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건강을 지켜준 비타민
90년 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중년여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있다. 눈가의 잔주름을 펴준다는 레티놀이 바로 그것인데, 마치 의약적으로 효능이 있는 것처럼 인상을 풍겨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팔렸다. 한 화장품 회사에서는 발매 5개월만에 약 3백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레티놀은 비타민 A의 한 종류에 해당하는 화학명이다. 피부가 딱딱해지는 것을 막는 기능이 있어 주름살을 막는 화장품에 이용된 것이다. 하지만 레티놀은 밤눈이 어두워지는 야맹증 치료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비타민은 사실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한 유기물질이다. 그러나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과 같은 유기물질과 달리 그 자체가 분해되어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타민은 외부에서 섭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호르몬과 다르다. 하지만 호르몬처럼 체내에서 만들어내는 동물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비타민 C를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물 등을 먹음으로써 섭취해야 하지만 토끼는 몸에서 합성할 수 있다.
20세기 초까지 동물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물 등 5가지 정도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영국의 과학자 프레데릭 홉킨스(1861-1947)는 1906년 부가적인 식품요소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홉킨스가 비타민을 발견하기 전인 1883년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에이크만(1858-1930)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이 각기(脚氣)병를 앓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각기병는 다리가 붓고 손발에 감각 이상이 오는 병으로 갑자기 발병해 구토를 일으키다가 심하면 1-3일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이다. 에이크만은 그 병의 원인을 조사한 결과 현미를 먹는 사람은 걸리지 않고, 백미를 먹는 사람들이 주로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후에 각기병는 비타민 B1이 모자라 일어난 병으로 밝혀졌다. 백미에는 비타민 B1이 없었던 것이다.
홉킨스와 에이크만이 발견한 새로운 물질은 1911년 폴란드 화학자 카시미르 풍크(1884-1967)가 비타미네(vitamine)라고 이름지었다. 발견되었던 물질 안에 들어있는 아민(amine)과 라틴어로 생명을 뜻하는 ‘vita’라는 말을 합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비타민 중에서 아민이 없는 것도 발견돼 1920년 경부터 ‘e’를 빼고 비타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초기 비타민의 이름은 발견 순서에 따라서 A, B, C로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화학명으로 이름을 붙였다. 비타민 A는 레티노이드, B1은 티아민, C는 아스코르브산, D는 칼시페롤, E는 토코페롤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비타민은 10여종이다.
비타민이 중요한 까닭은 부족해도 안되고 많아도 안되는 물질이기 때문. 예를 들어 비타민 C가 부족하면 괴혈병에 걸린다. 이것은 오랫동안 배를 타는 선원들이 잘 걸리는 병으로, 잇몸에서 피가 나고 심한 악취를 풍기며 빈혈과 무기력증을 동반한다.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배를 타고 오랫동안 항해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괴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괴혈병의 원인이 비타민 C 결핍 때문이라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1928년 센트-되르디(1893-1961)에 의해 비타민 C가 분리되기 전까지 선원들은 민간처방으로 오렌지와 같은 과일을 먹었다.
비타민 A의 경우 부족하면 야맹증에, 심하면 안구건조증에 걸린다. 그렇다고 많이 먹게 되면 피부가 노랗게 변하고 구역질이 나며 머리가 빠진다. 영아의 경우에는 성장이 느려지고 신경이 과민해질 수 있다. 결핍시 구루병(척추나 뼈가 굽는 병)에 걸리게 되는 비타민 D도 많이 복용하면 중독 현상과 함게 식욕부진, 구역질을 일으킨다. 이런 사람의 손톱이나 눈속을 보면 노란색 침착물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타민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많은 노벨상을 배출했다. 비타민 D의 구조를 밝힌 독일의 빈다우스(1876-1959)가 1928년 노벨화학상을, 비타민 발견의 공로로 홉킨스와 에이크만이 192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비타민 C의 구조결정에 관한 연구로 영국의 하워스(1883-1950)와 스위스의 카러(1889-1971)가 1937년 노벨화학상을, 비타민 C를 발견한 헝가리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센트-되르디가 같은 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비타민 B2를 발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리하르트 쿤(1900-1967)이 1938년 노벨화학상을, 덴마크의 담(1895-1976)과 미국의 도이지(1893-1986)가 비타민 K의 발견으로 194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리하르크 쿤
리하르트 쿤은 20세기가 시작한 1900년 12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던 그는 역시 세기의 천재로 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볼프강 파울리와 김나지움(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교육기관) 동급생이었다. 둘은 평생 우정을 교환했다고 한다. 쿤은 빈대학 화학과에 입학했으나 당시 유명한 화학자인 리하르트 빌스테터가 있는 뮌헨대로 옮겨 그의 지도 아래서 효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가 1922년으로 불과 22살 무렵이었다. 그는 26살에 취리히 연방공대 교수로 취임하여 일반화학 및 분석화학을 담당하는 등 당시 독일 화학계의 ‘젊은 피’로 주목 받게 된다. 3년 뒤인 1929년에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새로 설립된 ‘카이저-빌헬름-연구소(KWI)’의 화학책임자가 되었다. 이곳은 그의 평생 직장이 되었는데 1950년 ‘막스 플랑크 연구소(MPI)’로 개명된 이후에도 1967년 사망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화학 전반에 관한 폭넓은 지식으로 무장한 쿤은 이론화학에서 유기화학, 생화학에 걸치는 광범위한 연구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십 명의 과학자들로 이뤄진 ‘쿤 사단’을 거느리며 평생 700편이 넘은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정력적인 연구가였다.
초기 그의 관심은 일련의 이중결합이 교대로 배치된 화합물이었는데 특히 생물체에 존재하는 카로티노이드(carotenoids)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집중했다. 비타민A가 카로티노이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밝힌 것도 그의 연구팀이다. 한편 그는 비타민B2, 비타민B6 등에 대한 중요한 연구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연구팀은 물질을 분리하고 분석하는 여러 방법을 개발해 현대 화학실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것이 크로마토그래피다. 혼합물을 흡착제가 들어있는 관을 통과시키며 각 성분별로 분리하는 장치인 크로마토그래피는 원래 러시아의 화학자 미카엘 츠비트가 1906년에 처음 고안했으나 성능이 시원치 않아 잊혀진 상태였다. 문헌을 보다가 크로마토그래피에 대해서 알게 된 쿤은 흡착제의 종류를 바꿔가며 실험한 결과 분리능이 뛰어난 현대 크로마토그래피 방법을 확립했다.
쿤의 연구팀은 1930년대 25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는 경이로운 업적을 올렸고 그는 불과 37세에 독일화학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독일은 나치의 집권으로 암운이 감돌고 있었다. 쿤 역시 한때 독일을 떠날 생각도 했으나 결심을 하지 못해 독일에 남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노벨상의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거절의 편지를 써야 하는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를 침공으로 유럽은 점차 전쟁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해 11월 17일 뒤늦게 전년도인 193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쿤이 선정됐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연구소에서는 이날 밤 ‘젊은 보스’인 쿤의 수상을 축하하는 떠들썩한 파티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역시 독일 화학자들인 제라드 도마크와 아돌프 부테난트가 193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평상시였다면 노벨상 연속 수상은 국가적인 경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즉각 베를린으로 소환된다. 그곳에서 이들은 노벨상을 거절한다는 편지를 스웨덴에 보내게 된다. 사실 이들의 노벨상 수상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외쳐대는 나치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히틀러가 노벨위원회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1935년 반나치 주의자였던 저널리스트 칼 폰 오시츠키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노벨상을 나치정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며 혐오했다고 한다 . 아무튼 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노벨상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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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938년 노벨화학상 수상 업적과 수상 추천문이다.
1938년 노벨 화학상은 “카로티노이드 및 비타민 연구”로 리하르트 쿤에게 수여되었습니다. 1938년 노벨 화학상 선정 과정 중 노벨 화학 위원회가 당해 수상자 후보들이 알프레드 노벨 박사의 유지에 부합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리하르트 쿤은 1년 후인 1939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 재단의 규칙에 따라 이런 경우 노벨상은 다음해까지 보류되므로 리하르트 쿤은 1938년의 노벨상을 1년 후인 1939년에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리하르트 쿤은 나치스 정권에 의해 수상이 거부되었지만, 후에 상장과 매달을 수여했습니다.
리하르트 쿤 교수는 1926년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일반화학 및 분석화학 책임자가 되면서 폴리엔의 원자배열을 구성하는 이른바 짝이중결합의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당시 다이페닐폴리엔 그룹은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카로티노이드인 크로세틴 내에 이중결합사슬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짝이중결합에 대한 쿤 교수의 여섯 번째 보고서에 이미 채소에서 나온 폴리엔 색소의 구조를 결정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그룹에 속하는 300개 이상의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면서 쿤 교수는 단지 새로운 물질을 분리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에서 그는 불포화 물질의 화학적 구조와 광학 특성, 유전체적 특성, 그리고 자기적 특성의 연관성을 보이기 위해 더욱 고심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얻은 연구 결과는 유기화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폴리엔에 대한 쿤 교수의 연구는 카로티노이드 화학으로 곧장 연결되었습니다. 1930년 카러는 카로틴의 조성을 밝혔고 그 이전에 빌슈테터는 카로틴의 원소성분인 C40H56을 확인하였습니다. 1931년 쿤 교수(그 당시 이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음)와 취리히의 카러, 그리고 런던의 로젠하임이 당근의 카로틴 성분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그러나 각각 독립적으로 발견하였습니다. 그중 하나인 베타카로틴은 편광면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다른 하나인 알파카로틴은 광학적으로 비활성을 보입니다. 1933년에 쿤 교수는 감마카로틴으로 불리는 세 번째 카로틴을 발견했습니다.
카로틴의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중요성은 동물의 간에서 가수분해되어 베타카로틴 한 분자나 알파카로틴 두 분자로부터 두 분자의 비타민 A, 악세로프톨이 형성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물질은 고등동물의 성장에 필수적이며 특히 점막의 정상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합니다.
여러 공동 연구자들과 함께 쿤 교수는 동물과 식물계에서 카로티노이드 존재에 대한 수많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의 연구 결과 중에서 특히 다음의 식물계에 들어 있는 카로티노이드의 발견과 구조결정은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피살리스류의 과실로부터 피살리엔, 라눙쿨루스종으로부터 분리한 헬레니엔과 플래복산틴, 팬지로부터 불안정한 크로세틴, 옥수수 루빅산틴으로부터 타락산틴과 크립톡산틴입니다.
쿤 교수는 아스탁산틴 카로티노이드와 갑각류의 색소단백질의 관계를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 로독산틴과 아스탁산틴의 주성분을 알아내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카로티노이드 그룹에 속하는 다른 대표적인 물질들의 분리와 합성에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인 크로마토그래피 방법을 완성하는 데 쿤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쿤 교수의 두 번째 활동 분야는 비타민 B 복합물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쿤 교수는 센트죄르지와 바그너 야우레크와 함께 아주 중요한 물질인 비타민 B2(락토플라빈 혹은 리보플라빈)를 처음으로 분리해 냈으며 비타민 B2의 화학적 성질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쿤 교수와 공동 연구자들은 탈지우유 5300리터로부터 1그램의 순수한 노란색 물질인 락토플라빈을 분리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 성분이 C17H20O6N4인 것을 밝혔습니다. 락토플라빈의 분해물질인 루미플라빈은 이전에 이스트에서 생기는 노란 효소로부터 만들어진 물질과 동일하였습니다. 후에 여러 방식으로 확인된 루미플라빈의 구조식을 통해 쿤 교수는 락토플라빈의 화학적 설명에 대한 열쇠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는 분석적 방법으로 밝혀졌던 루미플라빈의 구조식을 알록산과 오디아미노벤젠 유도체의 축합반응을 통한 합성으로 증명하였습니다.
1939년 초에 쿤 교수는 비타민 B 복합체와 관련하여 두 번째 중요한 발견을 하였습니다. 벤트, 안데르삭, 베스트팔과 함께 항피부염 비타민, 즉 비타민 B6라고 부르는 비타민 B 복합체의 성분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그 화학적 성분과 구조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쿤 교수가 밝혀낸 아데르민이라고 부른 물질은 2―메틸―3―하이드록실―4,5―다이하이드록시메틸피리딘으로 입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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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나치 치하에서 여전히 일했지만 화학무기개발 같은 국가연구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비가 계속 줄어 연구가 위축돼 1945년에는 불과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때까지의 자기 연구결과에 대한 이론적 측면을 고찰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나치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독일에서 연구소 재건에 전력하는 그에게 미국으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를 거절하고 독일에 남게 된다. 결국 그는 독일의 화학이 다시 일어서는데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했다. 1952년에는 BASF의 R&D 소장으로 임명됐고 이후 이 회사의 경영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2차 세계대전 후 쿤의 관심은 항미생물 특성을 지닌 천연물을 분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약품을 설계하는 연구에 모아졌다 . 식물에 존재하는 알칼로이드가 해충을 억제한다는 사실과 모유에 들어있는 당류가 세균과 바이러스의 성장을 막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도 쿤의 연구팀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그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을 불러모아 팀을 만들었고 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자들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연구분위기를 만들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유기화학에서 생화학, 미생물학 등 광범위한 영역의 연구를 진행시키면 ‘학제적 연구’라는 연구소의 설립 취지를 살리기 위해 매진했던 쿤은 안타깝게도 1965년 후두암 진단을 받는다. 치료를 받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지만 쿤은 절망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다가 1967 년 7월 31일 숨을 거두었다.
과학자가 되기 전 배우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강단에만 올라서면 유머와 명쾌한 설명으로 좌중을 몰입하게 했다는 그는 지적으로 예외적인 천재였지만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실험실 생활을 즐겼고 새로 만들어낸 분자 결정이나 색소의 빛깔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