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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 프로젝트는 ‘찬란하고 다채로운 검정의 향연’으로 귀결되었다.

 

 

■ 찬란하고 다채로운 검정의 향연

‘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 시작은 이랬다. 검정은 다 같은 검정일까? 내가 보는 검정과 네가 보는 검정이 같을까?

나는 미술대학 디자인학과에서 글자를 다루는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한다. 글자는 기본적으로 흰 바탕에 검은 안료로 쓰거나 찍는다. 밝은 배경으로부터 글자가 검정에 가까워질수록 또렷하게 잘 보이기에 그렇게 한다. 판화나 디자인 전공처럼 대량 복제를 하는 분야에서는 색을 칠하기보다는 주로 찍어낸다.

그런데 아직 초심자인 학부 전공생들이 저지르는 고전적인 오판이 하나 있으니, 컴퓨터 작업을 마친 후 ‘이제 출력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안 끝났다. 출력부터 새로운 일거리의 시작이다. 안료의 성격과 착색되는 사물의 재질, 기계들의 메커니즘, 그리고 색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

학생들에 낸 숙제의 결과는

‘오색찬란’한 검정

이 점을 이해하도록 고안한 일회성 프로젝트의 이름이 ‘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이었다. 세부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진파일을 출력물로 구현해오는 것. 잉크나 토너를 변경하든 검정에 청색 등 다른 색을 섞든 후가공을 하든 심지어 기계를 발명하든, 검정의 농도가 최대한 그윽한 깊이를 가지는지, 중간 톤은 잡색 없는 풍부한 뉴트럴 그레이인지, 하이라이트는 흰색답게 보이는지 점검한 후 그 결과물을 개선시켜 간다.

다른 하나는 규격 종이 한가운데에 정해진 크기의 단순한 검정 색면을 배치한 후 최대한 깊고 짙은 검정을 구현해오는 것이다. 한 주가 지난 후, 학생들이 ‘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을 펼쳐놓은 교실 벽은 ‘찬란하고 다채로운 검정의 향연’으로 귀결돼 있었다. 검정이 저토록 역설적이게도 ‘오색찬란’ 다양한 색채를 가진다는 사실을 모두가 감각의 경험을 통해 수긍하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은 종이와 안료, 기계, 착색의 특성과 원리,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공할 만한 탐구심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단순한 과제에서조차 다각도로 창의적인 문제해결력을 발휘했다. 그중 ‘검은 사각형’ 과제의 해결책들은 더 기발하고도 진지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구현하고자 한 ‘궁극의 풍요로운 검정’을 모델로 삼은 학생은, 19세기 영국의 모리스가 쓴 재료를 그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그에 접근하고자 했다. 탄소와 물과 아교 혼합물에 알코올을 타서 발색과 지속력이 보다 좋은 먹물을 만들고자 한 고려와 조선의 활자 인쇄 장인들, 금속활자의 미끄러운 표면에 묻은 잉크가 두꺼운 종이에 꾹 찍혀서 옮겨질 수 있도록 점성을 높인 잉크를 개발한 구텐베르크, 모두 ‘궁극의 검정’을 추구한 공학자이자 예술가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판화 전공생의 해결책이었다. 흰 종이의 표면에만 묻은 검정은 ‘피상적인 가짜’라 생각한 그는 종이를 검정 안료에 며칠간 ‘절였다’. 그렇게 종이를 이루는 셀룰로오스 속살의 가닥가닥까지 검게 물든 검정이야말로 ‘깊고 그윽한 검정의 심연’이라 여긴 것이다. 학생의 심성과 공정 속에도 깊은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빛’이 ‘있는’ 유광과

‘빛이 없는’ 검정의 공존

역설적인 ‘유광 검정’처럼

조명·재질도 색채에 영향

‘검정’뿐 아니라 ‘깊은’과 ‘그윽한’이라는 형용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학생은 표면이 까실한 무광일 때 난반사가 일어나 깊이감이 형성된다고 여겼고, 다른 학생은 쨍하게 반짝이는 유광일 때 검정이 검정답게 진해진다고 봤다. 여기서 ‘유광 검정’이라는 자연어의 단어 조합은 퍽 역설적이지 않은가? ‘빛(光)’이 ‘있는’ 유광과 ‘빛이 없는’ 검정의 공존이라니. 이런 역설이 일어날 때 과학의 정교한 어휘와 개념은 유용한 구심점이 된다.

‘검정’이란 뭐고, ‘어둠’이란 뭘까? 빛(가시광선)이 없는 상태는 ‘어둠’이다. 한편 어둡지 않은 조건에서, 사물이 함유한 색소가 빛을 모두 흡수해 ‘사물로부터 우리 눈에 반사해 들어오는 빛’이 없는 상태가 ‘검정’이다. 빛을 100% 흡수하는 물질이라야 ‘검정의 이데아’가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지구상 가장 검은 물질인 ‘밴타블랙(Vantablack)’의 빛 흡수율은 최대 99.965%다. 검정 물체와 관계 맺는 다른 물리적인 조건들이 또 그 색채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안료를 쓴 물체라도 조명, 표면 광택과 재질, 반사율 등에 따라 색조와 음영과 색온도가 달라진다. ‘유광’이란 조명과 표면 재질의 작용이다.

색은 빛의 파장뿐 아니라

인간 감정과도 반응하기에

우리가 보는 검정은, 다르다

그리고 사람마다 검정이라고 인정하는 범주가 다르다. ‘검정성(blackness)’의 표준은 존재하지만 말이다. 색은 빛의 물리적 속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눈과 뇌의 수용 및 인지와도 관계된다. 빛이 눈의 망막세포를 자극해 그 전기신호가 뇌에 전달되면 우리는 색을 판별한다. 나아가 색들은 빛의 파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감정과도 반응한다. 이 모든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의 검정 물체에서 우리가 보는 검정이 서로 같을까? 같지 않다.

교실 벽에는 분명 더 낫거나 덜 나은 검정, 더 타당하거나 부적당한 검정이 있었다. 우리는 대량생산에 따른 표준화를 추구하는 전공이니 때로는 합의에 따라 차이를 좁혀가야 한다. 그럼에도 저 ‘오색찬란’한 검정의 향연이 펼쳐지던 교실 벽으로부터, 다양한 개인들의 차이와 다채로운 해결책이 드러나던 그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대상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간 소실점의 엇갈림을 드러내고 차이를 직시하며 인정해야 할 때도 있다.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는 이런 여정이 될 것이다.

유지원

 

 

■ 검정은 검지 않다

우주는 검다. 우주는 그 광활함만큼이나 깊고 검은 기운으로 별빛을 압도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을 한데 모아봐도 우주 전체 부피의 ‘자’분의 1의 공간에 모두 넣을 수 있다. ‘자’는 1 뒤에 0이 24개 붙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우주의 공간과 비교하면 별은 하늘을 배회하는 가냘픈 반딧불이다. 이처럼 우주는 별빛이 아니라 검은 공간으로 충만하다. 검정은 우주의 색이다.

엄밀히 말해 검정은 색이 아니다

색은 빛의 진동수가 결정하지만

검정은 ‘빛의 부재’를 말한다

하지만 검정은 색이 아니다. 색은 빛의 파동이 가지는 진동수가 결정한다.

1초에 450조(兆)번 진동하면 붉은색이다. 검정은 진동 자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 검정은 색이 아니라 빛의 부재에 붙여진 이름이다.

렘브란트의 작품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빌럼 판 루이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민병대‘(1642년)

 

 

검정이 가득한 민병대 그림처럼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빛을 보여주기 위해 어둠을 썼다

부재로서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

렘브란트의 그림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빌럼 판 루이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민병대’(한때 ‘야경’이란 잘못된 이름으로 불렸다)에서 가장 중요한 색은 검정이다.

이 그림에는 암스테르담의 민병대였던 코크 대위와 루이턴뷔르흐 중위가 이끄는 열여섯 명의 민병대원이 등장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30년전쟁’ 중이었다. 가톨릭 국가였던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전쟁이다. 검은색 옷은 네덜란드의 신교를 상징한다. 배경까지 검은색이라 그림 전체가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검은 우주에 별처럼 빛나는 루이턴뷔르흐 중위는 가톨릭을 상징한다. 종교를 초월해 네덜란드를 지키려는 민병대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밝은 인물은 노란 옷을 입은 소녀인데 민병대의 마스코트다. 전쟁의 어둠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네덜란드인의 의지를 나타내는 걸까. 검정은 어둠처럼 그림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종교전쟁의 광풍 속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색이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다. 빛을 보여주려면 어둠이 필요하다.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지만 빛 또한 어둠이 있어야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빛의 부재로서의 검정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 많은 부재들이 그러하다. 의(義)의 부재인 불의(不義)는 단지 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나 갑질이라는 실체가 되어 세상을 배회한다.

검은 우주에서 더 검은 블랙홀은

흑체복사로 빛을 뿜지만

인간이 볼 수 없는 진동수의 빛뿐

우주에는 우주보다 검은 실체가 있다.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 강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천체다. 블랙홀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주위에 있는 물질은 보인다. 이들 물질은 블랙홀이 갖는 엄청난 중력에 끌려 들어가며 짜부라지고 압축되며 빛을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물을 ‘강착원반’이라 하는데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블랙홀 ‘가르강튀아’에서 그 위용을 뽐낸 적 있다. 강착원반의 온도는 1억도에 이르며 엑스선, 감마선을 포함한 엄청난 에너지의 빛을 뿜어낸다. 블랙홀은 검지 않다.

블랙홀이 주변의 물질을 다 먹어치우면 강착원반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검은 블랙홀을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올해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에 따르면 블랙홀도 온도를 가지며, 온도를 갖는 물체는 빛을 낸다.

이 빛을 흑체복사라 하는데 영어로 흑체는 ‘black body’, 즉 검은 물체다. 흑체란 모든 진동수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물체가 내는 빛이라니! 흑체의 좋은 예는 동굴이다. 일단 동굴로 들어간 빛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동굴 내부 여기저기를 수없이 반사하며 모두 흡수돼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굴은 정말 검다.

동굴이 빛을 흡수하기만 한다면 동굴의 에너지가 무한히 커질 것이다! 빛도 에너지를 갖는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동굴은 빛을 내놓기 때문이다. 이를 흑체복사라 한다. 흑체복사로 나오는 빛의 색은 물체의 온도가 결정한다. 태양이 흑체복사로 내놓는 빛은 주로 노란색이다. 태양이 노랗게 보이는 이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처럼

무수히 반사된 빛을 모두 흡수해야

가장 완벽한 검정 ‘밴타블랙’이다

보통 동굴에서 나오는 흑체복사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진동수의 빛이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는 동굴이 검게 보인다. 흑체복사는 완벽한 검은색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바로 ‘밴타블랙’이다. 여기서 빛은 수직 방향으로 서 있는 나노튜브라는 미세구조물들과 무수히 부딪히며 모조리 흡수된다. 흡수된 빛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으로 흑체복사되어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물체는 동굴과 같이 완벽한 검은색을 띨 것이다.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는 자신의 작품인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클라우드 게이트’를 밴타블랙으로 칠했다. 원래 클라우드 게이트는 스테인리스강으로 되어 있어 거울과 같이 빛을 반사했다. 빛을 반사하던 물체를 빛을 흡수하는 물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밴타블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특허권을 구매하여 자기 이외에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밴타블랙보다 그의 마음이 더 검은 것은 아닐까.

밴타블랙을 바라보면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난다. 그것은 우주일 수도 있고 블랙홀일 수도 있고 지금 내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진창 같은 인생일 수도 있다. 말년의 렘브란트도 인생의 진창 속에서 쓸쓸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진창은 빠져나올 수 있다. 검정은 끊임없이 흑체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인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듯 검정도 검지만은 않다.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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