지 않은 퍼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과학자들은 적어도 교육을 받는 입장에서는 자유를 (부분적으로는) 억제당하는 경험을 한다는 진술과 동일한 것이다. 파이어아벤트가 개최한 “철학의 우드스탁”에서 울려퍼지는 공연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억제가 명백한 사실인 이상 현재의 제도적 과학이 그 자체로 자유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포퍼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첫 공연: 존 스튜어트 밀, 혁명이 도그마가 될 때

 

1악장: 도그마의 탄생에 대한 밀의 모형

 

스승이기도 한 포퍼를 폄하하면서, 파이어아벤트가 자신의 우드스탁에 초청한 첫 스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ruart Mill, 1806~1873)이다. 밀은 이 무대에서 하나의 혁명적 아이디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진부하고 보수적이며 제대로 점검되지도 않은 도그마로 바뀌어 가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우리에게 들려준다.3)

1)    어떤 주제 A에 대해 새로운 주장 T가 제안된다.

2)    T가 처음 발표되어 이에 익숙하지 않은 적대적인 청중에게 직접 노출된다.

2-1) 생경하다는 이유에서 대부분의 청중은 T를 무시한다.
2-2) 새로운 세대, 기존 주장 S에서 실패를 맛보았던 많은 학자들과 같이, T를 받아들일 동기를 가진 일부 청중은 T를 자신의 연구 주제로 택한다.

3)    T를 연구한 학자들이 중요한 성공을 보고한다.

4)    3)을 바탕으로 T가 해당 주제를 다루는 주제 A를 다루는 A’의 논의 대상으로 널리 퍼지고, 이윽고 A’계를 넘어 대중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다.

5)    T를 연구한 성과가 교과서, 대중서, 자격시험과 같은 대중적 매체에도 실리고, A를 다룰 때 있어 T는 결정적인 주장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6)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T는 A’의 상식으로 바뀐다. 즉, A를 다룰 때 있어 의심할 필요가 없는 주장으로서 간주되기에 이른다.4)

밀의 공연은 자못 인상적이다. 한때는 혁신적이었던 T는, 그것의 성공과 대중적 전파를 계기로 A 영역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이해를 지배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혁신을 실제로 감행하고 성공을 본 세대는 기존의 상식에 도전하는 비판적 개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가 지속되는 과정은 교육에 의해 재생산되고, 이 교육은 비판적 개인을 길러낸다는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져 간다. 밀의 서술을 빌어 본다. “…교육은 새로운 교리를 그것을 가져온 심적 과정 없이 이해시킨다. 그리고 점차 그것이 자리를 대치한 교리에 의해 오랫동안 행사되었던 것과 같이 매우 똑같은 억압적인 힘을 획득한다.” 쿤 이후, 많은 과학철학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비판을 밀은 (아이디어를 얻은 영역은 조금 다르지만) 이미 19세기에 하고 있었다는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지적이다.

이 인상적인 모델은 과학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원한 비판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가설과 주장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논문 출판, 특허와 같은 제도를 통해 이러한 영향력은 수량화되고, 과학자들은 이들 제도가 유도하는 방식을 반영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려 할 것이다. 교과서, 대중서 집필처럼, 학부 교육과 같이 해당 학계로 초심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교통로를 장악하는 방법 또한 중요하다. 선호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일정 범위의 청중에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설득하고 싶지 않은 과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의 확대 과정이 어떤 임계점을 넘게 되면, 이 가설은 의심을 받지 않는 교조적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이 밀의 모델이다.

밀의 모델은, 자못 섬뜩한 역사 철학을 담고 있다. 지금 볼 때 얼마나 혁신적이고 해방적인 주장인지와는 무관하게, 밀의 모델을 따라 상황이 진행된다면, 결국 모든 과학적 주장과 그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은 잠재적으로 억압자의 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득을 위한 개별 학자나 학파의 순수한 노력은, 어느 시점이 넘으면 억압으로 변신할 지 모른다.

아마도 이런 우려에 대한 전형적인 답은, 어떤 설명은 진리, 또는 거의 진리라고 강조하는 데 있을 것이다. 설사 T가 억압으로 변화했다 하더라도, 그 억압이 실재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가령 상대성 원리를 부정하고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하늘로 물체를 쏘아 올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노력이며, 진리와 그것이 기반한 실재를 부정하는 노력일 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입장일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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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존 스튜어트 밀. “철학의 우드스탁”에서 밀이 가장 중요한 학자로 인용되는 것은 마치 락 페스티벌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클래식 공연이 들어간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음악적 맥락에 따라 클래식 역시 전위적인 충격을 줄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파이어아벤트가 자유와 인간 개발의 철학자로서 (포퍼가 아니라) 밀을 인용한 것 역시 같은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AM 4장의 주석 2를 참조하라.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2악장: “무엇이라도 좋다”, 그리고 인식론적 아나키즘의 악명에 대해

 

이런 답변에, 파이어아벤트는 철학자다운 한 가지 반론을 준비해 두었다. “어떠한 관념도 그것의 모든 분지까지 검토되지는 않으며, 어떠한 관점도 그것이 가져야 할 모든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론들은 그 진가를 나타낼 기회를 얻기 훨씬 전에 포기되고, 보다 시류에 적합한 설명에 의해 대치된다(AM 96쪽).” 이는 어떤 주제에서든 지금 학계에서 널리 퍼진 것과는 다른, 다양한 대안적 설명이 존재할 수 있고, 이들 설명은 너무 이르게 포기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일정한 지적 곡예를 거치고 나면, 지상에서 쏘아올린 물체의 운동을 중력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다른 발전이, 가령 수학에서의 혁신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을 왜 차단하려 하는가? 바로 이 맥락에서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의 유명한 슬로건을 꺼낸다.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6)

이러한 인식론적 아나키즘은 파이어아벤트의 한 가지 과격한 주장으로 연결된다. 현재 학계가 채택한 최선의 설명이 아닌 다른 설명이 논리적으로 여전히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설명이 발전할 수 있는 틈새가 과학계에 필요하다는 주장으로부터, “사이비 과학”으로 부를만한 여러 시도 역시 동등한 비중으로 매체와 교육 제도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결론을 파이어아벤트는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철학의 우드스탁”이 이런 귀결로, 다시 말해(파이어아벤트의 예를 들어) 부두교나 중의학의 교설을, 또는 반 백신론자나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현재 관련 학계가 최선의 가설이라고 생각하는 가설과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귀결로 향하는 데 대한 우려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답하는 소극적 방법은 이것이다. AM은, 모든 기성 권위를 의심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저술이다. 따라서 이 사회적 여건이 충분히 변화했다면(즉, 기성 권위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것이 그것을 의심하는 것 보다 오히려 나을 경우) AM의 결론을 꼭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적극적인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7) 물론, 이를 위해서는 파이어아벤트의 주장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다.

모든 진술은 그 한계까지 시험되지 않는다는 말에서 다시 출발해 보자. 그 가운데 어떤 진술은, 밀의 모델에서처럼 언젠가 학계가 의심을 거두는 진술로 선택되게 된다. 이렇게 의심을 거두는 귀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결단이 설명한다. 다시 말해, <T에 대한 의심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 판단에 따라 T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증거 뿐만 아니라 결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정밀한 측정을 수행하더라도 이러한 결단의 작용은 사라지지 않는다.8) 어떤 과학적 주장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결과 배후에는 이러한 결단이 자리한다는 점, 그리고 이 결단은 상황이 바뀌었다면 다른 주장에 대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점. 이것이 ‘사이비 과학’에 관용을 요구하는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을 최소한으로 축소하여 받아들일 때 남는 부분이다.

파이어아벤트의 아나키즘을 이렇게 해석하면, “사이비 과학”에 대한 그의 주장을 완화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가령 전 인구는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보건당국의 명령을, 그리고 모든 경제 주체는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한다는 국제 기구의 권고를 의심하는 주장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주장은, 백신 접종 프로그램은, 그리고 온실가스 감축 프로그램은 백신의 효과나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효과에 대한 증거 뿐만 아니라, 이 증거라면 정부의 강제력을 활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결단에 의해서도 지지된다는 점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단은 사전 예방의 원칙,9) 다시 말해 현재의 관점으로는 그 피해 범위를 통제할 수도 없고 어디까지 피해가 번질지 불분명하여 잠재된 피해의 범위를 추측하기 어려운 위험을 예방하려 할 때 위해 참조할 가치가 있는 원칙과 같이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판단에 활용할 수 있는 원칙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미래에 일어날 피해의 규모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리고 이를 방지해야 한다는 결단이 오히려 정부의 강제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이유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백신이나 기후 대책에 대한 회의론은 단지 증거의 불확실성만을 파고들어서는 승리할 수 없으며 당국이 정책적 결단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고 도전해야 승리할 수 있는 주장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과학의 방법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려 한 동시대의 과학 철학자들이 실패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정신인 만큼, “사이비 과학”조차 논쟁의 장에서, 논의의 자유 시장에서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그의 공격적 주장을 오늘의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10)

 

주석

1) AM 7쪽. 이언 해킹(Ian Hacking)이 AM 제4판에 붙인 서문의 문장이다.

2) 1960~70년대 당시 세계를 풍미한 반문화에 대한 내 지식은 다음 저술에 크게 의존한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이재원ᆞ이종태 옮김, 이후, 1999.

3)  밀의 『자유론(On Liberty)』 (19세기 저술이므로 시중에 다수의 번역본이 있다) 2장에서 전개되는 논증을 압축한 것이다. 특히 2절, “억압받는 의견이 오류일 경우”에서 같은 논지의 논의가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주 흥미롭게도 밀은 가톨릭이 신자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는 점을, 즉 교황청은 성서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독점하고 평신도의 경우 사제를 따르는 것을 의무로 부과하고 있는 구조를 해당 모델을 소개하는 부분 바로 앞에서 소개하고 있다. 밀은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한쪽으로는 자유가 없는 문화를 통해서 폭넓고 자유로운 지성이 등장하는 것을 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자신의 신앙과 교리를 이성에 입각해서 치밀하게 옹호하고 그 반대자들을 반박할 수 있는 지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박문재 옮김, 『자유론』, 현대지성, 2018, 101쪽)”고 지적한다. 나는 파이어아벤트는 가톨릭에 대한 밀의 언급을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갈릴레이 사례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교황청에 의한 종교재판이기 때문이다. 과격파의 주장 앞에서 천년 넘게 유럽인들의 삶을 돌보던 제도인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갈릴레이의 행동은 새로운 과격파가 보여준 만용에 가까웠다는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지적이다. 세부 논의는 아래에서 계속한다.

4) AM 88~92쪽(3장 후반부)을 재구성한 서술이다.

5) 바로 이 쟁점으로 인해 과학 철학의 핵심 쟁점이 된 주제가 이 에세이 2부의 주제가 될 “과학적 실재론”이다.

6) AM 69쪽. 1장 최후미.

7) 이것은 한국과 세계의 오늘이 소극적 답변에 동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8) 물론 이러한 결단을 내려도 좋은 시점은 당시의 기술적 조건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국제단위계의 수치 오차 범위는 여러 측정 장비들의 기술적 신뢰도에 기반해 결정된 것이다.

9) 유엔 환경계획의 다음 정의를 참고한 진술이다.
“심각하거나 회복불가능한 피해에 대한 위협이 있을 때, 완전한 과학적 확실성의 부족은 환경 파괴를 예방하기 위한 비용효율적 조치를 유예할 이유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UNEP), Rio Declarat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principle 15.

10) 실제 논쟁을 평결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입증 책임’이라는 개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적어도 AM에서는) 이 쟁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서 그의 아나키즘을 훨씬 더 과격한 형태로 다듬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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