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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도상을 꼽는다면 빠지지 않고 들어갈 한 가지는 원자 모형일 것이다. 원자와 그 내부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오늘날의 전자공학과 전자산업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로 기공식에 참석하여 TRIGA Mark–II 원자로를 시찰 중이다. / 국가기록원
국가나 기관의 휘장에 담긴 그림들은 실제의 대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대개 특정한 가치나 주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시대에 만든 휘장들은 산업과 기술의 상징을 그려 넣은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산업과 기술이 가져올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것을 넘어서, 근대의 진보를 상징하는 핵심 사상으로서 과학기술을 중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때로는 추상적인 사상 그 자체가 휘장에 등장하기도 한다. 1889년 공화국 수립과 함께 제정한 브라질 국기에는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라는 모토가 적혀 있는데, 이는 과학기술을 통한 인류의 진보를 낙관했던 계몽사상가 오귀스트 콩트의 모토 ‘사랑을 원리로, 질서를 기반으로, 진보를 목표로’를 차용한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상징인 톱니바퀴
과학기술 또는 산업기술의 구체적 상징으로 휘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톱니바퀴일 것이다. 톱니바퀴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등장한 기계문명을 상징한다. 물론 이 기계문명을 떠받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므로 노동계급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톱니바퀴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나 사회주의의 영향이 강한 나라들의 국장에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의 눈에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상징인 톱니바퀴가 미래의 진보를 상징한다기보다는 오래된 ‘굴뚝산업’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0세기의 과학기술문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20세기 과학기술은 18∼19세기 산업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아 출발했지만, 19세기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새로운 영역들을 개척했다. 인간의 일상 감각을 훌쩍 뛰어넘는 아주 큰 세계(우주)와 아주 작은 세계(원자)가 인간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20세기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도상을 꼽는다면 빠지지 않고 들어갈 한 가지는 원자 모형일 것이다. 원자와 그 내부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오늘날의 전자공학과 전자산업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1961년 원자력원 낙성식에 참석했다. / 국가기록원
원자 궤도 모형은 20세기에 설립된 과학기술 관련 기관의 휘장에 단골로 등장하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것은 원자력을 과학기술이나 의료 등 평화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상징할 때만 쓰였다. 원자력 무기의 이미지로는 버섯구름이 사람들의 뇌리에 너무나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자 궤도 모형과 버섯구름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원자 궤도 모형은 버섯구름이 상징하는 죽음과 파괴의 공포를 대신하여 원자력의 긍정적인 면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선택되고 육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통해 원자폭탄의 위력은 온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원자력 무기 독점이 깨졌고, 핵전쟁의 공포가 세계를 사로잡았다. 미국은 전략을 바꾸어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이를 통해 소련은 무기 개발에 골몰할 때 미국은 평화를 위해 활용한다는 대립구도를 만들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개발도상국들에게 원자력 응용기술을 원조하여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 사업을 제창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발족하였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 사업의 휘장 한가운데에는 원자 궤도 모형이 있고, 그 주변을 현미경(기초과학),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의학), 톱니바퀴(산업), 밀단(농업)이 둘러싸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휘장은 원자 궤도 모형을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가 둘러싼 모습이다. 원자 궤도 모형은 온 세계의 과학교과서에 실려 있던 가치중립적인 이미지였지만, 이런 휘장들이 반복적으로 대중매체에 소개되면서 차츰 원자력의 긍정적 활용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 사업을 기념하는 미국의 우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미지와 현실
한국에도 평화를 위한 원자력 사업의 일환으로 실험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투(TRIGA–Mk II)’가 건설되었고, 그것을 관리하며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기관으로 1959년 원자력원이 설립되었다. 원자로 기공식장의 사진에는 초창기 원자력원의 휘장이 보이는데, 첨성대 위에 원자 궤도 모형이 별처럼 떠 있는 모양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원조로 짓는 원자로이지만 우리에게도 과학의 전통이 있었음을 애써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후 한국에서 원자 궤도 모형은 원자력을 넘어서 첨단과학기술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특구라 할 수 있는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로고에 전통적 명물인 온천과 원자 궤도 모형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자 궤도 모형이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게 될 무렵에는 과학자들은 이미 더 진전된 다른 원자 모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확립되면서, 이동하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콕 집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따라서 친숙한 이미지와 같이 전자의 궤도를 정확히 그려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자가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확률만 계산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물리학에서는 전자를 더 이상 궤도에 그리지 않고, 핵을 둘러싼 뿌연 구름 같은 모습으로 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 궤도 모형은 일종의 대중문화 이미지로 굳건히 살아남아 있다. 애매모호한 전자구름보다는 명쾌한 선을 그리는 궤도가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느낌을 더 잘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과학의 세계에서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실제 모습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갖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는 무엇이 ‘이미지’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도 단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과학기술문명이다. 비록 오늘날의 과학교과서에서는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원자 궤도 모형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통해 한 발씩 내디뎠던 탐구의 여정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의미가 있다.