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 최고 권위를 갖는 노벨상이지만 때로는 뒤늦게 밝혀진 사실로 큰 논란에 휩싸일 때가 있다.

 

 

노벨상 수상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경우는 스파이롭테라 기생충이 위암의 원인이라는 논문으로 192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덴마크의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비거의 케이스일 것이다. 관련된 후속 연구가 진행되면서 인간에게는 발생하지 않고 실험에 쓰였던 특정 품종의 쥐에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현상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즉, 인간의 암 발생 메커니즘과는 전혀 무관한 이론이었던 것인데,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그때는 이미 피비거가 사망한 뒤였다.

학자 폴 뮐러는 1941년 유기염소제인 DDT를 특허 출원했고, 1942년에는 DDT가 살충제로 시장에 출시됐다. 살충 효과가 뛰어난 DDT는 말라리아 모기를 박멸하는 등의 효과가 있었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뮐러는 194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DDT가 대량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몰랐던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체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곤충의 몸에 DDT가 축적됨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한편으론 곤충들이 화학 살충제에 점점 내성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DDT는 대부분 국가에서 사용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안토니오 모니츠(1948년) 전두엽절제수술 효과 연구논문으로 194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여러 종류의 정신과 질환(우울증, 성격장애, 정신분열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 뇌 일부의 절제·절단 수술하는 방법인데 당시에는 널리 시행됐으나 수술 후 후유증과 그 방법이 비인도적이란 비난으로 현재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아래는 2016년 6월 17일 뉴스입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살충제 DDT의 두 얼굴

 

과학기술 역사상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하면 새로운 제품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거나, 그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자연현상이나 물질의 존재 등을 밝혀내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발명이 또 하나 있으니, 이미 알려진 물질의 새로운 용도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용도 발명’을 이루면, 다른 형태의 발명과 마찬가지로 특허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영욕이 교차했던 살충제의 대명사 DDT

용도 발명의 대표로 꼽힐 만한 것이 바로 예전에 농약과 살충제로 널리 쓰였던 DDT이다. 다이클로로다이페닐트라이클로로에테인(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이라는 화학물질의 정식 명칭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일반 대중들이 기억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므로, 두문자를 따서 통상 DDT라 지칭한다.

모기 박멸을 위해 DDT를 살포하는 모습. ⓒ Free Photo

모기 박멸을 위해 DDT를 살포하는 모습. ⓒ Free Photo

 

DDT는 원래 자연에 있었던 물질은 아니고 새롭게 만들어진 화학물질인데, 오스트리아의 화학자 자이들러(Othmar Zeidler; 1850–1911)가 1874년에 처음으로 합성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DDT에 살충효과가 있는지 전혀 몰랐고, 이것이 밝혀진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다.

화학적인 살충제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국화과의 다년생화초인 제충국(除蟲菊; pyrethrum)이 모기를 죽이는 향불 및 천연농약으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충국은 양도 적고 너무 비쌌으므로 대량으로 일반에 공급되기는 어려웠는데, 특히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충국 원료의 공급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의 염료회사 가이기 연구소에서 살충제를 연구하던 뮐러(Paul Herman Muller; 1899-1965)는 제충국과 유사한 성분의 화학물질을 찾던 중, DDT라는 합성물질이 곤충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성질이 있음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1941년 살충제 DDT를 특허로 출원했고, 이듬해 제품으로 출시되어 살충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방전선 등 열대지역에서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에 시달리던 미군들에게 DDT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귀중한 선물이었다. 1942년 말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둘러싸인 스위스의 가이기 회사로부터 미국이 DDT의 샘플과 자료를 입수하는 일은 어느 중요한 군사작전보다도 더 비밀스럽게 진행되었고, 결국은 성공하여 DDT 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싼 가격으로 대량생산될 수 있었던 DDT는 전쟁 이후에는 살충용 농약으로도 널리 공급되었고, DDT 용도 발명자 뮐러는 말라리아모기 퇴치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DDT를 세계 각국이 남용하면서 환경에 대한 유해성과 부작용 문제 등이 제기되었고, 특히 생물학자이자 작가였던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 1962년에 출간한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서 DDT의 위험성과 피해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다. 인류를 구한 기적의 살충제 DDT가 환경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된 셈이다. 결국 DDT가 인체에 직접 피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곤충과 조류 등 각종 동물에 DDT가 축적되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점이 인정되면서, 1970년대 이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DDT를 농약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저서 침묵의 봄을 통하여 DDT의 유해성을 지적한 레이첼 카슨. ⓒ Smithsonian_Institution

저서 침묵의 봄을 통하여 DDT의 유해성을 지적한 레이첼 카슨. ⓒ Smithsonian_Institution

 

포도서리를 막는 착색제에서 농약으로

DDT와 유사한 용도 발명의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특히 착색제 보르도액을 농약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데자뷔라 할 만큼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대학 교수로 부임해 온 식물학자 미야르데(Pierre Marie Alexis Millardet; 1838-1902)는 포도의 병충해를 막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1882년에 노균병에 걸린 포도나무들을 살펴보던 미야르데는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길가에 있던 포도나무들은 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길가의 포도나무에는 황산구리와 석회를 섞은 용액이 뿌려져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차이는 없었다.

이른바 보르도액(Bordeaux mixture)이라고 불리는 이 혼합액은 어린이들의 장난이나 포도를 훔치려는 사람들로부터 포도서리를 막기 위하여 뿌려진 것인데, 보기에도 흉측한 녹색이어서 독약처럼 보이는데다가 나쁜 맛을 내기 때문에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포도를 지키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미야르데는 보르도액을 뿌리지 않은 포도는 노균병에 걸린 반면, 이것을 뿌린 포도는 병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욱 깊이 연구한 결과, 보르도액의 황산구리 속에 녹아 있는 구리이온이 노균병 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르도액이 포도나무의 노균병 방지에 특효가 있는 것이 밝혀지자, 대량으로 생산되어 프랑스 곳곳의 포도밭에 뿌려졌고, 유럽의 다른 지방에도 소문이 퍼져서 포도농가들은 큰 이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야르데는 또한, 감자나 토마토 등의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가 포도의 노균병균과 유사하는데에 착안하여, 보르도액을 감자의 병해를 예방하는 실험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보르도액은 전 세계에서 여러 다양한 농작물들의 병해를 막아 주는 중요한 농약으로 쓰이게 되었다. 보르도액을 그저 포도서리 방지용으로만 보아 넘겼다면, 인간에게 큰 혜택을 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보르도액은 DDT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친환경적인 농약으로서 현재까지도 과수나 화훼작물에 보호 살균제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보르도액은 사용하려고 할 때 각 농가에서 직접 제조하여 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착색제에서 농약이 된 보르도액. ⓒ Free Photo

착색제에서 농약이 된 보르도액. ⓒ Free Photo

 

 

아래는 2022년 6월 2일 뉴스입니다~

(원문: 여기를 클릭하세요~)

 

노벨상의 권위, 과학의 일탈

오렌지와 비타민C 분자모형을 들고 있는 폴링(1901-1994). 위키피디아 제공

“이처럼 논란이 되고 있는 비타민C 대량 복용 요법은 아직 정통 의학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민간 요법 차원에서 개인의 선호에 따라 시행될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도, 비타민C를 대량으로 복용해도 별 부작용이 없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세계의 비타민C 소비량은 늘어만 가고 있다.” -이재담 울산대 의대 명예교수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미국 과학자 라이너스 폴링의 비타민C 옹호는 신비주의적이거나 비과학적이지 않았다. 그의 이론에는 철저한 과학적 근거가 존재했다. 그에겐 겸상 적혈구 빈혈증을 유발하는 유전병 연구에서 쌓은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의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으로부터 ‘비타민C 부족혈증’이라는 또 다른 유전병을 가정하는 것은 전혀 비과학적인 추론이 아니었다. 인류는 분명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다른 종은 모두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비타민C 합성 능력을 잃어버렸고, 이를 교정하면 인체 내에서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분자들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좋은 건강을 보전하고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폴링은 자신의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서 ‘분자 교정 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제안했다. 비록 폴링이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였지만, 의사가 아닌 사람이 새로운 의학 분야를 창시하고, 의료의 영역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의료 전문직 내에서 공분을 초래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폴링의 아이디어가 비과학적이며 근거조차 없다고 공격했고, 미국 스탠퍼드대의 동료들조차 그의 새로운 계획을 무시했다. 1973년 폴링은 스탠퍼드대를 사직하고 자신의 독립 연구소인 ‘라이너스 폴링 과학 및 의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리고 무려 두 번의 노벨상을 수상했던 과학의 영웅은, 점점 더 과학계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제도권 과학계에서 자신의 비타민C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폴링은 자신의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권위를 사용해 개인 연구소를 만든다. 라이너스 폴링 과학 및 의학 연구소 제공

폴링의 라스푸틴, 이완 캐머런

1970년 폴링이 쓴 책 《비타민 C와 감기》에는 하루에 비타민C를 1g 이상 먹은 사람의 45%가 감기에 덜 걸린다는 주장이 쓰여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이 암과의 전쟁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고, 폴링의 비타민C 이론은 감기를 덤어 암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폴링은 직접 암 치료 실험을 수행할 연구비와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폴링은 이완 캐머런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외과 의사와 조우하게 된다.

이완 캐머런은 원래 암세포가 ‘히알루로니다제’라는 효소를 배출해서, 주변 세포의 기질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악성 암세포들이 기질을 뚫고 들어가 이웃 조직에 침투할 수 있다는 이론을 만든 의과학자였고, 히알루로니다제 저해제를 개발할 수만 있다면 암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캐머런은 1971년 처음으로 폴링에게 편지를 보내, 비타민C의 대량투여가 환자의 기질이 악성 세포의 침입으로부터 저항성을 갖도록 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생화학적 근거도 없이 저해제의 구조와 비타민C의 구조가 비슷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폴링에게 그의 방법으로 곧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의사가 아니었던 폴링에게 캐머런의 등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 없었다. 캐머런은 1973년 11명의 환자들을 통해 비타민C의 암 억제 기능 임상 시험을 시작했고, ‘베일 오브 레벤 연구’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임상시험에서 비타민C는 암 치료에 그다지 뚜렷한 효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캐머런은 무려 세 명의 환자가 사망한 데이터를 손에 들고도, “비타민C 치료법을 지지하는 이론적 논거가 치료 효과에 대한 평가를 정당화해 주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임상시험 결과는 의학 학술지 ‘랜싯’에 게재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엉터리 임상 시험 논문이 의학학술지에서 거절되자, 캐머런은 폴링을 꼬드겨 자신의 실험 결과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수적인 의사 집단이 자신들의 혁명적인 아이디어와 실험 결과를 탄압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직접 대중에게 알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 셈이다. 폴링은 미국립과학원 회원이었고, ‘미국립과학원회보(PNAS)’라는 학술지에 회원의 자격으로 논문 심사 없이 논문을 게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캐머런의 논문을 PNAS에 게재하려 했지만, 조금 놀랍게도 과학원 측은 논문의 게재를 거절했다. 폴링은 이에 항의했다. 회원의 논문게재를 거절하는 것은 사실상 아카데미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PNAS의 편집자들은 폴링의 논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폴링은 여러 대중 매체에 이를 떠들고 다녔고, 결국 이를 들은 《종양학)》이라는 저명한 암 연구 분야 학술지의 편집자가 논문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논문 게재를 제안하게 된다. 그 편집자 역시 비타민C 치료의 지지자였다.

이완 캐머런은 의사가 아니었던 폴링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그 날개는 작동하지 않았다. 오하이오 주립대 도서관 제공

노벨상 수상자의 비난과 찰스 뫼르텔의 조용한 실험

폴링과 캐머런은 자신들의 연구에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열정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동료들을 설득해 나갔다. 결국 권위 있는 슬로언케터링 암 연구소에 초대받은 그들은 16명의 환자들에 대한 임상시험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 어느 환자에게서도 치료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폴링과 캐머런은 실험이 제대로 된 환자집단이 아닌 이들에게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항변했지만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캐머런은 자신만의 대조군 검사법을 만드는 등 열정적으로 비타민C 치료법을 논문으로 발표했지만, 국립 암 연구소에 신청했던 연구비에서는 탈락했다. 하지만 국립 암 연구소의 부소장은 폴링의 항의와 비판이 계속되자 이를 제대로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암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던 메이요병원의 찰스 뫼르텔 박사에게 의뢰를 부탁하게 된다.

찰스 뫼르텔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1927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에서 의사가 되었다. 그는 1954년부터 메이요 병원에서 근무했고, 1970~1980년대 미식품의약국(FDA)의 항암제 검증위원으로 국립 암 연구소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그는 암 치료의 효과에 대한 연구에서 최고의 전문가였고, 실제로 약물 병용 요법으로 암치료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경험도 있었다. 1978년 메이요 병원이 수행한 임상시험 결과는 비타민C의 효과를 입증하지 못했고, 뫼르텔은 이 결과를 《뉴잉글랜드 의학보》에 게재한다. 뫼르텔의 실험 디자인에 불만을 가졌던 폴링과 케머런은 여러 대중 매체와 심지어 카터 대통령의 권위까지 동원해 또다른 임상 시험을 요구했고, 1985년 다시 한번 대규모 임상시험이 이루어진다. 결과는 똑같았다. 비타민C의 대량투여는 암환자의 상태를 전혀 호전시키지 못했다.

폴링은 뫼르텔의 임상 시험이 베일 오브 레벤의 시험 디자인과 다르다며 반박했고, 뫼르텔이 과학 사기를 저질렀다고 몰아갔다. 뫼르텔은 침묵을 지켰다. 폴링과 캐머런은 정상적으로 수행된 두 번의 임상시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메이오 병원과 뫼르텔을 괴롭혔다. 하지만 메이요 병원은 이들의 반박에 언제나 성실하게 답변했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자연스럽게 의학계는 폴링과 캐머런의 비판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논쟁은 종결된 것으로 보였고, 1994년 폴링의 죽음으로 비타민C를 암치료법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뫼르텔은 노벨상 영웅인 폴링의 이론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폴링으로부터 사기꾼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과학적 실험을 수행했고, 폴링의 비난에는 침묵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비판엔 반드시 과학적으로 반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폴링의 이름을 기억할 뿐, 노벨상 영웅의 실수를 막았던 뫼르텔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암치료를 검증하는 분야에 큰 공을 세우고, 1994년 조용히 숨을 거뒀다

과학으로서의 의학, 구원으로서의 의학

비타민C를 둘러싼 1970~1980년대 미국 의학계의 논쟁은 치료 효과를 검증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폴링은 검증된 임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내가 걸린 암을 비타민C로 치료하려 했다. 의료사회학의 일부 전문가들은, 치료법이 논쟁에 휩쌓여 있을 때,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의료 자원의 배분에서 소비자들의 선호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체계를 제도화시켰고, 여러 종류의 대체의료가 실제로 제도권에 들어올 수 있게 해두었다. 그런 치료법에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해도, 대체 의료에 대한 소비자들의 높은 수요가 있다면, 국가는 대체 의료에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 네덜란드의 입장인 셈이다.

《닥터 골렘》에서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는 의학 또는 의료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학은 다른 과학들처럼 과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원, 즉 환자가 고통 받는 시기에 이를 줄여 주고 도움을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일을 제대로 하려고 애써야 하지만, 구원으로서의 의료는 지금 여기에서 당장 답을 내놔야 한다. 과학으로서의 의학과 구원으로서의 의학 사이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긴장이 발생한다. 치료에 대한 즉각적인 희망은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치료의 가능성이 아무리 낮더라고 즉각적인 선택이 합리적이지만, 공공선의 입장에서 의학이 그런 선택을 반복한다면 장기적으로 의학은 과학적 합리성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맡겨 두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 의료를 위한 우리의 장기적인 집단 책임을 방기할 위험을 안고 있다. 설사 아프거나 죽어 가는 개인들이 치료법을 시도해 보는 데서는 여전히 현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콜린스와 핀치는 과학을 ‘골렘’으로 비유한다. 골렘은 유대인의 설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점점 더 커지고 통제가 불가능해져서, 나중엔 유대인들까지 해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설화에 나오는 골렘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골렘은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다. 즉, 골렘은 인간이 창조했지만 인간의 충직한 노예도 아니고, 인간을 말살하는 악의 화신도 아니다. 콜린스와 핀치는 과학이 바로 ‘골렘’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골렘인 과학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신도 협잡꾼도 아닌, 자연세계를 다루는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라고 규정한다. 배관공이 배관의 전문가이듯, 과학자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의 전문가다. 배관공이 배관수리에서 종종 실수를 하듯이, 과학자들도 과학을 다루면서 종종 실수를 한다.

과학도 의학도 마치 골렘처럼 행동한다. 골렘은 우리의 친구도 적도 아니다. 골렘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를 해치게 된다. 위키피디아 제공

과학을 지키는건 어려운 일이다

폴링의 비타민C에 보인 말년의 집착은 한 명의 뛰어난 과학 천재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폴링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에 사용할 때 언제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교훈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비타민 C와 감기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고 책과 논문을 집필하던 시기의 폴링은 과학자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는 쉽게 흥분하긴 했지만 과학자사회의 전통에 따라 논문을 통해 반박하고 실험적 근거를 통해 동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이론이던 과학자 사회에 처음 소개될 때는 폴링의 비타민C 이론처럼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론이 설명하는 실험결과가 점점 증가하고, 이론이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더 효과적임이 자연스럽게 증명되면, 최초의 저항은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새 그 이론이 주류가 된다. 만약 폴링의 비타민C 이론이 실제로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면 과학계와 의학계의 저항이 얼마나 크던 간에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폴링의 이론은 그의 노벨상이라는 권위에 힘입어 동료들에 의해 성실하게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입증되지 못했다. 과학계와 의학계는 폴링의 이론을, 만약 폴링이 아니었다면 아예 무시되었을 이론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입증하려 노력했고, 결국 노벨상이라는 권위조차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폴링의 비타민C 논란에서 주목해야 하는 교훈 중 하나는 과학 혹은 의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과학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동료평가 방식을 거부하는 이는 장기적으로 과학에 위협이 된다. 또한 역사적 사례들은 학술지나 학술대회가 아니라 대중과 언론을 통해 연구를 발표하고 포장하는 과학자와 의사 대부분이 결국 사기꾼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는 연구결과를 언론과 대중을 통해 알리는데 열성적이었고, 한때 과학계를 혼란에 빠뜨린 ‘제로존 이론’ 또한 학술지가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해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진 엘리자베스 홈스의 테라노스 사건 또한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다.

폴링은 비타민C와 관련된 여러 논쟁에서 계속해서 패퇴하자, 과학자 사회가 자연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사용해온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세속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매체를 통해 비타민C의 효능을 홍보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그의 권력을 가진 친구들을 동원했고, 자신의 이론과 맞지 않는 실험결과를 만든 연구자를 해임하고, 미국 건강식품협회에 기부를 통해 상을 받는 등, 협잡꾼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만약 폴링이 노벨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영웅이 아니었다면, 비타민C와 관련한 연구는 좀 더 정상적인 방식으로 과학계와 의학계에서 시험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자 폴링은 비타민C에 관해서만큼은 과학자가 아니라 그가 반핵운동을 하던 활동가의 정체성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방식은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데 있어 철저히 실패했다. 영웅의 추락은, 과학을 권위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폴링의 비타민C 논란은 과학이 권위로 사용될 때조차 과학자사회의 규범이라는 제약 속에서만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 규범을 벗어날 때 과학은 아군을 해치는 골렘이 된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