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1>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토론하는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5년 12월 스위스 라이덴의 폴 에렌페스트 집. /Wikipedia

 

 

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라운드 1

당대 최고의 물리학술대회인 솔베이회의의 제5차 대회(1927년 브뤼셀)에서 보어는 양자론에 관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물리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물리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코펜하겐 해석의 논리를 끈질기게 설명하고 납득시켰습니다. 보어는 물리학자들을 붙잡고 ‘한 마디만 하자’며 새벽까지 열변을 토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자론의 기초를 다졌던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등 일부 물리학자들은 양자론을 강력하면서도 끈질기게 비판했습니다. 양자론 공격의 선봉장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양자론을 부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자론의 부정’이라기보다 ‘양자론의 불완정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1905년 광양자 가설을 발표해 양자역학의 태동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인슈타인은 그토록 양자역학을 반대했을까요?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의 철학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자역학이 내포하고 있는 비결정론(확률해석)과 비실재성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의 기본 원리와 상충하는 듯 보이는 비국소성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제5차 솔베이회의와 30년 제6차 솔베이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사고실험을 제기해 보어를 곤경에 빠뜨리는 듯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쓴 논문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한가?(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란 논문을 권위 있는 물리학 잡지 ‘Physical Review’ 47호에 게재했습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 팀과 양자론 학자들과의 반세기 동안 논쟁을 야기한 그 유명한 ‘EPR 논증’입니다.

이 논증은 공동발표자인 Einstein과 그의 공동연구자 및 제자인 Boris Podolsky, Nathan Rosen의 이름 첫 글자를 따 EPR 논증이라고 불립니다.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공격한 이 논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양자역학을 확증해주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제부터 세기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놓고 보어와 벌인 50년에 걸친 논쟁을 차례로 알아보겠습니다.

라운드 1 …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을 통한 불확정성 원리 공격

양자역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인슈타인도 확률파동이 미시세계의 실험결과를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자역학의 오류를 찾아내는 대신 양자역학은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말로 궁극적인 이론이 무엇인지는 아인슈타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양자역학보다 더 심오한 이론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양자역학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매우 정교한 논리를 완성시켰습니다. 직접적인 공격 대상은 불확정성 원리였습니다. 1927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5차 솔베이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이중슬릿 사고실험(thought-experiment)을 제시하였습니다. 보어는 이 사고실험을 비롯해 아인슈타인과의 논쟁들을 ‘아인슈타인과 토론’이란 제목으로 정리해 1948년 출간한 논문 모음집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철학자-과학자』에 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공격

아인슈타인은 상보적인 두 물리량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 입자가 이들 물리량을 확정적인 속성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보어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중슬릿 실험의 경우 간섭무늬를 볼 수 있다면 그 상보적인 양인 입자의 경로를 입자의 속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보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 주장을 근본적으로 뒤엎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서로 상보적인 두 양을 관찰하는 실험이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인 방식으로 목표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매우 기발한 사고실험을 고안하였습니다.

 


스프링이 달린 입구 판을 추가한 변형 이중슬릿 사고실험 개요도. 1927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를 풀기 위해 보어가 그렸다.

 

아인슈타인은 보통 이중슬릿 실험 장치를 정교하게 변형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입자들의 경로를 결정할 수 있으면서 간섭무늬도 만드는 장치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입구 슬릿이 고정되지 않도록 고안했습니다. 입구 슬릿 판을 나머지 부분에 나사로 조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설계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단 한 개의 입자가 장치를 통과하도록 제어하면서 개별 입자로 이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입자를 보내기 전에 입구 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만듭니다. 이어서 입자를 보내고, 스크린의 어느 위치에 입자가 도착하는지 기록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입구 판의 슬릿을 통과한 입자가 이중슬릿 판의 다른 두 슬릿을 항상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크린까지 도달한 입자들만 관찰합니다.

관찰 영역에서 입자가 기록되었다면 그 입자는,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두 슬릿 중 하나를 거쳤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자가 처음에 전체 장치의 기판에 평행하게 들어왔다면 그 입자는 입구 판의 슬릿에서 위로 혹은 아래로 굴절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입자의 운동량은 변해야 하며 입구 판은 충격을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입자가 위 슬릿을 통과한다면 입구 판은 아래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첫 번째 입자가 입구 슬릿을 통과하고 스크린에 기록된 후에 입구 판이 위로 움직였는지, 혹은 아래로 움직였는지 관찰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입자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 확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입자가 도달한 스크린 상의 위치를 이미 측정하였습니다. 이어서 입구 판을 다시 처음대로 흔들리지 않게 놓고 다른 입자로 실험을 반복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차 많은 입자들이 스크린에 도달할 것이고,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스크린에는 점차 간섭무늬가 형성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각각의 입자가 어느 경로를 거쳤는지 말해주는 목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입자의 경로를 파악하면 간섭무늬가 생기지 않고, 입자의 경로를 모르면 간섭무늬가 생긴다’는 불확정성 원리가 오류임을 간단명료하게 논증했다고 자신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논증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적합해 보입니다. 만일 이 논증이 옳다면 양자역학의 토대인 불확정성 원리는 오류임이 판명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양자역학과 코펜하겐해석은 폐기되어야 할 운명에 처해진 것입니다.

보어의 방어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논증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 장치에서 스프링이 달린 입구 판을 정확히 멈추어 있도록 만들 수 있다고 전제한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역학, 구체적으로 불확정성 원리가 불허하는 두 가지 상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아인슈타인은 입구 판이 멈추어 있으면서, 즉 속도가 0이면서 동시에 정확히 고정된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이는 위치 불확정성과 운동량 불확정성이 동시에 0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주장하듯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범한, 또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매우 흔히 범하는 오류는 양자역학의 법칙들이 입구 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사고실험의 목표는 입구 판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입자가 위로, 혹은 아래로 굴절되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구 판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완전히 정지’ 상태에 있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입구 판의 흔들림으로부터 입자의 굴절된 방향의 추론은 타당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상보성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실험자가 입구 판의 위치를 잘 확정하면 그 판의 운동량 불확정성은 커집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간섭무늬를 얻지만 개별 입자가 어느 경로를 택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입구 판의 운동량 불확정성을 충분히 작게 설정하여 모든 개별 입자들의 경로를 파악할 수 있게 하면 입구 판의 위치 불확정성이 커집니다. 판의 위치 불확정성이 커졌다는 것은 개별 입자가 장치에 들어오는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을 공격한 이 사고실험에서 상보성 원리가 정확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입자가 택하는 경로를 우리가 정확히 알면 간섭무늬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우리가 선명한 간섭무늬를 얻으면, 입자의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논증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이 논쟁에서 확실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확신하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차전 패배가 확실해진 그 순간부터 2차 전투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논증을 더욱 개량하여 더 복잡하고 정교한 사고실험 고안에 착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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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2>‘상자 안의 시계’ 사고실험

 

제6차 솔베이회의가 열린 1930년 브뤼셀을 걷고 있는 아인슈타인과 보어. 아인슈타인은 승리를 확신한 듯 여유로운데 비해 보어는 초조한 모습이다. 아인슈타인의 절친인 폴 에렌페스트가 찍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세기의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라운드 2

1930년 제6차 솔베이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반박하는 두 번째 사고실험을 제시했습니다. 공격 대상은 이번에도 불확정성 원리였습니다. 물론 궁극정인 목적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의 공격

아인슈타인은 이번에도 천재성이 번뜩이는 사고실험을 내놓았습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상자를 상상합니다. 상자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는데, 셔트를 통해 그 구멍을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셔트를 열고 닫는 시간 간격은 상자 안의 시계에 의해 제어됩니다. 상자는 극히 민감한 용수철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scale)의 눈금을 통해 질량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자에 빛을 가득 채우고 상자의 무게를 잰다. 광자 한 개가 상자에서 빠져나올 만큼의 짧은 시간 T 동안 셔트를 연 다음 닫는다. 그 다음 다시 상자의 무게를 잰다. 광자 한 개는 특정한 에너지(E = ℎν, 플랑크 상수 ℎ와 진동수 ν의 곱)를 갖는다. 그리고 E = mc² 공식에 따라 광자 한 개의 유효 질량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광자 한 개가 상자를 빠져나가면 상자의 무게는 그만큼 가벼워진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상자의 무게를 정확하게 잴 수 있다. 그러므로 광자의 질량, 즉 에너지 불확정성 ΔE는 0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생긴 데 걸린 시간의 불확정성 Δt는 T로 유한한 값이다. 그러므로 시간 불확정성과 에너지 불확정성의 곱(ΔE × Δt)은 0이다. 이 같은 결과는 상보적인 물리량인 에너지 변화와 시간 변화의 곱이 플랑크 상수값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는 문제가 있다.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의 수식 ΔxΔp≥ℏ/2π는 수학적 조작을 조금 하면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의 수식 ΔEΔt≥ℏ/2π로 변환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같은 논증을 통해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보어의 공동연구자인 레온 로젠펠트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보어에게 큰 엄청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처음엔 반박논리를 찾을 수 없어 무척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내내 보어는 극도로 불안해보였습니다. 보어는 물리학자들을 이리 저리 찾아다니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요. 만약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물리학은 끝장이에요.”라며 설득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박논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날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정말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조용하면서도 위풍당당하고, 약간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머금은 반면 보어는 매우 흥분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아인슈타인 곁을 종종걸음 치며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상황은 극적으로 역전되었습니다. 승자는 보어였습니다.”

보어의 방어

보어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해답 찾기에 골몰했습니다. 마침내 새벽 녘 영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 단초는 다름 아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었습니다. 보어는 상자의 무게를 측정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광자가 방출되는 시간과 광자 방출 전후의 상자 무게를 정확하게 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보어는 바로 그 대목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자 안의 시계’ 사고실험을 그림으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1930년 제6차 솔베이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이 보어에게 제기한  ‘상자 안 시계’ 사고실험을 분석해 보어가 그린 그림(왼쪽). 오른쪽은 이를 한층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그린 도해.

 

우리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상자의 무게를 지시하는 계기판 바늘의 위치 불확정성 Δy와 이의 상보적인 물리량인 상자의 운동량 불확정성 Δp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Δp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상자의 질량을 측정해야 하는데 그 정확도의 한계, 즉 불확정성 Δm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Δm×g×T>Δp의 관계가 성립합니다(g는 중력상수).

이쯤에서 보어의 결정타가 나옵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은 시간의 흐름 속도를 변화시킵니다. 상자 안의 광자가 방출되고 나면 상자의 무게가 줄게 됩니다. 상자가 중력장 내에 있고 상자의 용수철이 움직이므로(눈금이 변화하므로) 상자 안의 시계바늘 속도도 변합니다다. Δy가 시간 간격 불확정성 ΔT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상자의 운동량 불확정성 Δp는 에너지 불확정성 Δ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Δm×g×T>Δp에서 ΔE×ΔT>ℏ라는 수식을 유도해낼 수 있습니다. 즉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논증은 오류입니다.

이상과 같은 보어의 논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일정 시간 간격 동안 상자의 에너지 변화를 정확하게 잴 수 있다고 했으나, 보어는 광자가 방출되면(에너지 변화) 중력장의 변화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시간 간격마저 변화하므로 여전히 에너지와 시간이라는 상보적인 물리량 사이에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고 논증한 것입니다. 상자의 무게를 정확하게 재려면, 즉 계기판의 눈금 Δy의 불확정성을 작게 하려면 광자 한 개가 방출되는 시간 간격 T가 길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논증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공격을 막아냈고, 아인슈타인은 패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론이 완전하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로 더욱 정교한 논증을 개발할 결심을 했을 따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로부터 5년 뒤에 1935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에서 그의 동료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양자론을 공격하는 강력한 논증(EPR)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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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3> EPR 논증 ➀관전을 위한 배경 지식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의 주인공인 오토 슈테른(오른쪽)과 발터 게를라흐. / 위키피디아

 

EPR 논쟁,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상보적인 두 가지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체의 진정한 속성은 여전히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정착한 지 3년째인 1935년 그의 연구 동료와 함께 이 같은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의구심을 파고들며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강력한 논증, 즉 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한가(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물리학 논문지인 『Physical Review』(4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보어는 이에 대한 반박을 그해 『Physical Review』 48호에 같은 제목으로 실었습니다. 이후 아인슈타인 일행과 보어를 비롯한 양자역학 옹호자들은 양자역학의 완전성 여부를 놓고 50년 동안 세기의 논쟁을 벌였습니다.

물리학 천재들이 첨단이론, 그것도 매우 철학적인 이론의 타당성 여부를 놓고 다투는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에 대해 일반인들이 그 내용과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2차례 논쟁에서 패배한 이후 내놓은 EPR 논증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 그 정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흥미진진한 세기의 논쟁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기초지식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전자 상자 사고실험 – 비국소성, 비실재성

우리는 앞에서 전자 하나가 들어있는 상자를 절반씩 A, B로 나누면 전자파동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상자 안의 전자’ 사고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사고실험을 상기해 봅니다. 전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자가 입자이므로 나누어진 어느 한 쪽에 있을 거라는 예측은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상자 A, B를 열어보는 순간 결정됩니다. 그러나 열어보기 전에는 어떤 상태일까요? 한 상자 안의 전자파동이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이 전자가 반으로 쪼개졌다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어느 쪽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상자 A의 전자파동은 전자가 B에서 발견될 상태와 A에서 발견될 파동이 겹쳐져 있는 상태이며, B의 전자파동도 마찬가지로 A, B에서 발견될 상태가 겹쳐져 있습니다.

자, 이제 상자 A를 지구에 두고 B를 빛이 200만년 동안 날아가야 도달하는 우리은하계 너머 안드로메다은하에 놓아두었습니다. 만약 지구의 상자를 열어 전자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B의 상태는 전자가 없는 것으로 ‘즉각’ 결정됩니다.

지구에 있는 상자 A의 상태가 200만 광년 떨어진 상자 B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결정한다니!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 것입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이동이나 신호의 전달은 빛의 속도(초속 30만km)보다 더 빠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양자론에서는 상자 A의 전자 상태가 동시에 B의 전자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실험결과도 이를 확인해줍니다.

이것은 국소성(locality)의 원리를 위배한 비국소성(nonlocality)의 예입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비국소성은 코펜하겐 해석의 ‘파동함수 붕괴’라는 가설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즉, 양자계는 파동함수로 기술되고, 이것은 가능한 여러 상태가 아무리 공간적으로 넓게 퍼져 존재한다 하더라도 측정의 순간 곧바로 한 곳으로 수렴된다고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실험은 또 양자역학의 비실재론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상자를 열기 전에 어느 곳에 전자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자를 영원히 열지 않는다면 전자가 있는 장소는 영원히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의 가정이 옳다면 달은 우리들이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고, 우리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그곳에 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 틀린 이야기이고, 우리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변함없이 같은 장소에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에 대해 보어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님과 내가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달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누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달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지금 양자역학의 비실재론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관측과 관계없이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자도 어느 상자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확실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실재론을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보어는 관측을 하기 전에 물리적 실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전자는 물론 달조차도 관측했을 때 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핀보존 사고실험 – 비국소성

이제 EPR 논증에 한발 더 다가서는 사고실험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스핀(spin, 회전)량의 합(가령 0)이 보존되는 한 쌍의 입자를 생각합니다. 이제 이 두 입자를 앞의 전자상자 사고실험에서처럼 하나는 지구에, 다른 하나는 안드로메다은하에 가져다 둔 다음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 상태를 통해 저쪽 입자의 스핀 상태를 확인합니다.

이 사고실험을 분석하기에 앞서 스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스핀이란 전자와 같은 미시세계 입자들이 갖는 에너지, 운동량 등과 같은 물리량 중의 하나입니다. 스핀은 임의의 회전축에 대해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시세계의 ‘회전’과는 다른 독특한 성질이 있습니다. 즉, 회전 속도는 변하지 않지만 회전축의 방향은 외부의 영향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고등과학연구원에 있는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기념 동판. 이 실험은 자기모멘트 및 스핀이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측 행위가 스핀성분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스핀은 기묘한 양자론의 세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스핀의 성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명한 물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원자의 자기 모멘트와 스핀이 양자화되어 있으며, 특정 회전축의 스핀에 대한 측정 행위가 다른 회전축의 스핀 정보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Stern–Gerlach experiment)’입니다. 이것은 독일의 물리학자 슈테른(Otto Stern)과 게를라흐(Walter Gerlach)가 수행했으며, 양자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실험 중의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은(silver) 원자에 자기장을 걸어주면 마치 체로 큰 굵기의 모래를 걸러내듯 서로 다른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분류해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장치를 사용하여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와 ‘아래’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분류해 냅니다.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모아 위-아래 방향 스핀 분류기에 넣으면 모두 위 방향으로 빠져나옵니다.

이제 이들 위 방향 스핀 은 원자를 오른쪽-왼쪽 방향 스핀 분류 장치를 통과하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중 일부는 왼쪽으로 또 일부는 오른쪽으로 나올 것입니다. 다시 이 장치에서 왼쪽으로 나온 왼쪽 스핀 은 원자들을 다시 위-아래 스핀 분류 장치를 통과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미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골랐으므로 ‘위’ 방향으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은 원자들은 위 방향과 아래 방향으로 정확히 절반씩 갈려나옵니다!

앞서 왼쪽 스핀 원자들 중 ‘위’ 방향으로 나온 은 원자를 또다시 왼쪽-오른쪽 스핀 측정기에 넣어 분류하면 이들은 과거에 자신의 정체성(왼쪽 방향 스핀)을 잊어버리고 처음처럼 왼쪽과 오른쪽 방향으로 정확하게 절반씩 갈라져 나옵니다.

위의 실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시세계의 속성과 확연하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 가지 크기의 조약돌을 일정한 크기의 그물코를 가진 체로 걸러내는 일을 생각해봅니다. 크기가 다양한 조약돌 20개를 체로 걸렀더니 10개는 남고, 10개는 빠져나갔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물코가 손상되지 않는 한 이 같은 작업을 반복해도 결과는 처음과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제 체를 통과한 조약돌 10개를 모아 각각의 질량을 재서 평균보다 무거운 것과 그 이하인 것의 두 부류로 나눕니다. 이제 평균보다 무거운 조약돌을 다시 아까와 같은 크기의 그물코를 가진 체로 거릅니다. 이들 모두가 그물코보다 작은 조약돌이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모두 체를 통과할 것입니다. 조약돌의 크기는 질량을 잰 후 변하지 않고, 반대로 조약돌의 질량 또한 크기를 잰 후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는 각 조약돌이 고유한 ‘크기’와 ‘질량’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의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우리는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물리량인 스핀은 이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은 원자의 스핀은 왜 고전역학적인 속성처럼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고 수시로 변할까요? 은 원자의 위-아래 스핀을 잰 후 다시 왼쪽-오른쪽 스핀을 재면 ‘측정의 영향’에 의해 앞의 스핀 속성이 변한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조약돌은 크기를 잰 후 질량을 재었다고 해도 크기가 변하지 않는 거시세계와는 다른 상황입니다.

이것은 양자역학적인 현상에 대한 정석적인 해석입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은 원자의 위-아래 방향 스핀과 왼쪽-오른쪽 방향의 스핀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데, 한 속성에 대한 측정이 다른 속성을 가질 확률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그 영향의 물리적 메커니즘에 대해서 양자역학은 아직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스핀보존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봅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이 +1이라면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입자의 스핀은 얼마일까요? 이건 쉬운 문제입니다. 스핀 총합이 0으로 보존된다고 했으므로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의 스핀은 -1입니다. 이 사고실험에서도 앞의 전자상자와 같이 비국소성이 문제가 됩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을 확인한 행위가 어떻게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입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일까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양자론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입자의 스핀이 -1인 것은 지구에 있는 입자의 관측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스핀 값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 입자를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져갈 때 스핀이 -1인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양자역학적 현상의 기묘함이 단지 우리의 ‘무지’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순진한 반론입니다. 이 반론을 잠재울 실험적 증거가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은 원자의 스핀 분류 실험을 스핀보존 사고실험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스핀 총합이 0이 되도록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한 쌍의 입자를 하나는 지구에 또 다른 하나는 안드로메다은하에 두었습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위-아래 스핀 성분을 측정해 보았더니 위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의 스핀은 아래쪽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 왼쪽-오른쪽 성분을 측정해 보았더니 왼쪽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는 오른쪽 스핀일 것입니다. 따라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는 위-아래 스핀 성분은 아래쪽, 왼쪽-오른쪽 스핀 성분은 오른쪽을 갖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를 확인해보면 짐작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를 가져와 다시 한 번 앞에서와 같이 스핀 측정을 반복해봅니다. ‘원래의 스핀’이라는 논리대로라면 안드로메다은하에서 가져온 입자는 아래쪽 스핀 성분과 오른쪽 스핀 성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웬걸, 위-아래쪽 스핀 성분을 재어보니 위쪽 스핀과 아래쪽 스핀 값이 정확하게 반반의 확률로 나오는 게 아닌가! 물론 왼쪽-오른쪽 스핀 성분을 측정해도 왼쪽과 오른쪽 스핀이 반반의 확률로 나타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이미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 말해주듯이 앞선 두 번째 측정 행위가 첫 번째 측정결과를 완전히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입자가 고유한 스핀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의 물리적 속성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불확정성의 원리의 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앞의 스핀보존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봅니다. 아인슈타인 등 양자역학 반대론자들은 ‘어떻게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가 순간적으로 지구 입자에 대한 관측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라며 양자론에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원래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져간 입자의 스핀은 -1이었는데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위의 예를 통해 옳은 해석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지구의 입자에 대한 스핀 측정 행위가 순간적으로 먼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를 단순히 가설이나 이론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우리 우주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공격하기 위해 고안한 야심작인 EPR 논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당시 물리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논쟁과 관련해 50년간 2만 건의 논문이 쏟아졌습니다. 가히 ‘세기의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1935년 불붙어 철학적 논쟁으로 비화되었다가 1960년 존 벨이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벨의 부등식’을 고안해 내면서 물리적인 논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논증에서 주장한 것은 “자연은 명확한 속성을 갖고 있는데 양자역학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982년 프랑스의 실험물리 학자 알랭 아스페에 의해 이 논쟁은 실험적으로 확인되어 세계 물리학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패했고, 이 우주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신념과는 달리 ‘명확한 속성을 갖지 않은 불확정적이고 요상한’ 모습을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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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3> EPR 논증 ②EPR 논문 요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논증하려고 시도한 EPR 논문의 저자들. 왼쪽부터 아인슈타인, 보리스 포돌스키, 나단 로젠. 이 논문은 존 휠러의 평가를 빌면, “지식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PR 논문 요지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Albert Einstein, Boris Podolsky, Nathan Rosen: EPR)은 양자역학의 이론적 예견치가 실험결과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역학 자체는 미시세계를 서술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양자역학이 틀렸다기보다 불완전하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PR은 모든 입자들이 임의의 순간에 명확한 위치와 속도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는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가 아니라 양자역학 자체의 한계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모든 입자들이 명확한 위치와 속도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는 양자역학은 우주의 일부만을 서술하는 불완전한 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양자역학은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를 기술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이론이며, 기껏해야 ‘완전한 이론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디딤돌’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 EPR의 주장이었습니다.

EPR은 물리학과 철학에서 온전하게 수용돼 온 ‘실재성(reality)’과 ‘국소성(locality)’의 개념이 물리적 실재에 관한 양자역학적 기술과 양립가능하지 않음을 논증하였습니다. 즉 양자역학은 현상을 잘 설명하긴 하지만 실재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EPR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완전성 기준, 실재성 기준, 국소성의 원리 등 세 가지 기준과 원리를 전제로 합니다.

(1)특정 물리이론이 완전하다면, 그 이론은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의 각 요소에 대응하는 부분(counterpart)을 가져야 한다.

(2)특정 물리계(대상)를 어떤 방식으로든 교란시키지 않고 그 계에 속하는 특정 물리량의 값을 확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면, 이 물리량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의 한 요소가 존재한다.

(3)한 물리계에 대한 측정이 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물리계에 속한 물리적 실재의 요소, 혹은 이의 실제 상태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도 가할 수 없다.

EPR은 이들 가정을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란 것을 논증하기 위해 삼단논법으로 진행시켰습니다.

(대전제)만약 물리 이론이 완전하다면, 그리고 만약 위치(x)와 운동량(p)이 물리적 실재라면, 이 이론에는 이들 요소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소전제)양자역학에는 이들 물리적 실재에 대한 기술이 없다.

(결론)그러므로 양자역학은 완전한 이론이 아니다.

다른 하나의 공격 포인트는 앞의 두 논쟁과 마찬가지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였습니다.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이 ‘측정방법에 상관없이 원래 물체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한계’라고 선언하였으나, EPR은 불확정성의 근원을 원리적으로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모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정교한 논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역시 사고실험인데 내용은 원리적으로 간단합니다. 이제부터 EPR이 제기한 사고실험을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 가운데 정지해 있던 한 입자가 두 개의 입자로 붕괴(decay)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운동량 보존법칙에 의해 두 입자는 반드시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며, 그들의 운동량의 절대값은 꼭 같습니다(두 입자는 질량이 정확하게 반분되고, 속도는 크기는 같고 방향이 반대입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 한 입자의 위치를 측정해서 알아내면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다른 입자(이 입자의 짝)의 위치도 자동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한 입자의 상보적인 물리량인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EPR 논증의 요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앞서 두 번의 논쟁(라운드1, 라운드2)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공격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는 우리가 관측하기 전에는 ‘정확한 값’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면 그 측정 행위가 운동량의 변화를 일으켜 정확한 운동량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두 논쟁에서 확인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은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EPR 논증은 한층 더 정교했습니다.

이제 EPR 논증을 따라가 봅니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정지한 입자가 두 아기 입자(S₁, S₂)로 붕괴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S₁의 운동량을 측정하면 우리는 S₂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S₂의 운동량의 정확한 값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EPR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소성을 공리로 삼았습니다. 국소성의 원리(principle of locality)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물체는 절대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EPR 논문에서 국소성은 핵심 전제입니다. 이 공리에 따라 S₁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행위가 입자 S₂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EPR에 따르면 우리는 입자 S₁ 측정을 통해 S₂를 측정하지 않고도 입자 S₂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EPR의 논증에 따르면 우리는 이들 입자의 위치에 대해서도 꼭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S₁을 측정해 S₂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냅니다. 국소성의 원리에 의해 이 관측 행위는 입자 S₂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S₂의 위치 값은 S₁을 측정하기 전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 EPR의 주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EPR의 결론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의 사고실험에 의하면 어떤 측정을 하기 전에 이미 입자 S₂는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입자는 물리적 실재로서 두 가지 물리량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론은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이들 두 가지 값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불완전한 이론이다.’ 이것이 바로 EPR 논문의 결론입니다.

보옴이 각색한 EPR 논증

EPR의 논문은 강력하면서도 원리적으로 간단합니다. 그러나 막상 이 이론을 실험에 적용할 경우 기술적인 난점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쌍입자 S₁, S₂의 운동량 고유함수(운동량을 나타내는 파동함수)가 원리적으로 온 우주에 퍼져 있게 되므로 공리로 내세운 국소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보옴이 EPR 논증을 위치와 운동량 대신에 스핀을 도입해 각색했습니다.

EPR의 논증을 스핀에 적용하면 ‘입자는 임의의 축에 대한 명확한 스핀 값을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로 치환됩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두 가지 이상의 스핀 성분을 동시에 결정할 수 없습니다. 스핀은 각 축에 대해 세 가지 성분(x, y, z 방향 성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약 x 성분의 스핀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나면 y, z성분의 스핀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는 위치와 운동량의 두 가지 상보적인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개념적으로 같습니다.).

불확정성을 스핀에 적용할 경우, 비록 정확하게 결정할 수는 없더라도 ‘임의의 축에 대한 모든 스핀 성분’이라는 속성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아니면 결정할 수 없는 상태 자체가 입자의 궁극적인 실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입자는 ‘어떤 스핀 성분을 가질 확률’로 존재하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스핀을 관측하면 그때 비로소 명확한 하나의 스핀 값을 나타낸다는 것이 양자론의 표준해석입니다. 반면 EPR은 입자는 원래부터 정확한 스핀 값을 속성처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옴이 스핀에 적용한 EPR의 논증을 알아보겠습니다. 보옴은 스핀이 0인 입자가 스핀 -1/2, 1/2인 두 입자 S₁, S₂로 붕괴해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사고실험을 제시했습니다. 스핀각운동량 보존법칙에 따라 각 성분(x, y, z 성분)의 총합은 원래 입자의 상태인 0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입자 S₁의 z방향의 스핀 성분을 측정한 값이 1/2이었다면 S₁과 쌍입자인 S₂의 z방향 스핀은 즉각 -1/2임을 알게 됩니다. S₁의 z방향 스핀값이 -1/2이었다면 S₂의 스핀값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1/2입니다. 왜냐하면 스핀의 합이 0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소성의 원리에 의해 입자 S₁에 대한 측정이 입자 S₂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S₂의 스핀은 S₁을 측정하기 전에 이미 고유한 값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는 게 EPR의 주장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S₂의 x성분 스핀과 y성분 스핀도 S₁을 측정하기 전의 정확한 값을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즉, 입자 S₂는 세 가지 스핀 성분의 정확한 값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세 성분의 스핀 중 어느 한 성분의 스핀을 정확하게 측정하면 나머지 두 성분의 스핀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주장입니다.

보옴의 논리는 앞서 설명한 EPR의 원리와 꼭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옴의 각색본은 기술적인 면에서 EPR보다 훨씬 간편해 물리학자들은 흔히 이를 이용해왔습니다. 특히 EPR 논증을 확인하는 존 벨(John Stewart Bell)의 논문과 50년 후에 나온 알랭 아스페(Alain Aspect)의 실험은 모두 보옴의 각색본을 사용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보옴의 각색본을 확인하고는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물리학사, 나아가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논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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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3> EPR 논증 ③보어의 반박

 

EPR 논쟁이 시작된 1935년의 닐스 보어(50세). 출처: Wikimedia Commons

 

 

보어-아인슈타인 논쟁 ③보어의 반박

EPR 논증은 매우 정교하고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불확정성 원리가 규정한 한계, 곧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혹은 두 가지 스핀 성분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원리를 기묘한 방식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EPR 논증에 대해 보어는 『네이처』에 예비논문을 발표한 뒤 EPR 논증이 실린 물리학 논문지인 『Physical Review』의 48호에 반박논문을 실었습니다. 보어는 EPR 논증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보어는 먼저, EPR(Einstein, podolsky, Rosen)이 논증의 전제로 내세운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란 용어는 양자역학에 적용할 경우 근원적으로 모호함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물리적 실재’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 기준에 의해 시스템의 운동량과 위치에 동시적인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EPR에 의해 정식화된 ‘물리적 실재의 기준(criterion of physical reality)’은 양자현상에 적용했을 때는 본질적인 모호성을 가진다. ‘물리적 실재’와 같은 표현에 분명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범위는 선험적인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으며, 실험과 측정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 위에 세워져야 한다.”

EPR이 ‘물리적 실재를 기술하지 못하는 이론은 완전한 이론이 아니다.’라고 규정한 데 대해 보어는 ‘그렇다면 물리적 실재란 무엇인가.’하고 반박한 셈입니다. 그는 단일슬릿 및 이중슬릿 실험을 예로 들면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둘 모두가 아니라 어느 하나만을 측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보어는 여기서 물리량의 실재성 주장과 관련해 ‘실재성은 물리량에 대한 측정 과정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측정의 과정은 해당 물리량의 정의와 직결된 조건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결국 이러한 조건들은 ‘물리적 실재’라는 용어가 명백히 적용될 그 상황의 본질적 요소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보어는 “우리는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적 현상은 특정 물리량의 값을 알 수 없다는 문제를 넘어 이들 물리량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의 완전성 여부를 논하면서 개념의 적용성이 불투명한 ‘물리적 실재’를 전제로 한 EPR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보어는 또 EPR이 입자 S₁에 대한 측정이 그 쌍입자 S₂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국소성(locality)’의 공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국소성 주장의 충분조건으로 제시된 ‘어떤 물리계를 교란시키지 않고 그 계에 속하는 특정 물리량의 값을 확정적으로 예측한다.’는 주장을 공격했습니다.

보어는 “입자 S₁에 대한 측정 행위가 S₂에 ‘역학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S₁에 대한 측정은 S₁, S₂ 두 입자로 구성된 물리계의 미래 행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공간성의 간격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 사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역학적 상호작용은 없지만, 한 입자에 대한 측정 행위가 ‘다른 입자의 미래 행동에 관한 예측을 규정하는 조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는 의미에서 상호교란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결과 EPR의 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역공을 가한 것입니다.

보어의 이 말은 양자역학적 현상에 있어 국소성을 전제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50년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주는 국소적이지 않았으며, 보어의 주장대로 EPR의 국소성 가정은 잘못되었습니다.

보어의 주장을 요약하면, EPR이 주장하는 전통적 의미의 실재성 개념 자체가 양자역학 상황에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즉 측정과 상관없이 양자계가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물리량의 값이란 아직 정의되어 있지 않거나 경험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며, 물리량들은 그것들이 적절한 실험장치와의 관계 속에서만 일정한 값을 갖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실재성 개념에 대한 이해 자체가 바뀌어야 함을 함축합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EPR의 양자론에 대한 불완전성 주장은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기각됩니다.

이제 논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EPR의 논리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EPR은 양자역학이 ‘물리적 실재’를 기술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물리적 실재의 속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규정한 불확정성 원리가 오류이기 때문이 이를 토대로 한 양자론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EPR 주장의 핵심입니다.

EPR은 쌍입자 사고실험을 통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임의의 축에 대한 각 스핀 성분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이들의 작업은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뒤집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보어는 양자론에서는 ‘물리적 실재’란 개념을 적용할 수 없으며, 국소성의 원리를 공리로 내세운 것도 무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EPR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선, EPR이 사고실험을 통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세 가지 성분의 스핀이 본래 갖고 있는 속성이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약 S₁에 대한 측정이 S₂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난다면, EPR은 입자 S₂가 본래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특히 EPR이 내세운 국소성의 원리에 어긋나므로 EPR의 논증은 기반 자체가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양자론에 의하면 입자의 파동함수는 전 우주에 걸쳐 존재하므로 쌍입자 S₁과 S₂의 파동함수는 서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논쟁의 진위를 가리는 핵심은 쌍입자에서 나타나는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스핀의 각 성분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고유 속성인지, 아니면 상대 입자에 영향을 받아 관측과 함께 나타나는 가변적인 관측 값인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다분히 철학적인 논쟁에 머물 뻔한 EPR 논증을 확인 가능한 물리학적 방법을 제시한 물리학자가 존 벨(John Stewart Bell)이며, 벨의 방법론을 써서 실험적으로 확증한 물리학자가 알랭 아스페(Alain Aspect)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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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3> EPR 논증 ④벨 부등식과 아스페 실험

 

EPR 논증에 대한 수학적, 물리적 검증 방법을 제시한 존 벨(오른쪽)과 이를 실험으로 확인한 알랭 아스페. 출처 : Alchetron.com​​

 

 

벨 부등식과 아스페 실험

EPR 논쟁의 심판관 존 벨, 철학 논쟁에서 물리학 논쟁으로

양자적 실체에 관한 추상적인 EPR 논쟁은 시원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미궁 속에 빠졌는가 싶다가, 아인슈타인 사후인 1964년 존 벨이 획기적인 실험을 제안함으로써 검증 가능한 물리학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물리학자 헨리 스탭은 존 벨의 이 업적을 “과학 역사상 가장 심오한 발견”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은 “이 결과에 대해 황당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가 돌로 가득 차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존 벨의 이론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기에 이토록 야단들인지 이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가 갖는 두 개의 상보적인 물리량(예를 들면 위치와 속도)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벨은 불확정성 원리를 조금 확장하여 ‘동시에 측정이 불가능한 특성이 세 개 이상 존재한다면(즉, 셋 중 하나를 정확하게 측정했을 때 나머지 두 가지 특성들을 결정할 수 없다면) 이들 물리량의 존재 여부를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임의의 축에 대한 두 개의 스핀 성분을 정할 수 없다 해도 입자가 모든 방향의 스핀 성분을 갖는면 그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를 실험으로 확인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 벨의 실험에는 앞서 소개한 EPR-보옴 논증에서 스핀이 보존되도록(두 스핀의 합이 0이 되도록) 연관된 입자 S₁, S₂의 사고실험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S₁의 스핀을 측정했더니 1/2이 나왔다면 S₂의 스핀은 측정하지 않고도 -1/2라는 사실을 합니다. 왜냐하면 두 쌍전자 S₁, S₂는 스핀의 합이 0이 되도록 연관되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구슬이 든 주머니와 파란 구슬이 든 주머니가 있을 경우, 하나의 주머니를 열었더니 붉은 구슬이 나왔다면 다른 주머니의 구슬은 100% 파란 구슬일 것입니다. 이 경우는 EPR이 주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S₁의 스핀 측정과 관계 없이 S₂의 스핀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슈테른-게를라흐 실험과 스핀보존 사고실험에 의하면 연관된 쌍입자의 경우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존 벨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른바 벨의 부등식입니다. 이에 따르면 만약 EPR의 주장대로 입자가 세 가지 스핀 성분을 모두 확정적으로 갖고 있다면 쌍입자 S₁과 S₂의 두 스핀 성분의 합이 보존될 확률, 즉 S₁이 1/2(시계방향 회전)이라면 S₂가 그 반대인 -1/2(반시계방향 회전)가 나올 확률이 전체 실행횟수의 50%를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도출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두 입자의 스핀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스핀이 같은 경우)가 50% 혹은 그 이상 나타난다면 EPR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입자가 모든 축에 대해 명확한 스핀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검증방법으로 벨이 이루어낸 위대한 발견입니다.

벨의 성과를 좀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벨은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고실험인 EPR 논증을 실제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즉, 그는 실제 실험으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상반된 입장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벨은 EPR 실험의 기본 가정이기도 했던 실재성과 국소성을 모두 채택하여 ‘국소적 실재(local reality)’라는 가정을 전제로 서로 떨어진 두 입자를 동시에 측정할 때 얻어지는 결과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만일 고유의 불확정성을 갖는 양자역학이 옳다면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실험적 예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측은 벨의 부등식이라는 수학적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만일 국소적인 세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옳다면 벨의 부등식은 실제 실험결과를 만족시키지만, 만일 보어가 옳다면 이 부등식은 깨어질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인슈타인의 ‘국소적 실재’ 가정이 맞을 경우, 즉 자연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신념이 맞을 경우 자연현상이 만족해야 하는 부등식을 벨이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실제 검증 – 아스페 실험

벨의 부등식이 나온 이후 세계 물리학계에서는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이 시도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1982년 프랑스 알랭 아스페(Alain Aspect) 팀의 실험이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스페와 그의 동료들은 레이저로 칼슘원자를 때려 쌍둥이 광자를 만들어낸 다음 각각의 광자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가게 하여 특수한 필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이때 방출된 한 쌍의 광자들은 동일한 스핀을 갖도록 서로 완벽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아스페 팀은 EPR-보옴 논증의 전자 대신 광자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감지기를 동일한 축에 대한 스핀을 측정하도록 똑같이 세팅한다면 두 광자의 스핀은 항상 동일한 값을 나타낼 것입니다.

 

아스페 팀의 실험 개념도.

 

아스페 팀은 벨이 제안한 대로 두 감지기의 세팅 상태를 무작위로 바꾸면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에 벨의 부등식을 적용하면, 만일 EPR 주장대로 입자가 세 가지 스핀 성분을 확정적으로 갖고 있다면 두 대의 감지기가 동일한 스핀 값을 나타내는 경우는 전체 시행횟수의 50%를 넘어야 합니다.

아스페의 실험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1982년 발표된 이 실험결과는 놀랍게도 두 감지기에 동일한 스핀 값을 나타내는 경우는 전체 시행횟수의 꼭 50%였습니다. 50%를 넘지 않은 것입니다. 벨의 부등식을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패배였습니다.

따라서 EPR 논증의 가정인 실재성과 국소성 중 어느 하나, 혹은 둘 다 틀렸다는 결론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결과는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가 자연의 본질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보어의 견해를 강화시켜주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벨과 EPR의 기본가정인 국소성과 실재성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할 것을 주문합니다. 국소성을 지키려면 공간 사이에 빛보다 빠른 정보 전달은 불가능하다는 상대성이론의 대원칙과 두 입자의 상태는 공간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는 원리는 지켜지지만 실재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반대로 물리적 실재성을 지키려면 비국소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어 등의 양자역학 표준해석은 대체로 객관적인 실재를 지키고 국소성을 포기(비국소성을 인정)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아스페 팀의 실험에서도 실제로 비국소성이 나타났습니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간 광자는 필터를 통과하여 두 개의 편광분석기 중 하나로 향하게 됩니다. 필터가 한 분석기에서 다른 분석기로 전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0억 분의 1초로 광자가 파이프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300억 분의 1초 짧게 하여 두 광자쌍이 가능한 어떠한 물리적 작용을 통해서도 서로 교신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아스페 팀은 광자가 그 자신의 짝이 되는 광자의 편광각과 자신의 편광각을 일치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초광속 교신이 일어났거나, 두 광자가 비국소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초광속 현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므로 아스페 팀의 실험은 두 개의 광자 사이에 비국소적인 연결이 있음을 사실상 증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벨 부등식과 아스페 실험의 의미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이 양자역학에 회심의 일격을 가한 EPR 논증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양자역학의 타당성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특히 이에 대한 벨 부등식과 아스페의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신념과 달리 이 우주가 국소적이 아님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EPR은 불확정성 원리의 오류를 논증하면서 국소성의 원리를 전제로 내세웠습니다. 즉, “임의의 순간에 입자 S₁의 특성을 측정하여, 그와 멀리 떨어진 그 쌍입자 S₂의 특성을 간접적으로 알아낸다면 S₂는 ‘간접적으로 밝혀진’ 그 특성을 계속해서 간직한다”는 가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무리가 없는 가정입니다. S₁과 S₂는 공간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S₁에서 일어난 일이 순간적으로 S₂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게 상대성이론을 포함해 물리학의 상식입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S₁에게 일어난 사건이 S₂에 알려지려면 최소한 빛이 달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EPR의 논리나 실제 실험에서는 S₁과 S₂의 특성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S₁을 측정하여 간접적으로 알아낸 S₂의 특성은 S₁을 측정하는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부터 S₂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어야 한다는 게 EPR의 주장입니다. 우리가 온갖 실험 장비를 동원하여 S₁을 관측해도 S₂의 속성은 이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 EPR의 핵심은 S₁과 S₂가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스페의 실험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EPR의 가정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공간의 ‘이곳’에 있는 S₁에게 일어난 일이 즉각적으로 ‘저곳’에 있는 S₂에게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우리가 물체를 측정할 때마다 물체는 자신의 특성을 무작위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무작위라는 것은 이렇듯 공간을 가로질러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연관성을 갖는 한 쌍의 입자 S₁과 S₂를 ‘얽힌 입자(entangled particles)’라고 합니다.

한 장소에서 우리가 행한 행위의 결과는 다른 장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다고 두 장소 사이에 모종의 신호가 오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즉각적인 장거리 상호관계가 가능하려면 입자는 서로 연관된 속성을 미리부터 가졌어야 한다는 것이 EPR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실험에 의해 잘못되었음이 입증되었고, 결국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비국소적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두 물체가 양자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면 하나가 받은 영향은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다른 하나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결론이긴 하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험적 증거가 있는 한,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가리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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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21년 12월 9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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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 원자 모형의 지지자들

1910년 옥스퍼드대 트리니티 연구실의 헨리 모즐리(1887-1915). 원자 내에 극히 작은 원자핵이 있다는 이론을 처음 제시해 190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해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닐스 보어의 충격적인 원자모형은 이후 실험적으로도 검증되었다. 영국의 헨리 모즐리는 러더퍼드의 연구진에 합류해 자기만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모즐리는 원자에서 방출하는 X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X선은 자외선보다 파장이 더 짧으며 에너지가 더 크다. 원자가 이처럼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큰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과정은 이렇다.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전자빔을 원하는 원소에 대고 쏜다. 전자빔의 에너지는 원자 속의 전자에 전달된다. 낮은 에너지 상태의 전자가 이 에너지를 흡수해 높은 에너지 상태로 뛰어오른다. 그 결과 그 전자가 있던 낮은 상태는 비어 있게 된다. 이 빈자리를 다른 높은 상태에 있던 전자가 채울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이 전자기파로 방출된다. 따라서 에너지 차이가 클수록 더 높은 에너지, 즉 더 짧은 파장(또는 더 높은 진동수)의 전자기파가 나온다. 그래서 X선이 방출될 수 있다. 이 결과는 정확하게 보어가 자신의 원자모형에서 예측했던 바이다.

모즐리는 1913~1914년 다양한 원소에 전자빔을 쏘아 그 결과로 방출되는 X선을 조사했는데 이 결과는 각 원소 원자번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방출되는 X선의 진동수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서 1을 뺀 수에 비례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를 모즐리의 법칙이라 부른다.

당시에는 주기율표의 원자번호가 원자량, 즉 원소의 질량이 큰 순서로 번호가 부여되었다. 예컨대 알려진 원소 중 일곱 번째로 무거우면 원자번호 7이 부여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원자번호를 부여해서 원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다소 임의적인 면이 있다. 만약 원자량에 따라 6번 탄소, 7번 질소, 8번 산소로 정해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탄소보다 무겁고 질소보다 가벼운 어떤 신비한 원소가 발견된다면 질소는 7번의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게다가 주기율표를 만든 보람 중 하나는 각 원소들의 화학적 성질의 패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인데 그것이 원소의 질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주기율표를 처음 작성한 러시아의 멘델레예프는 52번 텔루륨(Te)과 53번 아이오딘(I;요오드)의 번호를 원자량 크기의 순번을 거슬러 화학적 성질에 따라 정했다. 질량만 따지면 텔루륨이 아이오딘보다 약간 더 무겁기 때문에 텔루륨이 53번이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텔루륨은 브롬과 같은 족이 되어 주기율표상에서 브롬 바로 아래에 놓인다. 그러나 브롬과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것은 텔루륨보다 아이오딘이기 때문에 브롬 아래에 아이오딘이 오도록 텔루륨-아이오딘의 순서로 배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원소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원자번호를 원자량으로만 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과학동아DB

모즐리가 원소들의 X선을 연구할 무렵엔 원자량 대신 원자핵의 전하량을 기준으로 원자번호를 매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모즐리의 결과, 즉 방출되는 X선의 진동수의 제곱근은 원자량의 순서보다 핵의 전하량의 순서를 지지했다.

지금 우리가 알기로는 원자핵의 양의 전하량은 양성자의 개수로 정해진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모즐리의 법칙이 나온 뒤 몇 년이 지난 뒤였고, 그 주역은 모즐리의 스승 러더퍼드였다.

모즐리의 법칙은 보어의 원자모형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보어 모형에서도 중요한 것은 원자핵의 전하량이다. 그러니까 모즐리의 결과는 원자 안에 양의 전기를 가진 핵이 있고, 전자가 높은 에너지 준위에서 낮은 에너지 준위로 떨어질 때 그 에너지 차이만큼 광양자가설에 따라 전자기파를 방출한다는 러더퍼드-보어의 원자모형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놀랍게도 모즐리는 자신의 결과를 이용해 원자번호 43번, 61번, 72번, 75번인 원소들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을 보였다. 이들 원소, 즉 테크네튬(Tc, 43), 프로메륨(Pm, 61), 하프늄(Hf, 72), 레늄(Re, 75)는 훗날 모두 발견되었다.

모즐리의 법칙(Moseley’s law)은 원자에 의해 방출되는 특징적인 X 선에 관한 실험 법칙이다. 이 법칙은 1913년 영국의 물리학자인 헨리 모즐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위키피디아 제공

모즐리가 원소들의 X선 실험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얼마 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모즐리는 자원입대했는데, 1915년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모즐리와 비슷한 시기 독일의 제임스 프랑크와 독일의 구스타프 헤르츠는 프랑크-헤르츠 실험으로 알려진 연구를 통해 보어의 원자모형을 뒷받침했다. 프랑크와 헤르츠의 실험은 비교적 간단했다. 전자를 방출할 수 있는 필라멘트가 들어있는 진공관 속에 수은을 넣고 100도 이상의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수은 증기가 진공관을 가득 채운다. 필라멘트와 진공관에 적절한 전압을 가하면 필라멘트에서 튀어나온 전자가 수은 원자와 충돌하게 된다. 이처럼 프랑크-헤르츠 실험은 한 마디로 전자와 기체원자의 충돌실험이었다.

필라멘트를 탈출한 전자에 걸린 전압이 낮으면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크지 않고 수은 원자들과 탄성충돌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전자는 에너지를 별로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진공관 반대편에 도달한다. 한동안은 전자를 가속하는 전압이 높아질수록 진공관 반대편까지 이르는 전자도 많아져 전류가 증가한다. 그러다가 전압이 더 높아지면 어느 순간 전자의 에너지가 충분히 커서 수은 원자와 비탄성충돌을 하며 대부분의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그 결과 반대편까지 이르는 전자가 줄어들어 전류도 급격하게 줄어든다. 전자가 잃어버린 에너지는 수은 원자에 전해져 그 에너지 준위를 바닥상태에서 들뜬상태로 바꾼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압을 계속 높이면 다시 전류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또 전압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전압은 다시 떨어진다. 이 결과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전자를 가속하는 전압을 가로축으로, 진공관 반대편까지 흐르는 전류를 세로축으로 하는 그래프를 그리면 전압이 증가함에 따라 전류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산봉우리와 골짜기 모양이 규칙적으로 여러 개 나타난다. 물론 전체적으로 전류의 세기는 점점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전류가 전압에 따라 계속 증가하지 않고 갑자기 골짜기 모양으로 떨어지는 전압간격은 4.9볼트(V)였다. 즉, 4.9V의 전압 속 전자가 가진 에너지, 즉 4.9전자볼트(electron VolteV)의 에너지가 규칙적으로 수은 원자에 흡수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전자가 한차례 비탄성충돌로 에너지를 잃어버린 뒤에도 높은 전압 때문에 다시 가속돼 다른 수은 원자와 또다시 비탄성충돌을 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압이 더 높을수록 전자가 비탄성충돌하는 횟수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이 결과가 놀라운 이유는 원자가 흡수하는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점이다. 만약 공을 바닥에서 비탈면을 따라 위로 굴러 올리면 공의 운동에너지는 연속적으로 감소하면서 위치에너지는 연속적으로 증가한다. 미시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원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는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공이 비탈면을 굴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다. 계단을 올라갈 때에는 한 계단 높이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 계단으로 올라갈 수 없다. 즉, 더 높은 에너지 상태로 올라서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다.

프랑크와 헤르츠는 전자가 잃어버린 에너지가 정말로 수은 원자에 불연속적으로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은 원자가 방출하는 전자기파의 스펙트럼을 조사했다. 정말로 수은 원자가 바닥상태에서 전자로부터 4.9eV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들뜬상태가 되었다면, 이 들뜬상태가 다시 바닥상태로 떨어지면서 그 에너지 차이(즉 4.9eV)만큼이 전자기파로 방출될 것이다. 여기에 광양자가설을 적용하면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파장을 아주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다. 전자기파, 즉 광자의 에너지가 플랑크상수 곱하기 진동수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전자기파의 진동수는 파장과 곱했을 때 광속이 돼야 한다. 결과적으로 수은 원자가 방출하는 전자기파의 파장은 플랑크상수와 광속의 곱을 4.9eV로 나누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 그 결과는 약 254나노미터(㎚)이다. 이 파장대는 자외선(10~400㎚)에 해당한다. 자외선은 유리벽을 관통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크와 헤르츠는 석영을 이용해 수은 원자가 방출하는 전자기파의 파장을 측정했다. 그 결과는 254nm와 일치했다.

자외선이 유리를 통과할 수 없는 이유도 프랑크-헤르츠 실험의 원리와 비슷하다. 자외선은 파장이 짧아 에너지가 충분히 크기 때문에 유리원자가 그 에너지를 흡수해 들뜬 상태로 올라간다. 즉, 자외선이 ‘흡수’된다. 반면 이보다 파장이 긴 가시광선은 자외선보다 에너지가 작아 바닥상태의 유리원자를 들뜬상태로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유리는 가시광선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시킨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 반대편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원자모형이 나오기 전부터 비슷한 실험을 해 왔고 1914년 프랑크-헤르츠 실험 때에도 보어모형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과가 불연속적으로 양자화된 에너지 준위를 갖는 보어의 원자모형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음은 자명했다. 프랑크와 헤르츠는 자신들의 이름이 붙은 실험 덕분에 전자와 원자의 충돌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한 공로 192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흥미롭게도 프랑크와 헤르츠는 모두 1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1915년에는 둘 다 당시 독일의 저명한 화학자였던 프리츠 하버가 이끄는 독가스 제조부대에서 복무했다. 하버는 1911년 암모니아 합성에 성공한 화학자로 인공적인 비료생산의 길을 열어 ‘공기에서 빵을 만든 과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버가 만든 염소 가스는 1915년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살포돼 독일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제임스 프랑크와 구스타프 헤르츠

 

 

 

 

아래는 2021년 12월 23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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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파동 이중성

1934년 코펜하겐의 학회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닐스 보어((오른쪽)와 하이젠베르크. 위키피디아 제공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이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모즐리나 프랑크 헤르츠의 실험도 보어의 모형을 강력하게 지지하기는 했지만 보어 모형의 대담한 가설들은 가설일 뿐이라 왜 그러해야 하는지를 그 자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큰 돌파구를 만든 사람이 프랑스의 루이 드브로이였다. 드브로이는 귀족가문 출신으로 1892년에 태어나 1924년 나이 서른이 넘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대의 다른 천재들이 20대에 눈부신 성과를 내고 30대에 노벨상을 받은 것에 비하면 조금 늦은 감은 있었다. 드브로이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파동이라 생각했던 빛, 즉 전자기파가 광양자가설을 통해 입자적인 성질을 드러내듯이 반대로 전통적으로 입자라 여겼던 전자 같은 물질도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파동을 물질파라 한다.

사실 과학자들은 극단적인 사고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는 하다. 갈릴레오는 마찰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빗면을 굴러 내려온 공은 평면을 따라 영원히 굴러갈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는 관성의 발견으로,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이 멈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을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뉴턴은 높은 산에서 대포를 쏘았을 때 포탄의 사거리가 지구 둘레만큼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이 지구를 향해 끝없이 낙하하는 것과도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8세기 프랑스의 존 미셸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는 표면중력이 극도로 강력해 그 중력을 탈출할 수 있는 초속도가 광속보다 큰 경우를 상상했다. 이런 천체를 어둑별이라 하는데, 20세기에 일반상대성이론 속에서 개념이 정립된 블랙홀의 원조에 해당한다.

프랑스 물리학자 드브로이(1892~1987)

드브로이의 극단적인 사고는 언뜻 보기에 아주 황당해 보인다. 하지만 흑체복사, 광전효과, 콤프턴 산란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랜 세월 파동이라 여겨왔던 빛이 입자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면 이 상황을 대칭적으로 적용해 보려는 시도, 즉 입자도 파동적 성질을 갖는 게 아닌가 하고 가정해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고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빛이 입자라는데, 전자가 파동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개체가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파동의 가장 큰 성질은 파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드브로이는 어떤 물체가 가지는 물질파의 파장이 플랑크 상수를 그 운동량으로 나눈 값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물체의 운동량은 고전적으로는 그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주어진다. 이 관계식은 빛의 경우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다. 드브로이는 그 관계가 전자 같은 입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드브로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1923년 일련의 논문으로 발표했고 이를 더 가다듬고 발전시켜 박사학위 논문으로 완성했다.

드브로이의 학위논문이 너무나 파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어서 일화에 따르면 당시 논문심사위원들이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논문지도교수였던 폴 랑주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드브로이의 논문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논문에 큰 감명을 받아 드브로이에 보낸 편지에서 “거대한 베일의 모퉁이를 들어올렸다”고 높이 평가했다. 드브로이는 결국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1929년 노벨물리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선정위원회는 ‘전자의 파동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를 선정이유로 들었다.

드브로이의 물질파 공식을 담고 있는 기념 우표. 위키미디어 제공

드브로이의 물질파는 보어의 원자모형에 보다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보어의 모형에서 가장 신비로운 점은 어떻게 전자가 불연속적인 특정한 에너지 준위에만 존재하고 있는가이다. 만약 전자가 파동이라면 이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간단하게 기타줄처럼 양끝이 고정된 줄이 진동하는 파동을 생각해 보자. 이런 파동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한 상태에서 진동하므로 정지파(standing wave)라 한다. 정지파가 형성되면 그 파동의 파장은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파동 전체의 길이가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즉, 파장이 제일 긴 정지파의 경우 정지파의 길이는 파동의 반파장에 해당한다. 또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파장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정지파의 전체 길이가 파동의 한 파장에 해당한다. 이처럼 정지파에서 가능한 진동모드에서는 파장이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없고, 파동 전체의 길이가 반파장의 정수배인 파동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일반화시켜 만약 기타를 휘어서 원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이때 형성되는 기타줄의 정상파는 그 반파장의 정수배가 항상 원주의 길이와 같아야만 한다. 이와 비슷하게 원자 속의 전자도 물질파로서 원형으로 하나의 정지파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보어의 전자궤도를 설명할 수 있다. 즉, 전자궤도의 원주의 길이가 전자의 물질파 파장의 정수배로만 가능하다. 여기서 물질파의 파장에 드브로이의 공식을 대입하면 보어가 가정했던 각운동량의 양자화 조건이 도출된다. 말하자면 드브로이의 물질파는 보어모형의 다소 임의적인 가정에 ‘족보’를 부여한 셈이다.

빛이 파동이면서도 동시에 입자적인 성질을 갖고 있고, 전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적 성질을 갖고 있는 이런 양상을 입자-파동의 이중성이라 부른다. 이중성은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한 성질이 발현되면 다른 성질은 숨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빛의 생소한 입자적 성질은 광전효과나 콤프턴 산란 실험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과연 전자의 생소한 파동적 성질은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실제로 드브로이는 박사학위논문 구두심사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았고 드브로이 자신이 여기에 대한 답을 주었다. 드브로이는 전자가 결정에 부딪혀 튕겨 나올 때 파동과도 같은 회절현상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회절이란 파동이 경계면의 모서리에서 휘어져 나가는 현상이다. 파동이 아주 작은 틈을 통과하면 파동은 그 틈을 일직선으로 지나는 경로에만 존재하지 않고 그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이는 파면의 각 점이 새로운 구면파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하위헌스-프레즈넬 원리 때문이다. 이때 각 점이 형성하는 파면이 서로 만나서 중첩된다. 그 결과 빛의 경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스크린에 밝고 어두움이 반복되는 무늬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회절무늬라 한다.

회절은 입자와 파동을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현상이다. 예컨대 아주 좁은 구멍에 대고 총을 난사하면 그 구멍을 통과한 총알들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표적지에 자신이 통과한 구멍만큼의 흔적만 남길 것이다. 구멍과 표적지를 잇는 직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총알이 도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입자의 특성이다. 그러나 좁은 틈에 대고 빛을 쏘면 틈과 스크린을 잇는 직선 주변으로 밝고 어두운 동심원 무늬가 생긴다. 대표적인 사례로 결정에다 X선을 쬐면 결정의 격자들에 튕겨 나온 X선들이 서로 중첩되며 동심원 모양의 회절무늬를 만든다. 드브로이는 X선 같은 전자기파가 아니라 전자라는 명백한 입자(누가 뭐래도 전자는 빛보다 총알에 가깝지 않은가)를 쏘더라도 비슷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주장한 것이다.

드브로이의 놀라운 주장이 실험적으로 검증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27년 미국 벨연구소의 클린턴 데이빗슨과 레스터 저머는 전자를 이용해 니켈의 표면을 연구하다가 우연히도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평범하게 실험이 진행되던 도중 우연한 사고로 시료가 산화돼 오염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진은 시료를 가열한 뒤에 실험을 했다. 그 결과는 시료를 가열하기 전과 전혀 달랐다. 가열 전에는 전자가 입사한 방향에서 각도가 커질수록 튕겨 나오는 전자의 세기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이는 전자를 총알이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런데 시료를 재처리한 뒤에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입사방향과 50도 정도 되는 각도에서 전자의 세기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 이는 입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결과였다.

드브로이의 물질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1년 뒤 톰슨은 X선과 동일한 파장을 지닌 전자에 의한 두가지 회절의 모양이 거의 일치한다는 실험을 통해 다시 한번 전자의 물질파 특성을 증명하게 된다. 위키미디어 제공

비밀은 시료를 열처리한 것에 있었다. 그 결과로 니켈의 결정격자가 재배열되면서 그 간격이 전자의 물질파 파장과 비슷해지며 물질파의 회절무늬가 잘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입사방향에서 한참 떨어진 영역에서도 전자의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명백히 전자가 파동이라는 증거이다.

애초에 데이빗슨과 저머의 실험은 드브로이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사고로 엉뚱한 결과를 얻었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드브로이의 물질파 가정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에서도 역시나 운이 중요하다.

같은 해에 영국의 조지 톰슨도 비슷한 실험으로 전자의 회절무늬를 얻었다.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톰슨의 아들이었다. 톰슨의 경우 아버지는 입자로서의 전자를 발견했고, 그의 아들은 그 전자의 파동적 성질을 발견한 것이다. 아버지 조지프 톰슨은 1906년 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아들 조지 톰슨은 전자의 회절을 발견한 공로로 1937년 데이빗슨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드브로이의 물질파는 양자역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물질파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신의 이름이 붙은 그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얻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파동방정식으로서 이를 통해 수소원자의 에너지 스펙트럼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 1926년에 나왔으니까 드브로이가 물질파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불과 2년 뒤였다. 그러나 그보다 한 해 전에 독일의 위대한 천재가 이미 뉴턴역학을 대체할 새로운 역학체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였다.

 

 

 

 

아래는 2022년 1월 6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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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강의 중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피직스월드 제공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생으로 19세기에 태어난 아인슈타인(1879년생)이나 보어(1885년생), 에르빈 슈뢰딩거(1887년생)과 다르게 20세기의 사람이다. 독일 뷔츠부르크에서 태어난 하이젠베르크는 유년시절을 뮌헨에서 보냈고 뮌헨대에서 아놀드 조머펠트 교수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1923년). 하이젠베르크는 어릴 때부터 팔방미인으로 수학뿐만 아니라 외국어와 피아노에서도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학문여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역시 닐스 보어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22년 괴팅겐대에서 보어의 양자이론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는 훗날 괴팅겐의 ‘보어 축제’로 불렸다. 보어는 당시 이미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다. 대형 강의실은 꽉 찼으며 유명한 교수들, 저명한 수학자들도 많았다. 21세의 하이젠베르크는 가장 어린 청중에 속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미 뮌헨에서 조머펠트와 함께 보어이론을 연구했으며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날려 보어를 당황시켰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 흥미를 느껴 이후 산책길에 그를 초대했고 둘의 학문적 우정이 시작되었다. 이날의 산책은 하이젠베르크의 학문적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이젠베르크는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괴팅겐대에서 막스 보른을 호스트로 공동연구를 진행하며 교수 자격학위도 받았다. 1924년에는 보어의 초청으로 코펜하겐도 수차례 방문했다. 1925년 괴팅겐으로 돌아왔을 때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심하게 알아서 요양휴가를 가기로 했다. 2주 여정으로 시작한 요양지는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트였다. 이 섬에 머무는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에서 뉴턴 역학을 대체할 새로운 역학체계를 구상하게 된다.

1934년 코펜하겐의 학회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닐스 보어(오른쪽)와 하이젠베르크. 위키피디아 제공

하이젠베르크에겐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전자의 궤도처럼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양을 배척하고 원자가 방출하는 빛의 파장이나 세기 등 실험으로 관측할 수 있는 양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양자이론이 제아무리 기묘하더라도 에너지보존법칙을 위배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에서 관측가능한 물리량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전통은 하이젠베르크로부터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19세기말에 풍미했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나 마흐주의와도 연결된다. 마흐는 감각경험이나 직접적인 실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은 아인슈타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에 흔히 등장하는 자와 시계를 이용한 측정은 마흐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현대물리학은 우리의 감각경험을 넘어서는 광속 근처나 원자 이하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마흐주의는 20세기의 정신과 그리 궁합이 잘 맞지는 않는 편이다. 마흐주의에 경도된 많은 과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원자나 분자의 존재도 부정했다. 한때 마흐의 충실한 학생이라고까지 했던 아인슈타인도 결국엔 마흐주의와 결별했다.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것은 간단히 말해 하나의 거대한 표라고 할 수 있다. 이 표를 이용하면 하나의 에너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이할 때 방출하는 빛의 세기를 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도 보존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표를 이용한 계산이 기묘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곱하기의 순서를 바꾸면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는 보통의 숫자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결과였다.

프리드리히 훈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 괴팅겐 1966년

하이젠베르크의 결과를 받아 든 괴팅겐의 보른도 처음에는 기묘한 수학규칙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얼마지 않아 그것이 곧 행렬의 곱셈임을 알아차렸다. 행렬이란 숫자를 직사각형으로 배열한 것을 말한다. 두 행렬사이에 곱셈이 성립하려면 조금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하고 그 계산법도 보통의 숫자들 곱셈보다는 좀 복잡하다. 두 행렬을 곱할 때에는 곱하는 순서가 아주 중요해서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거나 심지어 곱셈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 및 자신의 학생인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행렬을 이용한 새로운 역학체계를 정리했다. 이 때문에 하이젠베르크가 확립한 역학체계를 행렬역학이라 부른다. 1925년 하이젠베르크가 단독으로 저술한 논문 《운동학적 역학적 관계들에 대한 양자이론적 재해석》
은 양자역학을 정초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이 논문은 대단히 난해해서 스티븐 와인버그가 “마법 그 자체”라 언급할 정도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단독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그 수상 이유의 첫 번째가 “양자역학을 정초한 공로(for the creation of quantum mechanics)”였다.

독일의 볼프강 파울리나 영국의 폴 디랙은 행렬역학에 열광했고, 즉시 이를 이용해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을 계산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가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물리학자들에게 오랜 세월 익숙했던 계산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수학과 계산규칙이 등장했다는 점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고전적인 방식으로 양자이론을 기술할 수 있다면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그 일을 해낸 사람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에르빈 슈뢰딩거였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랙 등 20세기를 주름잡은 천재들이 20대에 눈부신 성과를 낸 반면 슈뢰딩거는 30대 중반까지도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했다.

슈뢰딩거에게 큰 전환점을 준 것은 물질파를 주창한 드브로이의 학위논문이었다. 물질파에서 영감을 받은 슈뢰딩거는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을 설명할 새로운 파동방정식을 찾아 나섰다. 슈뢰딩거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견한 것은 1925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슈뢰딩거는 스위스 아로사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났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은 부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연인이었다고 한다. 슈뢰딩거는 과학계에서도 바람둥이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때 슈뢰딩거와 동행한 여자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에르빈 슈뢰딩거. 슈뢰딩거 방정식을 비롯한 양자 역학에 대한 기여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물질파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슈뢰딩거 방정식’을 창안했고 그것으로 1933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유명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슈뢰딩거의 결과는 이듬해에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물리학자에게 대단히 익숙한 미분방정식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어떤 물리계의 총 에너지를 기술한다. 이 방정식의 풀이에 해당하는 함수를 파동함수라 부르며 보통 그리스문자 를 이용한다. 미분방정식은 오랜 세월 물리학자들이 풀어왔던 방정식이었기에 거부감도 덜했고 익숙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했으나 머지않아 두 체계가 동등함이 밝혀졌다. 지금은 양자역학의 문제를 풀 때 대부분 슈뢰딩거 방정식을 이용한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중심으로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방식을 파동역학이라 부른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방정식을 발견한 공로로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단독수상이 아닌 공동수상이었다. 공동수상자는 영국의 폴 디랙이었다. 디랙 또한 자신의 이름이 붙은 디랙방정식을 1928년에 발표했는데 이는 특수상대성이론과 결합된 양자역학 방정식이었다. 이에 비하면 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 방정식이다.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 행렬역학을 발표해 1932년 노벨상을 받았고, 슈뢰딩거가 1926년에 파동역학을 발표해 1933년에 노벨상을 받은 사실이 흥미롭다. 한편 1928년 디랙방정식으로 1933년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디랙은 하이젠베르크보다 한 해 늦은 1902년에 태어났다.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이 20대 중반의 업적으로 31세에 노벨상을 받은 반면 슈뢰딩거는 39세의 업적으로 46세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불멸의 방정식을 발견해 과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을 대표하는 방정식이고,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물리학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므로 슈뢰딩거 방정식은 아인슈타인의 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방정식이라 할 수 있다. 슈뢰딩거가 이처럼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긴 했지만 정작 슈뢰딩거 본인은 양자역학 또는 양자이론 자체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특히 슈뢰딩거가 드브로이의 물질파에 영감을 받아 파동방정식을 개발한 이유가 원자 속 전자를 파동으로 기술하기 위함이었다. 즉, 양자이론을 완전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로 일컬어지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고 실험의 주인공이다. 위키미디어 제공

이는 괴팅겐대의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 보른이나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역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역학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행렬역학이었다. 수학적으로는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동등하다고 밝혀졌지만 애초에 각 역학체계를 탐색하던 철학은 전혀 달랐던 셈이다.

슈뢰딩거는 이후에도 이른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도 반대해 ‘슈뢰딩거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펜하겐 해석과 슈뢰딩거 고양이는 이후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사달의 출발점은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미분방정식의 풀이에 해당하는 파동함수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슈뢰딩거에게 파동함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물리적 실체에 가까웠다. 예컨대 파동함수는 물질파로서의 전자라는 것이다. 한때 슈뢰딩거는 전자에 대한 파동함수가 전자의 전하밀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파동함수를 고전적인 의미의 파동으로 해석하기에는 어색한 면이 너무 많았다. 괴팅겐에서 고전역학과는 결별하고 완전히 다른 역학을 꿈꾸었던 보른은 1927년 파동함수에 대해 대단히 혁명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이로부터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영원히 결별하기 시작했고 다시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강을 만들어버렸다.

슈뢰딩거(왼쪽)와 하이젠베르크(오른쪽), 스웨덴 왕(가운데). 1933년 노벨상 수상식의 모습이다. 노벨상위원회 제공

 

 

 

 

아래는 2022년 1월 20일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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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 원리를 둘러싼 논란

독일 이론 물리학자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1901-1976). 크리에이티브커먼스

양자역학은 잘 몰라도 ‘불확정성 원리’는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1927년에 주창한 이 원리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가 고전적인 거시세계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불확정성 원리를 구상했을 때에는 미시세계에서 관측행위와 관측대상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관계에 집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하이젠베르크 현미경’이라 불리는 사고실험을 통해 어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가 무엇을 관측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튕겨 나오는 빛, 즉 광자를 감지하는 것이다. 만약 전자의 위치를 관측하려고 한다면 전자에 빛을 쪼여 튕겨 나오는 광자를 포착해 정보를 얻으면 된다. 이때 전자의 위치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려면 빛의 파장이 짧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파장이 짧은 빛은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관측 대상인 전자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 결과 전자의 운동량에 큰 변화가 생긴다. 운동량은 고전적으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주어진다. 전자의 위치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전자의 운동량을 크게 변화시킨다. 달리 말해 전자의 위치의 불확정성이 작아질수록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커진다. 이 두 불확정성은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어서 두 불확정성을 곱하면 항상 플랑크 상수 정도의 값 이하로 작아질 수 없다.

만약 운동량의 불확정성을 줄이기 위해 전자에 쏘는 빛의 파장을 길게 하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빛의 에너지가 작으므로 전자의 운동량에 큰 변화를 주지 않겠지만 대신 전자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이 커진다. 그 결과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의 곱은 여전히 어떤 값 이하로 내려갈 수가 없다. 위치와 운동량의 이런 독특한 관계는 시간과 에너지 사이에도 적용된다. 즉, 시간의 불확정성과 에너지의 불확정성의 곱은 특정값 이하로 작아질 수 없다. 하나를 무한히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다른 물리량의 불확정성이 무한으로 커진다.

사실 모든 물리량이 불확정성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위치와 운동량이라고 해도 두 방향이 다르면 불확정성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x방향의 위치와 y방향의 운동량 사이에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아서 두 변수의 불확정성을 동시에 임의로 작게 줄일 수 있다.

193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학회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닐스 보어((오른쪽)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위키피디아 제공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다소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무렵 보어는 미시세계에서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이 혼재한 모습에 큰 혼란을 느꼈고 마침내 ‘상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고 있었다. 상보성이란 상호배타적인 성질이다. 미시세계의 전자는 입자의 성질을 보이기도 하고 파동의 성질을 보이기도 하지만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빛, 즉 광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상보성은 ‘그리고’가 아니라 ‘또는’의 성질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도 상보성의 한 사례에 속한다.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짝을 이루며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위치가 명확해지면 운동량이 모호해지고, 운동량이 명확해지면 위치가 모호해진다. 시간과 에너지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도 결과적으로 불확정성의 원리에 이르게 되지만 기본철학이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전자를 관찰하는 가상의 현미경을 이용한 사고실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젠베르크는 파동이나 입자라는 고전적인 개념에 기대어 미세세계의 새로운 원리인 불확정성 원리를 구축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적절한 선에서 합의에 이르기는 했다.

불확정성 원리는 실험기구나 기법의 한계가 아니다. 우리 우주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실험 기구와 기법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다. 양자역학의 언어로 보다 정식화해서 말하자면, 교환가능하지 않은 두 연산자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불확정성 원리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고전역학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고전역학에서는 임의의 정밀도로 초기조건을 규정할 수 있고 이를 뉴턴 동역학에 때려 넣으면 임의의 미래를 임의의 정밀도로, ‘원리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임의의 정밀도로 초기조건을 규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여기에다 파동함수를 확률론적으로 해석한 보른의 규칙까지 더하면 양자역학에서 진행되는 과정은 뉴턴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양자역학의 파격적인 주장은 당연히 적잖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20세기 물리학의 정초를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이 상대성이론을 구축했고, 광전효과 등 양자역학의 발전에도 지대하게 공헌했으나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크게 격돌한 것은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된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였다. 그해 10월 브뤼셀에서는 제5회 솔베이 학회가 개최되었다. 솔베이학회는 벨기에의 사업가인 어니스트 솔베이가 후원한 학회로 1911년 첫 학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회는 현대물리학이 발전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27년 열린 제5회 솔베이 학회는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양자역학을 두고 격돌한 것으로 유명하며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학회에서 보어는 상보성에 관한 강연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기본원리들에 회의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공격하면 보어가 방어하는 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숙소의 식당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원리를 공격하기 위해 이중슬릿 실험을 사고실험으로 재구성해 보어와 그 일파에게 숙제를 던졌다.

이중 슬릿 실험. 입자인 전자들을 두 개의 구멍 사이로 보냈더니, 스크린에 여러 개의 줄무늬가 생겼다. 전자가 스크린에 도착할 확률이 높은 곳은 밝고, 확률이 낮은 곳은 어둡다. 과학동아DB

이중슬릿, 또는 두 틈 실험은 고전역학에서도 빛의 파동성을 증명한 유명한 실험으로 양자역학에서도 양자세계의 오묘함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빛과 같은 파동이 두 틈을 지나 멀리 있는 스크린에 도달하면 양쪽 틈에서 나온 빛이 간섭을 일으켜 스크린에 밝고 어두운 무늬가 반복되는 독특한 간섭무늬를 만든다. 입자는 결코 이처럼 밝고 어두운 곳이 반복되는 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만약 전자가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브로이의 주장처럼 물질파를 가진다면, 그래서 보어의 주장처럼 전자가 상보성의 원리에 따라 입자의 성질을 드러내지 않고 파동의 성질만 드러낸다면 전자도 능히 간섭무늬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제5회 학회가 열렸던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거머는 우연히도 전자의 간섭무늬를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아인슈타인의 논리를 간단히 재구성하면 이렇다. 이중슬릿 앞에 특수 장치가 설치된 단일슬릿을 하나 더 설치한다. 전자는 단일슬릿을 지나 이중슬릿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도달한다. 영리한 아인슈타인은 전자가 단일슬릿을 통과할 때 슬릿의 움직임을 분석해 전자가 슬릿에 전달한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전자가 야기한 슬릿의 움직임을 잘 분석하면 이 전자가 두 번째 이중슬릿의 어느 틈으로 지나갔는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일슬릿과 이중슬릿을 통과한 전자들이 마지막 스크린에 여럿 모이면 물질파로서의 전자들이 간섭무늬를 만들 것이다. 한편 전자가 이중슬릿의 두 틈 중에서 어느 틈을 통과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전자의 명확한 궤적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자는 명확한 궤적을 가진 입자적 성질과 간섭무늬를 만드는 파동적 성질을 동시에 갖게 되므로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를 깨뜨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단일슬릿을 통해 전자의 운동량과 위치도 임의의 정밀도로 측정할 수 있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깨뜨리게 된다.

보어는 첫 번째 단일슬릿에서 단일슬릿의 움직임으로부터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슬릿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슬릿의 위치를 관측해야 하고 이를 위해 빛을 쪼이면 광자의 운동량이 전해져 슬릿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게 된다. 반대로 슬릿의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파장이 긴 빛을 사용하면 슬릿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이 증가한다. 따라서 어떻게든 정확한 운동량을 관측하기 어렵다. 또한 슬릿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이 커질수록 전자가 두 번째 이중슬릿의 어느 틈으로 지나갔는지를 판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경우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충분히 작아질 수 있어서 그 결과 최종 스크린에서 뚜렷한 간섭무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는 전자의 파동성질이 살아나고 입자적 성질이 사라짐을 뜻한다.

반대로 전자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이 줄어들면 전자가 어느 틈으로 지나갔는지 그 경로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증가해 최종 스크린에서 간섭무늬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파동적 성질이 사라지고 입자적 성질만 남는다. 보어는 자신의 날카로운 분석으로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 원리를 모두 살릴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음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내뱉었지만 이 학회에서는 보어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제5차 솔베이 회의’에 참여한 학자들이 모여 찍은 사진. 5차 회의 주제는 ‘전자와 광자’로, 양자역학이 만들어 낸 물리학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핵심 논의사항이었다. 아인슈타인(왼쪽에서 다섯번째), 마리 퀴리(왼쪽 세 번째)가 보이고 둘째줄 맨 오른쪽 닐스 보어가 위치해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1930년에 있었던 제6회 솔베이 학회에서는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의 2차전이 전개됐다.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이 시간-에너지의 불확정성 원리를 공격하는 사고실험을 들고 나왔다. 이 사고실험에서는 광자가 가득 찬 상자에서 광자가 하나씩 빠져나가게 해 그 과정에서 광자가 탈출하는 시간과 광자의 에너지를 동시에 임의의 정밀도로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깨지게 된다.

2차전은 1차전보다 더 어려웠으나 보어는 다시 방어전에 성공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트레이드마크인 일반상대성이론의 성질을 결정적으로 활용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이 빨라진다. 그러니까 광자가 가득한 상자의 수직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면 지구에 의한 중력이 달라지니까 그 속의 시간이 달라진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이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서의 불확정성이 개입하게 된다.

보어의 연전연승은 곧 양자역학의 승리이기도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이나 다른 반대편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양자역학의 모순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양자역학의 모습이 틀을 갖춰나갔고 그 정형화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해석이 바로 ‘코펜하겐 해석’이다.

보어의 미공개 편지. 1941년 하이젠베르크의 방문에 대한 보어의 격분한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어의 구술을 아내 마그리트가 받아썼고, 실제로 부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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