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반짝임, 휘황찬란함, 화려함, 돈, 재산, 부유함, 풍요로움, 귀함…. 속세의 때를 전혀 벗지 못한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살면서 아직 골드바 한번 만져본 적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세속적이라거나, 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황금을 귀히 여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번쩍이는 외양과, 특출나게 안정한 화학적 특성 등으로 인해, ‘귀금속의 제왕’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최영 장군님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일까요? 황금을 갈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황금이 되어 굳어가는 딸을 부여잡고 슬퍼하는 미다스 왕

 

 

이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입니다. 디오니소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미다스 왕은, 그 신심을 높이 산 신으로부터 소원 하나를 이룰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이 되기를”이라는 무서운 소원을 빌게 되지요. 음식, 식기, 가구, 짐승… 그리고 사랑하는 딸까지. 황금을 갈구했던 미다스 왕은 음식을 집어 먹을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도 없는 저주받은 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승에 따라서 이 소원을 철회하거나, 혹은 그대로 죽어가거나, 결말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황금(=물질)에 대한 집착을 경계함’이라고 하는 주제 의식은 유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경계함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갖기 원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억제할 수 없는 것인 듯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업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마이더스(=미다스)의 손”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황금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임을 뒷받침 하는 것처럼, 동양과 서양에서는 자연스레 각각의 사조가 발전했습니다. 동양의 연단술(練丹術)과 서양의 연금술(alchemy)가 바로 그 두 갈래입니다. 기이하게도 동서양 양쪽에서 ‘수명 연장’과 ‘황금 연성’ 두 가지를 모두 목표로 했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동양(중국)에서는 장생술을 기반으로 한 수명 연장과 신선이 되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이어진 서양의 연금술에서는 황금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인 ‘현자의 돌’을 만드는 데 치중했습니다.

 

특히 이 ‘현자의 돌’이라고 하는 물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물건이라, 전승에 따라서는 황금 연성만이 아니라 불로장생의 묘약이 되기도 합니다. 조앤 K. 롤링의 세계적인 대작, 해리포터 시리즈의 문을 연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마법사의 돌’이 본래 영국판에서는 ‘현자의 돌’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지요. 작중에서 실제로, 니콜라스 플라멜이라고 하는 연금술사가 현자의 돌(=마법사의 돌)을 이용해 불로장생을 얻습니다.

이렇게 흔히 인용되고, 다른 매체에서 활용되면서 ‘현자의 돌’과 ‘연금술’은 그야말로 ‘판타지’에 가까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황당무계하고 환상적인 소재, 어린 아이들의 공상의 대상에 가깝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중세까지 존재했던 연금술사들의 모습은 지금 흔히 생각하는 ‘연금술사’들처럼, “손을 마주치면 땅이 움직이고 물질이 모습을 바꾼다”든가, “손가락을 딱 튕기면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는 둥의 마법사에 가까운 모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존했던 연금술사들은 ‘학자’에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비과학적이거나 허무맹랑한 연구를 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시대적인 한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과거에 그리스의 철학자였고, 과학의 아버지로까지 추앙받는 탈레스(Thales)도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을 주장했지만, 지금 시대의 누구도 탈레스를 “무지몽매”하다고 비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탈레스가 당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사물과 현상의 진리를 찾고자 애썼던 위대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의 유무를 정하는 것은 오직 용량 뿐이다.
Alle Ding’ sind Gift, und nichts ohn’ Gift; allein die Dosis macht, daß ein Ding kein Gift ist.

 

이 말을 남긴 것은 가장 유명한 연금술사 중 한 명인 파라켈소스(Philippus Paracelsus)입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신비성이나 주술, 마법적인 어떠한 색채가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의 편린입니다. 실제로 그는 연금술을 연구하는 동시에 철학자이자 화학자 그리고 약학자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은의 독성을 이용해, 매독을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독”을 약으로 이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은 중독에 의해 부작용을 앓은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켈소스가 전통적으로 답습되던 의학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던 한 명의 ‘학자’라는 사실만은 분명할 것입니다.

실제로 연금술을 연구하는 과정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화학적 기초가 축적되기도 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은 저울과 도가니, 플라스크와 증류기와 같은 여러 종류의 화학(에 필요한) 실험 기구를 만들었으며, 물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궁구했습니다. 비록 물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납이나 철 같은 하위 금속을 ‘금속의 제왕’인 황금으로 연성해내는 것은 결국 불가능했지만 그들은 어엿한 화학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An Alchemist in his Workshop> by David Teniers II

 

이렇듯, 중세까지만 해도 ‘연금술’은 결코 허무맹랑한 잡기가 아니라,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하고 있었으나, 과학의 보급과 함께 그 위세를 잃고 맙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바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와 돌턴(John Dalton)입니다. 18세기에 라부아지에가 ‘물질을 분해할 때 더 이상 간단한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입자’라고 원소를 정의했고, 이어서 돌턴의 원자설과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의 분자 개념이 받아들여지면서 4원소설을 기반으로 한 연금술은 그대로 잊힌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금을 만든다’는 이 허무맹랑한 꿈은, 20세기에 들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1919년,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가 알파 입자로 질소 원자를 붕괴시킨 것이 그 계기입니다. 인류는 한 원소가 또다른 원소로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원소도 만들어질 수 있음을 말이지요. 원소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수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원자핵의 구성을 바꾸면 원소의 성질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에 따르면 납(Pb)은 금(Au)이 될 수 있습니다. 납의 양성자 개수는 82개이고, 금의 양성자 개수는 79개입니다. 양성자 세 개만 제거하면 납은 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특징적인 아프로 헤어와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가는 섬세한 솜씨, “어때요, 참 쉽죠?”라는 대사로 컬트적 인기를 구가했던 밥 로스

그리고 이 ‘말로 하면 간단한’ 일을 결국 화학자가 해내고 맙니다. 1980년, 미국의 화학자 시보그(Glenn Theodore Seaborg)는 극소량의 납을 금으로 연성해냅니다. ‘금을 만들어낸다’라고 하는 인류의 오랜 꿈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바로 입자가속기를 이용한 것이지요. 입자가속기란 강한 전자기장을 통해 양성자나 전자를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가속시키는 장치입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를 위시한 몇 안 되는 나라에만 존재하는 아주 거대하고, 값비싼 시설이지요. 이런 엄청난 시설을 이용하지 않으면 원소핵의 구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을 들여서 시보그가 겨우 만들어낸 금의 양은 싯가로 고작 10원 어치에 불과했습니다.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지요. ‘금을 가지고 싶다’라는 욕망에 대해서 한정한다면, 여기에 품었던 연금술사들의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요? ‘금’이라는 현시적 욕망에서 시작되었던 그들의 연구는 화학의 기초를 닦았고, 지금에 와서 화학은 수많은 결과물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아스피린과 페니실린, 각종 연료와 합금이나 반도체. 현재 인류 문명을 이룩하고 있는 수많은 물질들이 화학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화학의, 연금술의, 연금술사의 승리가 되는 건 아닐까요? 결국 인류 문명의 약진이라고 하는 원대한 꿈은 차근차근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페르미 국립 입자가속기 연구소의 전경

 

 

 

그리고 2019년 2월 26일.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지도 모릅니다. 호주 RMIT대가 이끄는 연구팀에서는 이날, 액체 금속을 이용하여 이산화탄소(CO2) 가스를 탄소 고체 입자로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등급의 과학 저널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26일자에 발표한 것입니다. 탄소라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물질입니다. 지구 상에서 존재하는 비중도 손꼽을 정도로 많고, 인류 문명과의 관련성도 몹시 높지요. 탄소가 압축된 ‘다이아몬드’는 그리도 사랑스러운데,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어찌 이렇게 원망스러울까요! 사람의 손으로 탄소를 석탄으로, 흑연으로, 다이아몬드로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누구나가 꿈꿔왔지만 실용화하기에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탄소를 고체로, 석탄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Turning carbon dioxide back into coal | RMIT University

New Method Could Transform CO2 Back Into Coal

 

 

이들이 발표한 이 메커니즘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전해액과 소량의 액체 금속이 든 비커에 용해시킵니다. 그리고 전류를 흘려보내면 이산화탄소는 서서히 탄소 플레이크로 변하게 됩니다. 이 조각이 이윽고 액체 금속의 표면에서 분리되면 지속적으로 고체 탄소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죠. 발표에 따르면 생산된 탄소는 전극, 축전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으며, 공정의 부산물로 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합성 연료 또한 생산된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석탄(coal)’이랑은 괴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 활용법이나 실용성이 완전히 해명된 게 아니니 좀 더 기대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RMIT대 연구원인 토번 대네키(Torben Daeneke) 박사는 자신들이 개발한 방법이 ‘보다 지속가능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산화탄소를 석탄으로 되돌려 땅에 다시 묻는다면, 그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온실가스 배출 시계를 되감는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제까지의 기술을 이용해서 이산화탄소를 고체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섭씨 600도 이상의 온도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액체금속을 이용해서 ‘실온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표하는 바에 따르면, 2017년 한 해에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양은 320억 톤 이상입니다. 이 모든 배출량을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탄소배출량이라고 하는 하나의 위험을 극복할 가능성이 생겼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성급하고 낙관적인 전망일까요.

 

Isaac Asimov’s <The Last Question>(1956)

 

 

지금 이 순간, 필자는 위대한 SF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단편 소설 하나를 떠올립니다. <마지막 질문(The last question)>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는 ‘멀티백’이라고 하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지요. 수십년, 수백년 그리고 수천년. 지구에서 태양계로, 은하로, 전 우주로. 뻗고 또 뻗어 나가면서 인류는 줄곧 되뇌입니다.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있는가?” 인류가 소모하고, 소모하고 또 소모해가는 자원들, 고갈되는 자원들을 보며, 계속해서 이 질문을 하지만 ‘멀티백’은 오로지 같은 답변을 내놓을 뿐입니다. “자료가 부족하여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인류는 결국 소모하고, 소모한 결과 멸망하고, 전 우주에 오로지 극도로 고도화된 인공지능 컴퓨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멀티백만이 남습니다. 홀로 남아서도 계속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던 멀티백은 마지막의 마지막, 드디어(!) 하나의 답을 내놓지요. 그 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부디(!)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 명작을 읽어주세요.

우리의 행동을 돌이킬 수 있을까. 인류는 지속가능할까. 인류는 발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 인류가 지속적으로 궁구해오고 있는 질문입니다. 화학 그리고 과학의 역사는 이 “하나의 질문”에 대한 저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온 과정입니다. 어쩌면 이번에 발표된 기술도 실용화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과다해서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인류가 계속해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진보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에, 멈춰서지 않고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비록 과학의 일선에 선 입장은 아니지만, 이를 지켜보는 인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써,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일견 엄청난 괴리가 있어 보이는 ‘연금술’이 ‘화학’으로 이어지고, 화학 지금 인류 문명의 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는 계속해서 탐구하고, 배워나감으로써 인류의 문명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는 어떤 특별한 천재나 개인이 이룩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마다 사물을 탐구하고, 원리를 파헤치려고 하는 욕심이 모여 빛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설령 과학자가 아니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좀 더 알고자’ 하는 욕심, ‘진보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이언스 빌리지: 슬기로운 화학생활』은 이를 위해서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초체력을 기를 수 있게 독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책입니다. 원소를 탐구해 온 이 시대의 ‘연금술사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축복이 얼마나 큰지, 우리 주변에 알게모르게 산재한 화학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 알게 되면 정말 소스라치게 놀랄 겁니다! 현대 문명을 떠받치는 21세기의 신비, 화학. 화학이 언제고 우리 인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데려다 주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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